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윤택 연출가는 지현준에 대해 “거칠어 보이지만 섬세하다. 격이 있고 지적인 배우”라고 했다. 지현준은 12월엔 연극 ‘스테디 레인’에 출연한다. 보컬 트레이닝을 꾸준히 받는 등 뮤지컬 무대도 욕심 내고 있다. “3년쯤 뒤엔 뮤지컬 주인공도 하고 싶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스물다섯 청년 백수 지현준은 PC방을 전전했다. 앞날은 깜깜했고, 딱히 뭘 해야할지 막막했다.
그러다 ‘배우하면 재미있겠다’란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연기하면 정년 퇴임 없이 늙어서까지 멋지잖아’라고 생각했다. 군 시절 “연극하면 그래도 이윤택이지”라고 했던 고참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인터넷으로 이윤택을 검색하곤 극단으로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워크숍 오세요.”
“저 연기 경험 전혀 없는데요.”
“상관 없어요. 그냥 오세요.”
그는 그 길로 연희단거리패가 있는 경남 밀양연극촌으로 내려갔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무모한 연극 입문, 하지만 배우 지현준(35)은 그렇게 10년을 버텼다.
그리고 올해 한태숙 연출의 ‘단테의 신곡’ 주인공을 꿰찼다. 국립극장 기획공연으로 하반기 최고 기대작이다. 박정자·정동환씨 등과 함께한다. 작품도 연출도 연기자도 모두 거물이다. 부담되지 않냐고 물었더니 왈, “저 첫 연극부터 주인공 했어요.”
그는 밀양연극촌에서 먹고 자고 살았다. 그렇게 연극을 배웠다. 청소·빨래, 그리고 가끔 대사 연습. 두 달 만에 ‘갈매기’의 트레블레프 역을 맡았다. 곧이어 ‘햄릿’까지. “이유 모르죠, 그냥 하래서 했어요.”
막상 연습 때는 혼돈스러웠다. 연기만 하면 연출가 이윤택씨가 깔깔 웃었다. “너 엄마한테 기대서 살았지, 네 성격 이렇지, 욱하면 이러지…” 등등. “아니 귀신이에요. 연기 한번 했을 뿐인데 저를 기가 막히게 알아 맞춰요. 소름 끼쳤죠.”
이런 말도 했다. “열심히 혼자 해보고 연습실 가면 이래요, 꾸미지 말라고. ‘그 연기 안 되는 건, 네가 그렇게 살아서야’라고. 맨날 발가벗은 느낌, 보여주기 싫은 걸 몽땅 들킨 기분, 괴로움에 위경련까지 생겼어요.”
그렇게 3년을 밀양에서 지냈다. 그리고 서울로 왔다. 춤을 배우고 싶었다. “말이 되니 몸을 쓰고 싶은 거죠. 여기까지 움직이면 훨씬 멋질 텐데….” 트러스트 무용단을 찾았다. 또 거기서 합숙했다. “다리 찢는 거, 너무 아파요. 후에 알았죠. 몸이 찢어지는 만큼 마음을 찢어야, 벽을 깨야 제대로 움직인다는 걸.” 현재도 그는 무용 작품에 꾸준히 출연하고 있다.
2011년 뮤지컬 제의가 들어왔다. 연기도 하고 연주도 해야 하는 ‘모비딕’이란 작품이었다. “제가 어릴 때 8년 정도 바이올린 연주했거든요.” “바이올린? 잘 살았나 보죠.” “여섯 살 때까지요. 이후 아버지가 사업 실패해 기울었죠.”
성장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에겐 한 살 터울 여동생이 있다. 자폐증이 심한 1급 장애인이다. 부모님의 기대가 그에게 쏠렸고, 고2 때까지 전교 5등 안에 들었다. 뒤늦은 사춘기로 재수·삼수하고 백수로 방황했지만. 그는 ‘모비딕’으로 2012년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남우신인상을 받았다. “부모님이 지독히 연기 반대했는데, 처음 고개 들 수 있었죠.”
배우 지현준은 최근 신바람이 났다. 고두심과 2인극 ‘댄스 레슨’, 1인35역 ‘나는 나의 아내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 연극·뮤지컬·무용 가리지 않고 전천후 출격 중이다.
그 중 ‘단테의 신곡’(2일부터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은 10년차 배우로서 또 다른 전기가 될 터. “극중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 가야 하는 한 걸음이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계단’이라고 해요. 지금 전 연기에서 그 무거운 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외롭고 힘겨워도 돌파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