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8학군에서 ‘최신식’ 교육을 받았다. 불법학원도 마다 않을 정도로 자식 교육에 극성이었던 엄마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모범생이었다. 서울대 졸업 후 아빠 뜻대로 미국 유학도 떠났었다. 신문기자 생활을 한 지 4년, 출산 후 직장을 그만뒀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딸을 키우면서 석·박사(워싱턴대학교 교육심리학) 학위도 받았다. 교수 꿈도 꿨지만, 일찌감치 포기했다. 교수가 돼도 하고 싶은 공부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어서다. 지금은 미국 시골의 가정주부 7년차. 한 달 약 100만원으로 남편, 두 딸과 그럭저럭 산다.
40살 남편의 돌발 은퇴 선언…“시골서 살까” 현실로
미국 시골 집에서 박혜윤씨. 사진 박혜윤씨 제공
“이 정도면 평범하게 사는 거 아닌가요?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사는 것도 아니고.”
지난 9일 화상으로 만난 『숲속의 자본주의자』 저자 박혜윤(45) 씨는 “나보고 성격 이상하다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이렇게 항변했다. “규범이란 건 다 따랐다. 평균 나이에 결혼하고 애 둘 낳고, 공부하라는 거 다 하고 일탈도 안 했다”면서다. 그렇다고 인생이 그렇게 즐겁진 않단다. “고통스러운 일이 별로 없는 것일 뿐”이라는 그는 “인생이 너무 즐거우면 피곤하지 않나. 지금 딱 좋다”고 했다.
사실 처음부터 작정한 삶은 아니었다. 8년 전, 남편이 서울에서 12년간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겠다며 40살에 은퇴를 선언하기 전까지는.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남편이 퇴근은 늦고, 주말 근무까지 하니 화가 나서” 아이와 함께 미국으로 떠난 지 7년째였다. 1년의 휴직 기간을 제외하고, 방학 때 들른 한국에서 생긴 둘째를 키우며 만 5년간 성실하게 채운 기러기 생활을 이렇게 끝낼 줄은 박 씨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 신혼 때부터 남편에게 입버릇처럼 “시골 가서 살까” 말하곤 했지만, 명품 좋아하고 ‘뽀대’를 중시했던 ‘서울러’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은퇴를 선언한 그 날 밤, 박 씨는 밤을 꼬박 새워 5~6시간 통화하며 ‘회사 때려치우지 말라’고 설득했다. “남편이 돈을 벌면, 나는 애 키우면서 내가 좋아하는 걸 하기로 이미 인생을 세팅해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남편은 소속감이 굉장히 필요한 사람”이라는 게 그 이유다. “아니나다를까, (백수 생활에) 살아가질 못하던” 남편은 시행착오 끝에 기고가이자 번역가로, 동네 수영장 수상안전 요원 아르바이트로 돈벌이하면서, 남편이자 아빠라는 본업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 사실 남편은 “교수 안 한다”는 아내의 선언에도 “박사 학위 따면 마음이 달라지겠지” 생각했다고.
“필요한 만큼 벌어보자는 ‘실험’”
1. 지천에 블랙베리라 여름마다 열심히 따고 얼려 반 년간 아침마다 온 가족이 한 줌씩 먹는다.올해는 이곳답지 않게 유난히 더워 평소보다 빨리 익고 맛도 진하다. 2. 지인이 돼지감자 모종을 주어 놀고 있는 앞뜰에 심었다.아이들이 심고, 감독만 했다. 사진 박혜윤씨 제공
‘완전체’가 된 박 씨 가족은 귀촌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2015년 미국 시애틀에서 한 시간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에 터를 잡았다. 유학 시절 친구 따라 열심히 부동산 구경을 다닌 덕에 한국보단 미국 부동산이 더 친숙했다. 강북 아파트를 판 돈은 알링턴의 2만5000평(8만2644㎡) 땅을 사고도 남았다. 땅의 절반이 숲이고 개울도 있다. 100년 된 30평 조립식 집도 손을 보니 썩 괜찮은 보금자리가 됐다. 상하수도는 안 들어오지만, 전기는 들어오니 훌륭한 시골이다. 총기나 마약 문제도 없고 순박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고정수입 없이 아이 키우기 불안하지 않나.
“돈을 아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필요한 생활비만큼 버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실험’이다. 간장, 된장은 직접 담그고 빵을 굽고 잼도 만들어 먹는다. 필요한 물건은 중고로 산다. 돈 쓸 일이 점점 줄었다. 그런데 100만원에선 안 줄더라.”
시골에서 불편한 건.
“전혀 없다. 서울대든, 신문기자든, 박사든 한 집단에 들어가면 또 그 안에서 서열이 정해진다. 밑바닥에 겨우 들러붙는 것도 힘들고, 안에선 인정 못 받으면서 밖에선 잘난 체하는 건 재수 없다. 시골은 서열이 없다. 누구는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말을 키우고 모두 제멋대로 산다. 남과 비교 자체가 안 된다. 미국은 빈부 격차가 너무 커서 그런지 (내 주변에) 부자는 보이질 않는다. 질투할 일도 없다.”
생활비는 어디에 쓰나.
“코로나 전에는 통신비가 90달러(약 10만원)이었다. (가족 4명이 휴대전화 2대를 함께 쓴다) 코로나 때문에 핫스팟(인터넷)을 샀더니 140달러가 됐다. 먹는 게 400달러. 기름값과 차, 보험비가 100~150달러. 우물을 쓰니까 상하수도비는 없고 공과금은 전기뿐이다. 여름엔 20달러, 겨울엔 100달러. 애들은 국가의료보험이 있고, 우리 부부는 보험이 따로 없다. 애들한테 남겨줄 건 생각하지 않는다. 20살까지는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이에게 남겨줄 건 살아갈 수 있는 힘”
1. 단팥빵 만들기. 팥을 삶아서 설탕과 소금을 넣고 갈아준다.?통밀가루로 반죽을 만들어 아이들과 빚은 다음 쪘다.?어설픈 대로 맛있다. 2. 큰 아이는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뜨개실을 사서 인형을 만들고,?벼룩시장이나 온라인에서 판다.?조금씩 솜씨가 늘어간다.?만들고 싶어서 만든 것을 누군가 돈을 주고 사는 기쁨은 무척 크다. 사진 박혜윤씨 제공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뭔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그걸 하려면 부모에게 어떤 도움을 요청할지 알아야 한다. 그 도움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가 대학을 갈지, 어떤 직업을 가질지는 전적으로 알아서 하는 거다. 애들은 너무 즐거워한다. 부모가 요구하는 게 없으니까. 청소, 빨래 등 자기가 벌인 일만 정리하면 된다. 그 외엔 인형 만들고, 보고 싶은 책 보고, 원하는 대로 산다.”
부모는 이 삶을 ‘선택’ 했지만, 아이들에게는 ‘강요’일 수도 있지 않나.
“애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우리 엄마 너무 좋은데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고. 애들은 엄마처럼 사는 게 꿈이라고 한다. 큰딸 하는 말이 ‘피곤하지 않게 사는 어른은 엄마밖에 못 봤다. 나도 엄마처럼 불량하게, 피곤하지 않은 인생을 살고 싶다’고 한다.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한다. ‘그게 그렇게 쉬운 줄 아냐’고.”
“지금까지 뭔가를 원해본 적이 없었다”는 박 씨도 최근엔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코로나 끝나면 집 다 팔고 세계여행을 해볼까 생각 중”이란다. “원래 여행을 참 싫어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하지 마라니까 더 하고 싶어졌다”면서다. 물론 이 꿈도 코로나19가 끝나면 다시 식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국 시골에 살면서 교육 상담해주는 책방을 해볼까도 싶다”는 그는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한 번쯤 ‘실험’해보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1.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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