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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끌’ 투자로 큰돈 벌겠다고?… 시각장애인·BBH 시니어 애널리스트

해암도 2021. 8. 14. 08:34

‘영끌’ 투자로 큰돈 벌겠다고?… 일단 ‘이 명단’부터 읽어 보시라


[신순규의 월가에서 온 편지]
‘올인’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
천운 아닌 냉정한 ‘기업 분석’

 

아무래도 증권 분석은 내 천직인가 보다. 기업 분석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기업을 통해 사회 움직임을 보고, 인간의 창의력에 감탄하며, 야망이 가져다주는 큰 성공 그리고 더 큰 실패를 목격한다. 투자 이윤과 월급은 이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혜택일 뿐. 그런데 요즘 투자에 ‘올인’하는 많은 이들은 너무 큰 희망을 거는 것 같다. ‘영끌’ 투자? 적어도 나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러스트=유현호

 

 

46년 전, 고작 여덟 살의 나는 ‘앞을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나의 실명(失明)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의사는 그해 봄에 했던 망막박리 수술이 실패하자, 더 이상 실명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확신했다.

 

점자와 독립 훈련을 포함한 특수 교육에 관한 의사의 조언에 부모님은 일말의 희망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가슴이 꽉 막히는 듯했다. 불과 며칠 뒤 나는 앞을 볼 수 없게 된다. 얼마나 답답할까? 뛰어놀기는커녕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 전부 볼 수 없게 된다. 정말, 얼마나 답답할까?

 

꽤 오랫동안 실의에 빠졌다. 점자로 인쇄된 책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독서를 실컷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자를 읽는 속도가 아무리 빨라봤자 눈으로 읽는 것보다 느렸다. 읽는 것만으로는 지식과 공감의 세계에 넘기 힘든 장벽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시각장애인들이 다닐 수 있는 고등학교는 대부분 실업 고등학교였기 때문에 대학을 갈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낮았다. 배움의 기회마저 나에겐 한계가 명확했다.

 

그러던 중 공부와 상관없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세상을 보는 나의 시야도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주식 투자였다.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자료 중 ‘주가 데이터’라는 것이 있다. 매일 몇 개의 데이터 파일을 다운로드했고 점자 정보 단말기를 통해 읽었다. 특히 관심 있게 본 자료는 ‘52주 최저 주가 리스트’였다. 지난 1년간 주가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회사들을 나열한 명단이었다.

 

‘아, 바로 이거구나.’ 나는 투자 아이디어를 찾기 시작했다. 주가가 이렇게 최저치를 기록한 이유가 뭘까? 기업에 어떤 문제가 있나? 같은 분야의 회사들이 다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가. 경영진의 실수로 돈을 많이 잃은 건 아닐까? 이런 질문들을 하면서 투자할 만한 기업을 찾았다. 결국 나의 진로는 증권 애널리스트로 바뀌었다.

 

세상에는 희한한 일을 하는 기업들이 많다. 큰 제약회사의 임상 연구 일을 대행해주는 회사, 의사나 간호사 등 의료 인력을 제공하는 회사도 있다. 여성 건강에만 초점을 두는 제약회사도 있고, 대마초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하는 약을 개발하여 판매하는 회사도 있다. 코카콜라와 같은 음료를 병이나 캔에 담는 일만 따로 하는 회사들도 있고, 도리토스 같은 과자 맛이나 다양한 향을 개발해 상품 회사에 제공하는 기업도 있다.

 

나는 기업 분석이라는 프리즘으로 세상을 본다. 이 프리즘만 있으면 세상의 여러 빛깔을 다 볼 수 있다. 소비자의 욕구 변화도 알게 된다. 시각장애인으로서 느끼는 답답함도 풀고 일의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다 가끔은 놓치면 안 되는 투자의 기회도 얻는다. 정말 아주 가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자금만 있다면 큰돈을 벌 수 있을 테지’. 많은 이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증권 계좌를 열자마자 가장 인기 있는 증권을 매입한다. 그리고 매일, 아니 매시간 주가를 체크하면서 다음 거래를 고민한다.

 

나도 그렇게 투자를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엔 그랬다. 아주 위험한 옵션 트레이딩(주식 매매 권리인 옵션을 단기간에 사고팔아 수익을 내는 방법)도 한 적이 있다. 나에겐 꼭 운이 따를 거란 생각을 하면서.

 

미국 월가의 회사들은 하나의 투자자에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분기마다 전체적인 동향을 보고 결정을 내린다. 마침 내가 2년 넘게 관심 갖고 있던 T 회사가 그들의 지난 2/4분기 실적을 발표했다.

 

T사도 무척 독특한 회사다. 의료보험 회사도 아니고, 헬스클럽을 소유하거나 운영하지도 않는다. 대신 의료보험 회사로부터 돈을 받아, 보험 고객에게 무료 헬스클럽 멤버십을 제공한다.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면 의료 비용이 적게 들 것이므로, 보험회사들은 기꺼이 T사의 고객이 되기를 자처한다. 흔히 말하는 캐시카우(cash cow, 현금원)다.

 

실망스러운 일도 있었다. T사는 2019년 초 큰 빚을 떠안으면서까지 다이어트 식품 회사를 매입했다. 이 합병은 예상과 달리 훨씬 저조한 결과를 가져왔고 주가는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다. 합병을 추구한 경영진은 거의 해고됐고 주가는 바닥을 쳤다. 게다가 2020년 3월부터는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헬스클럽들이 문을 다 닫지 않았나. T사의 주가는 10분의 1 토막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모든 시련에는 반전이 있는 법. 새로 고용된 경영진이 다이어트 회사를 매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캐시카우에 집중하기로 했다. 8월 초 발표된 실적에 따르면 그들의 캐시카우는 다시 성장을 시작했다. 이제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다. 긴장과 기쁨의 반복, 이런 것이 투자에서 얻는 즐거움이다. T사의 스토리에서 꾸준히,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갖고 투자하라는 교훈을 다시 한번 얻는다.

 

 

신순규 시각장애인·BBH 시니어 애널리스트     조선일보    입력 2021.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