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따라기
비가림 하우스에서 2~3m로 자란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토마토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박종근 기자
올바른 농사를 종교로 섬기는 성전 같았다. 신앙의 실천은 안전하고 영양이 충실하며 맛도 좋은, 식품으로서 농산물 생산일 터이다. 농장에 두 차례 찾아가 구석구석 돌아보고 점심 신세까지 지면서 든 생각이다. 경기도 포천시 북쪽 끝, 휴전선에서 직선거리로 약 24㎞ 남쪽에 자리 잡은 평화나무농장. 그 이름에는 평화가 나무처럼 자라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
포천 평화나무농장
유럽서 인정하는 가장 앞선 유기농
생명역동농업 실천·교육하는 농장
토마토는 완전히 익은 것만 수확
부산물 퇴비로 활용하는 순환농법
작물 50~60가지 키워 가공 판매
26가지 재료 혼합 통곡물 선식도
농장은 요즘 토마토의 계절이다. 7월 말부터 두 달쯤 계속된다. 농장주의 농사철학에 따라 토마토는 완전히 익은 것만 수확한다. 완숙 토마토가 좋기는 하지만, 시장 진출이 거의 불가능하다. 크기별로 분류해야 출하를 하는데, 익으면 과피가 얇아지는 토마토는 분류기를 굴러가다 터져 버린다. 그래서 밭에서 따는 즉시 주스(7~8월)와 소스(9월)로 만들어 판다. 품질 좋다는 사실이 알려져 제품은 해마다 품귀를 겪는다.
남미 안데스 고원지대에서 유럽에 전해진 토마토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400년이 넘었다. 1614년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나오는 ‘남만시(南蠻枾)’가 그 첫 기록이다. 남쪽 오랑캐 땅에서 온 감이라는 뜻이다. 우리말 이름은 사전에 ‘일년감’이라고 올라 있지만,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 풀이를 읽어도 토마토를 연상하기는 쉽지 않다. 오랫동안 한국사람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과채였다는 방증일 것이다.
토마토 빨개질수록 항산화 물질 증가
원혜덕 선생(오른쪽)과 아들 김진평씨가 오전에 수확한 완숙 토마토에서 꼭지와 흠집을 제거하고 있다. 박종근 기자
최근에는 토마토가 들어가는 서양음식이 우리 식탁에도 많이 오르고, 2002년 미국 타임(TIME)지가 10대 수퍼푸드의 하나로 꼽기도 하면서 건강식품으로 알려져 ‘여름 보양식’ 대접을 받고 있다. 빨갛게 익은 토마토에 많은 항산화물질 라이코펜(lycopene) 성분 덕분이다. 토마토가 빨개질수록 라이코펜이 증가했다는 표시고, 그럴수록 몸에 더 좋다는 것을 색으로 알려주는 신호다.
라이코펜은 활성산소를 배출시켜 세포 노화를 늦추고, 전립선암·유방암·소화기암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다른 유효성분들도 아주 풍부하다. 유럽에서는 한때 정력제로 여긴 적이 있고, ‘토마토가 빨갛게 익으면 의사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는 속담도 있다.
토마토 수확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봄에 다녀온 농장에 지난달 26일 다시 갔다. 더위가 기승을 부려 온도계는 36도를 표시하고 있었다. 고온 건조 호광성(好光性) 식물인 토마토는 한여름이 제철이라 좋은 토마토를 먹으려면 생산자는 더위와 햇볕을 피할 길이 없다.
1시간 동안 100℃ 이상으로 끓인 토마토 주스를 1L 병에 담고 있다. 박종근 기자
연중 50~60가지 작물을 재배하는 농장에 도착해 먼저 토마토 밭으로 갔다. 가로 23m, 세로 51m, 1173㎡(355평) 넓이에 지붕 높이 6~8m의 비가림 하우스 안에는 토마토가 2~3m 줄기에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줄지어 자라고 있다. 봄에 갔을 때 골조공사가 막 끝났던 하우스는 월동 보온용이 아니라 토마토가 싫어하는 비를 가려 주는 시설이다. 이런 대형 하우스가 2동이다.
맛을 보려고 잘 익은 토마토 하나를 잡았다. 물렁하다. 따서 그대로 베어 물었다. 유기농 인증 제재나 비료도 쓰지 않고 농장에서 만든 자연 거름만 써서 키운 열매라 먼지만 닦고 그냥 먹어도 된다. 토마토 특유의 향이 물씬하다. 즙이 흥건하고 자연스러운 단맛이 돌면서 입은 편안하다. 바탕이 평화로운 맛이다. 하우스 안 기온은 40도가 훨씬 넘는 듯했다. 잠시 둘러보고 사진 몇 컷 찍는 동안 윗도리가 땀에 흥건하게 젖었다.
토마토 주스를 만드는 과정은 단순하다. 따자마자 흐르는 물에 씻고 꼭지와 흠집을 제거해 통째로 분쇄한다. 토마토 1㎏에 한 개를 더 갈면 100% 원물 주스 1L가 되고, 일곱 상자를 손질해 갈면 180L 한 솥이 나온다. 물 한 방울도 첨가하지 않은 원액은 자루가 긴 나무 주걱으로 저어 주며 1시간 동안 100도 이상으로 끓인다.
가열해야 멸균도 되고 핵심 유효성분인 라이코펜이 활성화된다. 그 다음 병에 담고 열탕소독해 완전 멸균 상태로 진공 밀봉한다. 병을 식혀 상표를 붙이면 완제품이 된다. 가공 과정만 3시간이 걸린다. 한 솥을 끓이면 1L들이 160병쯤 나온다. 많을 때는 하루 1000병, 냉방장치가 없는 실내에서 대여섯 솥을 순차적으로 작업한다. 완제품은 냉장고에 넣지 않고 상온에서 보존기한이 1년이다. 뚜껑을 열지 않으면 그보다 오래 둬도 문제는 없다.
농장에서 갓 딴 완숙 토마토와 주스 완제품. 박종근 기자
평화나무농장은 생산~가공~판매 사이클이 농장에서 완결되는 생명체 같은 구조를 갖췄다. 농산물을 수확하고 남은 부산물은 퇴비로 쓰거나 소에게 먹여 새로운 거름이 되게 해 땅으로 돌려보내는 순환농업이 생산 사이클이다. 소비 사이클은 농산물은 날것으로 팔지 않고 가공해서 판매하는 것이다. SNS 회원들이 주문하고 택배로 보낸다. 재고로 남는 게 없을 만큼 잘 팔린다.
제품은 1년 주기로 만드는 순서가 있다. ▶1~2월 통밀빵(치아바타) ▶3월 통곡물 선식 ▶4~5월 산양유 요구르트 ▶6월 케일발효액 ▶7월 양파, 루바브잼 ▶7~8월 토마토 주스 ▶9월 토마토 소스 ▶10~11월 잡곡(귀리·보리 등) ▶11월 들기름 ▶12월 햄·소시지, 현미 가래떡 등이다. 이 가운데 선식과 요구르트는 연중 수시로 생산한다.
농장에서 수확한 8가지 곡물과 14가지 푸새 등 26가지 재료를 넣은 통곡물 선식. 박종근 기자
농장에서 수확한 8가지 곡물과 14가지 푸새 등 26가지 재료를 넣은 통곡물 선식. 박종근 기자
선식(禪食)은 재료와 만드는 과정을 알면 보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기분이 든다. 농장 안주인은 “선식을 먹으면 우리 농장 생산물을 다 먹는 것과 같다”고 했다. 농장에서 자란 곡물 8가지, 무게 기준 23%에 해당하는 남새와 푸새 14가지가 들어간다. 밖에서 들여온 미역, 다시마, 유기농 설탕, 천일염도 넣어 재료가 모두 26가지다. 곡물은 현미, 가바 찰현미, 약콩(쥐눈이콩), 흰콩, 통밀(또는 호밀), 보리, 찰수수, 귀리다.
풀무원농장 설립자 원경선 선생의 사위
평화나무농장 김준권 대표가 커다란 솥에서 끓고 있는 토마토 주스를 주걱으로 저어주고 있다. 박종근 기자
깨끗이 일어 24시간 불리고 시루에 찐 다음 건조기에 말려서 제분한다. 볶으면 쉽지만,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훨씬 더 걸리는데도 찌는 이유는 통곡물 껍질에 많은 영양분 파괴를 줄이고 소화가 잘되게 하려는 정성이다. 남새로는 브로콜리, 케일, 양파, 당근과 당근 잎, 양배추, 시금치, 무와 무청, 맷돌호박, 밤호박, 농장 주변에 저절로 자라 채취한 푸새는 뽕잎, 쑥, 오가피, 엉겅퀴, 컴프리가 들어간다. 곡물과 채소는 유럽에서 유기농업의 최고라고 알아주는 생명역동농업(Bio-Dynamic Agriculture) 원리에 맞춰 길렀다.
김준권(73)·원혜덕(65) 선생 부부가 일구는 평화나무농장은 독일에서 시작한 생명역동농업의 한국 원점이다. 김 선생은 ‘한국 유기농업의 아버지’이자 광복 70년에 정부가 선정한 ‘한국 농업의 별’ 13인 중 한 분인 풀무원농장 설립자 원경선(1914~2013) 선생의 수제자 겸 넷째 사위다. 1970년대 초부터 풀무원농장 일을 도맡아 살피다가 2001년 지금의 농장으로 독립해 가장 앞선 유기농업인 생명역동농업을 실천·교육하고 있다.
나이보다 훨씬 정정해 보이는 김 선생은, 우주와 별자리 운행의 기운을 받게 작물을 키우고 그걸 먹는 사람에게도 전한다는 이 농법의 효험을 자신의 몸으로 설명했다. “내가 일흔네 살인데 하루 10시간씩 농사일을 한다. 병원에 가 본 일도 없다. 해산물 빼고 식탁에 오르는 것은 모두 직접 키운다. 여기서 난 것만 먹고 이토록 건강하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생명역동농업 농산물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직 신문기자. 기자 시절 먹고 마시고 여행하기를 본업 다음으로 열심히 했다. 2018년 처음 무소속이 돼 자연으로 가는 자유인을 꿈꾸는 자칭 ‘자자처사(自自處士)’로 살고 있다.
[중앙선데이] 중앙일보 입력 2021.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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