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도공 심수관 가문, 일본서 400년 넘게 한국 이름 고수하고 있다는데?

해암도 2013. 10. 28. 20:14

일본 도자기의 원조는 정유재란(1598년)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도공(陶工) 40여명(원래 80여명이 끌려갔으나 도중 상당수가 사망함)이다. 이 가운데 이삼평과 심수관(1대는 심당길)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하다.

충남 공주 출신인 이삼평은 일본에서 고령토를 발견해 일본백자를 만든 최초의 인물로, 그를 기린 신사(神祀)가 남일본 지역인 큐슈 사가현에 있다. 사가현 아리타 지역은 일본 도자기의 산실로 육성돼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북 남원 출신인 심수관(沈壽官)이 더 잘 알려져 있다. 지난 토요일(10월 26일)까지도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그의 작품 무료전시가 열리는 등 빈번히 전시회가 열린다. 우리는 왜 그를 더 잘 알고 좋아할까?


	지난 27일 공방의 가마앞에서 인터뷰중인 심수관.
지난 27일 공방의 가마앞에서 인터뷰중인 심수관.
15대 심수관(54·본명 심일위)을 일본 큐슈 가고시마현에서 만나보니 그 이유가 느껴졌다. 이삼평과 심수관 중 누가 더 훌륭한 인물이었는지, 누구의 작품이 더 나은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이삼평을 더 좋아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심수관을 더 좋아할만한 점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얘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각과 철학의 차이’에 있었다. 지난 27일 오후 심수관 공방 앞에서 15대 심수관을 만났다.

― 와세다대학에서 도자기가 아닌 다른 학문을 전공했다(1983년 교육학과 졸업)는데, 가업(家業)을 잇기 싫었던 건가.
“어린 나이에 내 인생의 미래가 미리부터 정해져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돌아왔다. 400여년간 지켜온 가문의 일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해 친구들과 ‘소울(soul)밴드’를 결성했다. 도공의 길은 가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로 받아들일만 일이다. 그런데 아버지(14대·본명 심혜길)가 “역시 조선의 핏줄”이라며 흡족해 했다고 한다. soul을 ‘서울(seoul)’로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그런 아버지도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그 역시 ‘도자기가 지긋지긋해서 출세 한 번 해보려고’ 진학했다고 한다. 심지어 국회의원 비서관 역할도 했다. 교토대를 나와 총리 비서까지 지내고도 가업으로 돌아온 13대 심수관이 아파서 몸져 눕자 그제서야 낙향해 가업을 이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 지금 심 선생의 자녀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들이 원치 않으면 포기할 건가.
“(웃으며) 다행히도 아이들은 잘 받아들이고 있다. 아들 둘이 모두 가업을 이을 계획이다.”

심 선생은 2남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올해 22세인 장남이 현재 교토에서 도자기를 공부하고 있고, 20세인 차남역시 같은 길을 걸을 예정이다.

― 자녀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나. 아버지인 14대 심수관으로부터도 배우지 않았나.
“일본 속담에 ‘남의 밥솥에 있는 밥을 먹으라’는 말이 있다. (가업잇기를 중시여기는) 일본 풍토에서도 자기 자식을 가르치기는 쉽지 않다는 의미이다. 아무리 좋은 부자(父子)간 관계라도 사제지간이 되면 힘들어진다.”

그는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투에서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겪었을 고충이 느껴졌다. 심 선생은 2살때 가마에 불을 지피며 도자기일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 15대가 되도록 가업을 이을 아들이 계속 있었다는 얘기인데.
“다행히도 그랬다(웃음). 단 한 대(代)도 아들이 없는 때가 없었다.”

― 일본에서 심수관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나에게는 일본 이름이 있다. 오사쿠 가즈데루(大迫一輝). 하지만 서류상으로만 존재한다. 운전면허증이나 출생신고서 같은 곳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나는 그냥 심수관이다. 그것은 도자기의 가치와 나의 이름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이름을 이어받은 것은(襲名·습명) 심수관 도자기의 역사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심수관 도자기를 굳이 다량 생산되는 브랜드로 만들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전통은 참 지키기 힘들다.”

(심수관 박물관 안내문에는 ‘도자기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표현돼 있다. 심 선생은 다른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정체성을 모두 버릴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인간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이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좋은 면과 나쁜 면을 함께 갖고 있다. 소중한 것은 국가나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개인, 한 명의 사람이다’. 심수관 공방앞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동시에 게양돼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선대 도기와 같은 무늬의 백자도기. 비매품이라고 써있다.
선대 도기와 같은 무늬의 백자도기. 비매품이라고 써있다.
― 지금 만드는 도자기는 어떤 특징이 있나.
“특별한 특징이나 유행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저 나는 ‘사쯔마야기(薩摩?·가고시마의 옛이름인 사쯔마의 도기라는 뜻)’를 만들 뿐이다. 고려시대에는 청자, 조선시대에는 백자가 유행했지만 일본에서는 그저 사쯔마야기가 수백년전부터 존재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일본은 옛것을 잘 버리지 못한다. 나도 그렇다.”

- 뒤늦게 이탈리아와 한국 여주에 유학했는데 영향을 받았나.
“기술적 측면보다는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다.”

― 같이 끌려온 다른 도공인 박씨 집안의 후손중에는 태평양전쟁때 외무대신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도공 박평의의 후손)도 있다. 심수관은 왜 원래 길을 유지했나.
“과거에는 박씨나 심씨라는 이름으로는 일본에서 출세할 수 없었다. 우리 집안도 다른 길을 갈 기회가 있었지만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된 박씨 집안과 달리 도공의 길을 고수했다.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버지때 (일종의 타협으로) 비로소 일본이름을 갖게 됐다.”
박평의 후손은 12대손때 도자기로 번 돈으로 도고(東鄕)라는 성을 사서 귀화했다.

이런 사정을 인정받아 14대 심수관은 한국 명예총영사 명칭을 얻었다. 심수관의 공방 입구에는 갓 모양의 도자기가 안내판 위에 얹어져 있다. 또 한국의 전통적인 팔각정도 영내에 설치돼 있다. 그가 만든 생활도자기중에는 우리의 뚝배기 같은 흙빛 그릇들도 있다. 백자와 다른 ‘쿠로몬’자기이다. 400년이 넘어도 한국을 잊지 않는 그의 정신을 우리도 잊지 않기 때문에 더욱 우리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닐까.

  

  • 일본 가고시마(鹿兒島) 최원석 기자  : 2013.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