인물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①

해암도 2021. 10. 6. 13:59

꼬부랑 할머니는 한국인과 인류 이야기의 原型… 창조의 힘이자 생명자본

 

이어령은 한국인 속에서 인류의 씨앗을 찾고 한국인의 原型 길어 올려
⊙ ‘한국인 이야기’를 피시스(자연계)와 노모스(법·제도), 세미오시스(상징계)라는 ‘三太極’의 방법론으로 풀어
⊙ 낳고 産育하는 ‘꼬부랑 할머니’는 谷神不死이자 玄牝… “생명의 원천, 인류 역사의 근원”
⊙ 한국인 문화 유전자 탐사한 《한국인 이야기》 12권 완간 계획… 지금까지 1권 출간
⊙ “BTS(방탄소년단)의 몸짓도 정형화되지 않은 막춤의 전통과 관련 있지 않을까”
⊙ “내 머리와 마음속 ‘전복’이 있는지 몰라도 이미 그려놓은 글의 ‘보물지도’ 따라 모험 길에 오르세요”

李御寧
1933년생.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
 
  《초사(楚辭)》 굴원편에 나오는 〈어부사〉의 노랫말이다. 이어령(李御寧) 선생(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은 ‘창랑의 물’로 비유되는 풍파의 세월을 돌아보며 요즘 부쩍 ‘물이 맑았던 시절이 언제였나?’ 더듬어 본다.
 
  늘 그렇듯 세상은 제 살 궁리에 제 원한에 충실했지만, 선생은 상앗대를 쥐고 갓끈을 죄며 정신적 지층(地層) 탐사를 떠났었다. 세월이 흘러 갓이 다 해어졌다. 때로 물이 탁해도 갓끈을 씻었고 물이 맑아도 발을 씻었다.
 
  생의 어두워져 가는 저녁, 선생은 상앗대를 다잡고 마음에 두었던 ‘보물지도’ 하나를 만들고 싶다고 다짐한다.
 
  불과 한 달 전이었다. 선생에게 전화가 왔다. 취재차 지인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혹시나 외로웠거나 말 상대가 없어서일까’
 
  “김 기자,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좀 만나줄 수 없어?”
 
  서울 주변 도심인데도 흙 실은 트럭이 쉴 새 없이 달리는 도로 옆길에서 전화를 받았다. 먼지 사이로 발걸음을 멈췄다. 선생은 늘 그랬다. 불쑥 전화를 걸어와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여서 전화로 말하기 그러니까 바빠도 날 좀 봐” 하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영인문학관이 있는 서울 평창동으로 가려면 높은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차나 택시를 타기도 했고 걸어가기도 했다.
 

  왜 만나자는지 알 수 없으나 혹시나 외로웠거나 말 상대가 없어서일까? 그렇지 않으면 세상 돌아가는 꼴에 체증이 나 속말을 하고 싶어서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싸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박수 소리 같기도 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올려다본 낮은 건물 창문으로 얼핏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변덕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 주는 비 예보가 많았는데 날이 개었다. 말을 걸어오지 않았는데도 건물 앞 녹슨 청동 조형물 곁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를 질러야 해서 늘 목이 쉬어”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 한쪽에 새겨진 이어령 선생의 시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들었다/ 대지를 향해서 나뭇잎은 떨어진다/ 어둡고 거친 흙 속으로 향하는 나뭇잎들을 본다// 거부하지 말라/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대지는 더 무거워진다/ 피가 뜨거워질 때 잘 있거라 잘가라/ 인사말을 잘하고 떠나야 한다’.

 

 

  문득 선생과의 인연이 떠올랐다. 생과 사, 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선생은 기자가 듣지 못했던 전혀 다른 모국어(母國語)로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는 세상에 드문 기호학자였다. 언어라는 상징체계 속에 내재된 문화적 기호를 찾아 그만의 독특한 해석으로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한국인 속에서 인류의 씨앗을 찾고, 그 씨앗 속에서 한국인의 원형(原型)을 길어 올렸다. 그럴 때면 신이 난 듯 목소리가 고음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선생의 고백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목에서 소리가 안 나와 소리를 질러. 그러면 남들은 열정이 있다고 하는데, 아냐. 보통사람처럼 얘기하고 싶지만, 소리가 안 나와. 소리를 질러야 해서 늘 목이 쉬어.”
 
  그럴 때면 선생은 “유리벽 사이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듯한, 절대로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느껴져 답답하다”고 고백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론 선생의 목소리가 커지면 기자는 불안함을 느꼈다.
 
  지난 8월 25일 서울 평창동으로 찾아갔다. 누웠다가 일어난 듯 머리가 흩어져 있었다. 선생은 웃으면 그렇게나 인자해 보이지만 웃지 않으면 날카로워 보였다.
 
  “어디서도 하기 싫은 말인데, 돈 많은 사람 있잖아…. 돈 아까워 어떻게 죽나, 하는 사람들도 죽고 나면 그 돈 누군가가 써. 조바심 안 내도 안 없어져.
 
  권력이 있는 사람, 죽으면 어떻게 돼? 황제가 죽으면 다른 황제가 그 자리를 메워. 그 권력, 안 없어져.
 
  마찬가지로 은행에 넣어둔 돈도 안 없어져. 자기가 안 쓰면 누군가가 대신 써.”
 
  여기서 잠깐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예외가 있어. 머릿속에 있고 마음에 있는 건 다 사라져.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고.
 
  내가 가끔 ‘전복’ 이야기를 하잖아? 해녀들이 전복을 숨겨놓고 ‘내일 좋은 사람이 오면 따다 줘야지’ 해. 전복은 점점 크는데, 이제는 전복에게 갈 수 있는 힘이 없어. 늙어서. 마지막에는 보물지도밖에 못 그려주지. 내가 요즘 하는 이야기들이 바로 보물지도를 그리는 작업이여.
 
  김 기자, 나한테 시간이 없어요. 집에 내 컴퓨터가 일곱 대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이제 아무 소용이 없어. 마지막 남은 게 이거야.”
 
  하더니 몽당연필을 꺼내 들었다.
 
 
  피시스·노모스·세미오시스, 세 가지 틀
 

이어령 선생이 백지 위에 연필을 쥐고 있다.

 

 

  몽당연필로 종이 위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소리를 안 지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일곱 대의 컴퓨터는) 이제 나한테 아무 소용이 없어. 마지막 남는 게 봐, 이거야. 몽당연필이거든. 이 연필로 어렸을 때부터 글을 썼잖아. 연필은 말이야 언제든 깎으면 되잖아.”
 
  그러더니 쓱쓱 종이 위에 삼각형과 원을 그렸다. 사각사각 연필심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어. 피시스(Physis)와 노모스(Nomos), 세미오시스(Semiosis)인데 ‘한국인 이야기’를 이 도구로 정리하고 싶은 거야.”
 
  선생이 몽당연필을 쥐고 웅크린 모습을 보니 마치 카드에 열중한 사람 같아 보였다. 끝까지 움켜쥔 패(牌)가 선생의 기호학이란 생각이 들었다.
 
  연필로 삼각형의 한쪽 끝을 세미오시스라고 적더니 “이건 상징·기호계고…”, 두 번째 꼭짓점에 피시스라고 적고 동그라미를 치더니 “이건 자연계”, 다시 세 번째 꼭짓점을 노모스라고 적고 “법과 제도”라고 했다.
 
  “삼각형으로 표현하지만, 우선순위가 없어. 순수한 상징계도, 순수한 생물계도 없으니 원으로 동그랗게 그려도 돼.
 
  한국인 이야기… 한국인이 뭐야? 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난 조선인이었어. 좀 더 옛날에 태어났다면 신라인, 고구려인이었을 테지. 조선, 고려, 백제는 바로 노모스야. 제도와 법의 영역이지.
 
  그런데 피시스로 가봐. 거기 한국인이 어딨어? 과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36억 년 전 수프 같은 열탕(熱湯)의 바다가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최초의 단세포 생명체가 하나 생겼대. 그게 생겨나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겠지. 이것이 나의 생물학적(피시스) 아이덴티티야.”
 
 
  “한국 신화로 보면 단군의 자손, 곰의 후손이거든”
 

태극이 국가를 상징할 때 ‘노모스(법·제도)’로서 태극기가 된다. 지난 2월 28일 102주년 3·1절을 하루 앞두고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시민들이 대형 태극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기침을 한 뒤 목을 가다듬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과학이 사실이라면 피시스의 나는 한국인이 아니라 그 세포야. 생물학적인 나, 생명이 이 지구에서 최초로 탄생한 그 순간이 바로 나야. 나의 조상이지.
 
  그런데 세미오시스로 가봐. 거기는 신화의 세계야. 기독교 상징으로 보면 아담이지. 중국 신화에서 말하자면 두 마리 뱀이 한 몸으로 꼬여 있는 여와씨(女媧氏)의 후손들이지. 물론 한국 신화로 보면 단군(檀君)의 자손, 곰의 후손이거든.”
 
  몽당연필을 쥐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는 모습이 마치 ‘생각하는 사람(The Thinker)’처럼 보였다.
 
  “태극(太極)에 비유해볼까? 자연계에는 음지와 양지, 다시 말해 빛과 어둠이 있어. 그것을 음양(陰陽)이라 하잖아. 그게 상징계로 오면 태극 무늬가 되지. 음양이 태극 무늬의 아이콘이 되는 거여. 그런데 그것을 구한말(舊韓末) 우리가 국기의 법과 제도로 태극 문양을 사용하는 순간, 노모스의 태극기가 되는 거지.
 


  만약 한국이라는 나라가 없어지고 새 나라가 건국되면 태극기 대신 다른 아이콘이 국기로 제정되겠지.
 
  그러나 기호(상징계)로서의 태극 문양은 없어지지 않아. 중국, 일본 그리고 몽골 깃발에도 태극 마크의 상징적 도형이 남아 있으니까.
 
  이렇게 노모스는 변해도 기호계(말·문자)는 쉽게 변하지 않아. 그런데 태극 도형을 모르는 외국인들에게도 음지와 양지라는 빛과 어둠은 똑같이 작용해. 피시스는 인간이 사라져도, 제도가 없어져도 그대로 남아 있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렇게 자연계상징계-법(제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 어느 한쪽만 인식하며 그것이 우리 현실이라 생각한단 말이지.”
 
 
  닐스 보어와 太極 문양
 

서울 종묘 정전 남문 문설주 아래에 새겨져 있는 삼태극 문양.

 


  선생의 이야기가 태극→태극기→태극 문양으로 사유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덩달아 말도 빨라졌다. 중간에 끼어들 말을 못 찾아 옴짝달싹 못 했다.
 
  “태극 문양에서 양자물리학의 출구를 발견한 사람이 1922년 노벨상을 탄 닐스 보어(Niels Bohr·1885~1962)야. 그는 양자론의 해석을 거의 완성하고도 입증할 방법이 없었어. 1937년 방문한 중국에서 태극 도형을 보고서 ‘바로 저거다!’ 한 거지. 아르키메데스가 외쳤다는 ‘유레카!’처럼.
 
  동그란 원을 직선으로 잘라봐. 원이 반으로 분리되지만 태극은 반원 두 개가 얽혀 있잖아. 그걸 보고서 입자이며 동시에 파장인 세계, 양자의 그 미스터리한 세계를 태극 무늬에서 확인한 거지.”
 
  보어는 과학 분야의 공적이 인정되어 덴마크 귀족원에 입회하게 되었다. 예복에 문장을 달아야 하는데 평민이었던 그에게 가문의 문장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계속된 선생의 말이다.
 
  “궁리 끝에 우리 태극 전사들이 국제경기 나갈 때 달고 다니는 바로 그런 마크를 만들어 붙여. 그러고 근엄하게 라틴어로 ‘콘트라리아 순트 콤프리멘타(Contraria Sunt Complementa)’, 즉 ‘대립은 보완이다’는 문장을 삽입했지.
 
  아인슈타인도 미처 몰랐던 양자의 새로운 이론을 바로 그 태극 문양을 보고 완성했으니 놀랍지 않아?”
 
  기자는 선생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 인류문명사라는 서사적(敍事的) 분위기에 젖어 들었다.
 
  “이 세 가지 틀로 생물학적 자연인으로서 한국인(피시스), 그리고 상징계의 기호적 존재로서 한국인(세미오시스), 그리고 헌법과 법・제도로서 한국인(노모스) 등 세 차원에서 작년에 펴낸 책이 《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야.
 
  저마다 학자들이 ‘한국인론(論)’을 써왔지만 적어도 이 세 영역을 아우르는 복합적 시각에서 쓴 한국인 이야기는 처음이라 자부해요. 우리는 물고기이기도 하고, 최초로 등뼈를 세우고 일어선 척추동물(피시스)이기도 하지. 단군의 후손(세미오시스)이며 대한민국 국민(노모스)이야.
 
  그런데 누구도, 언론 서평조차 이 방법론을 분석하거나 평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난파선에서 S.O.S를 김 기자에게 친 거야.”
 

이어령 선생이 지난해 2월 펴낸 《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탄생 편).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비견되는 책이다.

 

 

  선생은 작년 2월 《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탄생 편)를 펴냈다. 평생을 두고 연구한 ‘한국인 문화 유전자’를 해독한 책이다. 기자는 그 책을 읽고 입이 쩍 벌어졌다. ‘일본인론’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만 해도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만 바라본 책이다. 자연계·상징계 그리고 법·제도의 삼(三)태극적 방법론으로 쓴 글이 아니다.

 
  몇 해 전 선생은 KBS1 TV 〈이어령의 백년서재〉 프로그램 등을 통해 시작한 ‘한국인 이야기’에 혼을 불어넣어 향후 12권의 책을 완성할 계획이었다. 착수하고 얼마 뒤 암 선고를 받고 말았다. 지금까지 겨우 1권을 출간하고 4권은 90%만 마무리한 상태다. 나머지는 손을 놓고 말았다.
 
  “내가 완성하지 못한 걸 내 방법론을 최대한 이용해, 용인지 미꾸라지인지는 몰라도 그 점정(點睛) 역할을 맡아주시오.”
 
  이 말을 하는 선생의 표정에 유배지에서 고단하고 외로운 날을 보냈던 추사(秋史 金正喜·1786~1856)의 얼굴이 오버랩됐다. 〈세한도〉 송백의 결기처럼….
 
 
  꼬부랑 할머니와 생명자본, 바이오 필리아, 코라
 
  선생은 자문자답하듯 “우리 이야기, ‘한국인 이야기’의 원형이 꼬부랑 할머니”라며 이렇게 말했다.
 
  “영화 〈미나리〉를 봐봐. 할머니가 이민 간 이(異)문화 속에서 어린 손주를 살려내잖아. 할머니의 ‘파워’지. 〈미나리〉 할머니가 바로 우리 꼬부랑 할머니야.
 
  어릴 때 할머니한테 들었던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 기억나?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고개를 넘다가 꼬부랑 강아지를 만나…. 끝도 없는 이야기 말이야.
 
  그런데 김 기자, 이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가 실은 요즘 문화인류학자 사이에서 새로운 학설로 등장한 ‘그랜마더 하이포테시스(Grandmother hypothesis·할머니의 힘 가설)’와 통하는 것이었어. 꼬부랑 할머니는 한국인만이 아니라 인류 이야기의 원형이기도 한 거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선생은 이 대목부터 한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류만이 할머니가 있어요. 침팬지에게 할머니라는 존재가 있나요? 인간만이 폐경기가 되어도 존재하는 게 할머니지.
 
  그래서 코끼리를 제외하면 인간만이 유일하게 할머니가 아이 낳고 손주 기르는 걸 도와주는 역할을 해. 엄마는 일상으로 빨리 돌아갈 수 있게 되어 연년생을 둘 수 있게 되었고 인구가 급속히 불어날 수 있었어. 모두 우리 할머니 덕이지. 침팬지는 애미(어미)가 4년간 애를 껴안고 살아야 하니까 생식 주기도 오래 걸려.
 
  그게 바로 늘 내가 이야기하는 ‘생명자본’이고 바이오 필리아야. 젊어서 출산하고 늙으면 애를 받아 산육(産育)을 돕는 할머니의 자랑스러운 생명 파워! 이것이 인간을 오늘의 존재로 진화(進化)시킨 힘이라는 것이지.”
 
  바이오 필리아(Biophilia)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다.
 
  “늙고 병들고 생산도 못 하고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다니는 그 꼬부랑 할머니도 우주의 창조를 낳는 공간, 그 거대한 상징을 가졌던 거야. 그걸 플라톤은 신비한 ‘코라(Chroa·우주의 자궁)’라 불렀어요.
 
  코라는 여자의 자궁인데 텅 비어 있어. 아무 힘도 없어. 그런데 여기에 창조자(남성)의 힘이 접합하는 순간, 엄청난 창조의 힘을 발휘하는 거야.”
 
 
 

 

꼬부랑 할머니가 헤라클래스를 이기는 이유

찰스 재롯이 감독한 〈천일의 앤〉(1969) 포스터. 앤 왕비는 재위 기간이 1000일에 불과하지만, 영국 튜더 왕조의 명맥을 이었다.

 

 

  선생은 등에 이고 있던 보따리를 차근차근 풀듯 말을 이었다. 그러나 목이 쉬어가고 있었다.

 
  “헤라클래스의 몽둥이는 부수고 달리고 죽이는 것은 돼. 그런데 새끼를 못 놔, 이놈은.
 
  죽으면 그만이여. 아무리 영웅적 힘을 가지고 있어도 꼬부랑 할머니가 넘는 고개를 넘을 수가 없거든.”
 
  왜 헤라클래스는 할머니가 넘는 그 고개를 못 넘는 걸까.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자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선생이 말했다.
 
  “왜냐고? 열두 고개는 생명의 고개잖아. 헤라클래스가 아기를 낳을 수 있어요? 죽일 수는 있어도 생명을 낳고 기를 수는 없어. 늙고 꼬부라진 할머니는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손자를 낳고, 손자가 또 손자를 낳는 생명의 열두 고개를 넘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열두 고개’라는 것은 열두 세대, 그러니까 무한 세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찰스 재롯이 감독한 〈천일의 앤(Anne of the Thousand Days)〉(1969)이란 영화가 있잖아. 봤어요? 16세기 영국 튜더 왕조의 국왕인 헨리 8세는 자신의 왕후인 앤 볼린과 결혼하지만 앤은 딸 하나만 낳고 쫓겨나게 됩니다.
 
  불과 1000일밖에 왕비 노릇을 못 했지만 그래도 딸을 낳았어. 그게 엘리자베스 1세지. 권세는 ‘1000일의 앤’이었지만 생식력의 앤은 튜더 왕조의 명맥을 이어간 100년의 앤, 200년의 앤이 된 것이잖어?
 
  그게 노자가 말한 곡신불사(谷神不死·세상이 모두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곳)이고 현빈(玄牝)이야. 여자의 암컷 자궁이라는 것이거든.”
 
  이상하게도 이 대목에서 기자는 박하사탕을 먹은 듯한 통쾌함이 느껴졌다.
 
  “김 기자, 시골 사는 꼬부랑 할머니 입안을 들여다봐요. 이는 다 빠졌는데 혀는 그대로야.
 
  이가 혀를 무는 일은 있어도 혀가 이를 물었다는 얘기 들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부드러운 혀가 강한 이를 이겨요. 노자가 말하는 ‘이유극강(以柔克剛)’과 닿아 있어요.”
 
 
  꼬부랑 똥과 막문화, 막사발, 막말…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를 담은 동화집들. 한국인만이 아니라 인류 이야기의 원형이다.

 

 

  선생이 말하는 인류 역사의 원형이, 그 시작이 꼬부랑 할머니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가 즐겁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옛날 옛적 고리짝 옛말에’와 같은 인류 최초의 할머니인 꼬부랑 할머니는 21세기 이야기 속에서, 그것도 한국에서,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선생의 계속된 말이다.
 
  “꼬부랑 할머니라는 것은 아담과 이브의 미토콘드리아 같은 최초의 할머니야. 그 시원(始原)의 형상이 남아 있는 게 우리의 상징계 속에서는, 딴 동요 다 잊어버려도, 지금도 아이들이 부르는 ‘꼬부랑길 이야기’란 거지.
 
  그런데 그 할머니가 뭘 해? 꼬부랑 똥을 눠. 배설한다고…. 인공지능 로봇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러니까 인조인간을 만든 시조(始祖) 보캉송(Jacques de Vaucanson·1709~1782)이 아무리 사람처럼, 근육이나 호흡까지 닮은 ‘피리 부는 사람’을 만들어도 마지막 배설하는 오리를 만들다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 똥 누는 ‘로봇 오리’는 못 만들어. 생명이 뭐야? 먹고 싸는 거야. AI나 기계는 생명이 없어.
 
  하지만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고 점점 자연에서 멀어지면서 똥이니 욕이니 나쁜 것처럼 여기잖아. 그래도 그 욕이 꼬부랑 할머니의 세계로 들어서면 욕쟁이 할머니가 되고, 금기(禁忌)가 현실공간에서 시민권 대접을 받잖아.
 
  또 막문화로 막사발, 막걸리, 막말…. 정사(正射)에서 벗어난 ‘막이야기’가 우리 토박이 문화에서는 생명력과 독창성을 지니고 있어요. 어쩌면 세계가 열광하는 BTS(방탄소년단)의 몸짓도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막춤의 전통과 관련 있지 않을까.”
 
 
  “꼬부랑 고개를 꼬부랑꼬부랑 넘는데…”
 
  선생은 꼬부랑 할머니의 찬가인 ‘꼬부랑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노래는 끝이 없는 ‘네버 엔딩 스토리’였다.
 
  “많은 버전이 있지만 우리의 상징계의 원형을 이루는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
 
  꼬부랑 할머니와 꼬부랑 지팡이랑,
  꼬부랑 강아지랑, 꼬부랑 토끼랑,
  꼬부랑 다람쥐랑, 꼬부랑 황새랑,
  꼬부랑 나무랑, 꼬부랑 여우랑,
  꼬부랑 칡덩굴이랑 모두 모여
  꼬부랑 노래를 꼬부랑꼬부랑 부르며,
  꼬부랑 춤을 꼬부랑꼬부랑 추고,
  꼬부랑 떡을 꼬부랑꼬부랑
  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바로 이것이 자연계와 상징계와 법·제도의 사회가 오늘까지 이르게 한 핵심적인 키워드가 되는 것이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고 숨을 돌린 뒤 웃으며 말했다.
 
  “아리고 쓰린 고개도 ‘랑’자로 결합하면 ‘아리랑’ ‘쓰리랑’이 되잖아.
 
  꼬부랑 할머니 노래는 뭐든지 갖다 붙이면 되는 거야. ‘꼬부랑 참나무를 만나서, 꼬부랑 다람쥐를 만나서, 꼬부랑 돌멩이를 던졌더니 꼬부랑깽 꼬부랑깽….’ 얼마든지 만들고 쓸 수 있는 ‘코라’의 공간인 거지. 받아들여서 생성할 수 있는 생성론이야. 존재론이 아니고.”
 
  그런데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는 왜 모든 것이 꼬부라져 있을까? 길도 고개도 나무도 심지어 똥도 꼬부라져 있다.
 
  “‘이 세상 살아 있는 모든 게 곡선으로 돼 있다’고 임어당(林語堂·1895~1976)이 말했잖아?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1852~1926)는 ‘직선은 인간에, 곡선은 신(神)에 속해 있다’고 하지 않았겠어? 신이라는 말을 생명의 원천인 자연으로 바꿔놓으면 되는 거여.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보면 인공물은 모두 직선이지만 자연물은 모두가 꼬부라져 있지. 그리고 꼬부랑 고갯길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야. ‘자연=신’이 만든 길이지.”
 
  선생은 20대에서 80대에 이르는 60년 동안 1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어마어마한 저작이다. 그러나 앞으로 간행될 《한국인 이야기》는 선생의 생애 중요한 마침표이자, 후학들에게 새로운 출발점이 되리라.
 
  이제야 그날 오후 선생의 전화가 기자에게 하나의 소명이었음을 알았다. 심호흡을 해보았다. 평창동 선생의 집을 나설 때 마지막 당부의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아시겠어요? 자연·생물계(Physis)-상징·기호계(Semiosis)-법·제도계(Nomos)가 둥그런 원을 그리고 있는 나의 숨겨둔 비밀 병기 P·S·N을 가지고, 내가 쓰다 만 《한국인 이야기》를 완성하세요.”
 
 
  얼어 죽은 ‘성냥팔이 소녀’의 미소
 

안데르센 동화 〈성냥팔이 소녀〉에 나오는 그림이다. 소녀는 북구의 추위와 냉혹한 도시에서 죽었지만 할머니의 환영을 보고 미소지을 수 있었다.

 

 

  선생은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 속에서 꼬부랑 할머니를 찾았다.

 
  “그 《한국인 이야기》 속에는 추운 겨울, 길바닥에서 얼어 죽은 ‘성냥팔이 소녀’가 따뜻하고 평화로운 가족의 환상으로 보았던 서양의 꼬부랑 할머니도 존재하지요.
 
  오래전에 읽었던 〈성냥팔이 소녀〉 기억나나요? 팔리지 않는 성냥을 벽에 긋고 그 빛으로 환상과 따뜻한 사랑을 느꼈던 소녀는 이튿날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어요. 그런데 얼어 죽은 소녀 입술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어요.
 
  자연계(피시스) 속에서는 얼어 죽은 성냥팔이 소녀였지만, (성냥은 당시 산업주의의 첨단기술의 상징이었지요.) 몸이 식어가던 소녀가 마지막에 본 것은 뭣이었나요?
 
  어머니도, 더더구나 폭력적인 아버지도 아니었지. 할머니의 얼굴과 그 품이었어요. 자연계 속에서 소녀는 분명 동사했지만, 할머니의 환상·상징계 이야기 속에서는 행복한 미소가 되었어요. 꼬부랑 할머니는 동서 가릴 것 없이 현대에 살아 있어요. 가혹한 북구라파의 겨울바람(피시스)과 냉혹한 도시(노모스) 속에서도 말입니다.
 
  이 ‘미소’를 남기고 싶어요. 절망하다가도 《한국인 이야기》를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생각도 그 때문이지요. 그리고 정말 ‘전복’이 있는지 몰라도 내가 이미 그려놓은 글의 ‘보물지도’를 따라 모험 길에 오르세요. 그리고 그 ‘전복’과 ‘보물’이 없더라도 밑질 게 없어요. 이미 대중가요가 된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동력과 상징의 힘
 
  “꼬부랑 할머니 속에서 창출되는 우리 이야기는 법·제도가 만들어낸 역사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힘이 될 수 있어요. 나는 확신합니다. 단순한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소녀의 운명을 바꿔놓을 생명의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단단한 자연계와 제도화한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순환관계를 지니고 있는 상징의 힘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의 단순한 동화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무한 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섭씨 1도가 모자라 끓지 못하고 있는 내 라면 그릇…, 힘이 없어 끝내지 못한 《한국인 이야기》에 성냥불 한 개비의 에너지를 보태주면 되는 거지요.”
 
  기자는 자신도 모르게 “해보겠다”고 답했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기꺼이 동행자가 되어줄 젊은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월간조선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조선일보 2021,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