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말 AT&T 개발책임 맡아 컴퓨터 시장진입 허가받아 착수…
2년만에 완성한건 느려터져 실패 연구원들에 일 배분…
불만 일자 "무얼 어떻게 도와줄까" 물으며 소통에 주력… 다시 신뢰 얻어,
설계 마친후 공장에 가져가자 "너무 복잡" 작업 거부당해…
매일 찾아가 청소하며 다가가
1970년대 말, 미국 최대의 통신 회사 AT&T는 32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사활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막중한 임무를 책임진 AT&T 벨연구소(Bell Lab)의 개발 담당자였다.
미국 전역의 통신망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 손톱만큼 작은 칩에 운명을 걸게 된 건, 정부와 벌이던 소송전(訴訟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 법무부는 AT&T가 독점한 시장을 해체하려고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길고 긴 싸움 끝에 AT&T는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단 회사를 분할해 독점권을 포기하는 대신, 컴퓨터 산업이라는 새로운 시장 진입을 허가받는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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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모 총장이 32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하던 무렵인 1980년대 벨연구소 연구실에서 찍은 사진. /KAIST 제공
신대륙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비장의 무기가 필요했다. 8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만 가지고 있던 AT&T가 16비트를 건너뛴 채 32비트 개발로 직행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단계를 뛰어넘는다는 건 그만큼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본격 개발에 착수한 지 2년 만에 'Bellmac-80'이라는 32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완성했지만, 시장에 내놓을 수 없는 실패작이었다. 정보 처리 기능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작동 속도가 예상을 밑도는 '느림보' 칩이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크기로 불어난 압박감이 모든 연구원을 짓누르는 상황에서 두 번째 개발이 진행됐다. 문제는 선(線)이었다. 회로 속 소자들을 연결하는 선이 필요 이상으로 길거나 배치를 잘못해서 속도가 지연되고 통신에 잡음이 생긴 것이었다. 나는 손톱만 한 마이크로프로세서 회로망을 가로와 세로가 6.6m나 되는 모형으로 확대했다. 연구원들은 실제 회로를 똑같이 옮겨놓은 판 위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 회로의 연결 지점을 색연필로 그어가며 일일이 확인했다. 오류가 발견되지 않을 때까지 선을 잇고 또 이어야 하는 엄청난 분량의 수작업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시간이었다. AT&T가 계획한 시점에 시장에 진입하려면 1~2년 안에 개발을 끝내야 하는데, 오히려 작업은 갈수록 늦어졌다. 마무리하지 않고 지나간 일이 쌓이고 쌓여, 전체 개발 일정을 몇 달씩 지연시켰다. 그날 할 일은 그날에 끝낼 수 있도록 계획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나는 매일 새벽 3시에 출근해 연구원들이 하루에 해야 하는 일을 일일이 배분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배분한 업무 내용이나 분량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우리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를 마음을 다해 설득했다. 힘에 부쳐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토로하는 사람이 생기면 옆자리에 팔을 걷어붙이고 앉아 작업을 도왔다. 불만이 생기면 제압하기보다는 경청하는 것이 내가 터득한 문제 해결법이었다. 당시에 가장 많이 했던 말은 "그래서 내가 당신을 위해 무얼 도와주면 될까?"였다. 개발 과정을 세밀한 부분까지 꿰뚫고 있었기에 누가 어떤 문제를 제기하든 앞장서 도와줄 수 있었고, 팀원 각자의 개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소통 과정에서 동료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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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모 총장이 미 일리노이대 교수로 있던 2000년 9월 15일 ‘반도체 칩의 아버지’라는 잭 킬비(Kilby) 박사와 찍은 사진. 킬비 박사는 1958년 텍사스인스트루먼트사에서 세계 최초 반도체 집적회로를 개발했으며, 이 사진을 찍고 한 달쯤 뒤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뽑혔다. /KAIST 제공
1981년 32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 개발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런데 안도와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또다시 일이 터졌다. 이번에는 칩을 양산해야 하는 생산 공장에서 설계가 너무 복잡하다는 이유로 작업을 거부한 것이다. 나는 즉시 공장으로 달려갔지만 "연구소에서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산 사람들이 진짜 생산 업무가 어떤 것인지 알기나 하느냐?"는 말과 함께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날 이후, 차로 두 시간 떨어진 공장을 매일같이 찾아가 청소를 했다. 누군가 나를 밀어내려고 할 때, 맞부딪쳐 대립하기보다는 밀어내는 그 힘을 온전히 받아줄 때 더 빨리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연구소에서부터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사람들은 나를 '캡틴 스무스(Captain Smooth·부드러운 선장)'란 별명으로 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벨연구소는 CMOS 기술로 개발한 32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세계 최초로 시장에 내놓았다.
나는 때로 손톱만 한 칩 속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본다. 서로 다른 기능과 목적을 가진 소자들은 선(線)을 통해 정확히 연결됐을 때만 제 기능을 발휘한다. 마찬가지로 한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서로 다른 능력과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과 마음으로 소통해야 한다. 회로에 들어가는 선이 너무 길거나 가깝게 배치되면 잡음이 발생한다. 사람의 소통도 단계가 길어지거나 필요 이상으로 밀접해지면 마찬가지로 잡음이 발생한다. 선의 배치와 길이를 조절하는 것이 기술 개발자가 할 일이라면, 사람 사이의 소통을 조율하는 일은 조직의 리더가 맡아야 하는 업무다.
나는 벨연구소에서 기술 개발자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얻었다. '캡틴 스무스'의 방식은 나중에 교수로서 학생을 지도하는 일에도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주었다. 이제 KAIST 총장이 되어 대학 구성원을 돌보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앞으로 하게 될 수많은 일에도 변함없이 적용될 것이다.
☞강성모 총장은
반도체 칩 설계 세계적 석학… 한국인으론 첫 美 4년제 대학 총장 올라
강성모(姜城模·68) KAIST 총장은 반도체 칩 설계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자 한국인 최초로 미국 4년제 대학 총장에 오른 인물이다. 2007년부터 4년간 머시드(Merced) 캘리포니아대(UC) 총장을 지내고, 올 2월 KAIST 15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강 총장은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조국에 봉사할 기회를 기다려왔다"고 말했다. 조부(祖父)는 상해 임시정부 시절 김구 선생을 도와 러시아와 중국을 누비며 독립 자금 모금 등을 맡았던 강대현 선생이다.
강 총장은 연세대 전기전자공학과 4학년 때 200달러만 들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온갖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며 공부한 끝에 UC 버클리에서 전기전자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AT&T 벨연구소를 거쳐, 일리노이대 전기전산학과 학과장, UC 산타크루스 공대 학장을 지내며 학교 행정 분야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공교롭게도 UC 머시드와 KAIST는 강 총장 취임 당시 모두 학내 갈등이 심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강 총장은 UC 머시드에서 "학교 구성원과 직접 대화하며 의견을 듣겠다"고 총장실을 개방해 분쟁을 조율하고 학교를 안정시켰다. KAIST에서도 강 총장은 아침 일찍 부인과 교정의 커피숍과 도서관을 돌며 학생들 얘기를 듣는 등 특유의 부드러운 리더십을 선보이고 있다. 현재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창조경제분과 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