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보틀'보다 대기줄이 길다… 요즘 대세는 '고기리 검은 국수' 씹을수록 바다 향이 입안 가득
청류벽 제복쟁반
경기도 용인시 고기동에 있는 '고기리 막국수'. 평일 낮 이곳에 오면 지난해 '블루보틀' 앞에 길게 늘어섰던 대기 줄이 생각난다. 개점 시각인 오전 11시를 넘겨 도착하면 2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막국수는 빨갛다'란 고정관념을 깨고 '검은색 들기름 막국수'를 유행시킨 집이다.
◇막국수는 검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 남대문시장 골목에서 막국수 한 그릇 먹고 나오다가 양동 입구에서 내 나이 또래밖에 되지 않는 계집애에게 손목을 잡혔다."(김홍신의 '인간시장' 中)
막국수는 이런 음식이었다. 막걸리, 막노동처럼 '막' 말아 먹는다고 붙여진 이름. 기다림의 음식이라기보단 빨리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었다.
이곳 막국수는 그렇지 않다. 기다림을 거쳐 자리에 앉으면 메밀 향 가득한 면 위에 간장, 들기름, 깨, 김 가루가 뿌려진 막국수 한 그릇이 나온다. 한 입 떠먹으면 메밀의 풍미와 들기름·깨의 고소함, 김 가루의 바다 향이 입안 가득 차오른다. 고소함이 물릴 때쯤 시원한 육수를 막국수에 붓는다. 살짝 퍼지려고 했던 면은 다시 탱탱해지고, 입안은 시원해진다. 국물까지 싹 비우고 나면 머리끝이 찌릿하며 '잘 먹었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주인 유수창(49)씨는 원래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에서 이자카야 집을 10여년 했다. 장사는 잘됐지만 가게 특성상 새벽 5시까지 이어지는 영업시간 때문에 대장암을 얻고 가게를 접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암담할 때 눈에 들어온 것이 막국수다. 아내 김윤정(46)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결혼 생활 20여년 동안 방문한 막국수 집만 200곳이 넘었다.
대리 기사도 오지 않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외딴곳에 있지만, 평일 낮 방문한 ‘고기리 막국수’는 두 시간은 줄을 서야 맛볼 수 있다. (아래부터) 이 집이 유행시킨 들기름과 깨, 맨 김만 들어간 ‘들기름 막국수’, ‘비빔 막국수’와 기름을 깨끗이 걷어낸 소고기 육수를 부운 ‘물 막국수’도 맛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홍천 장원막국수에서 기술 전수를 받아 2011년 '고기리장원막국수'를 열었다. 이 집 맛의 비결은 '기본'. 메밀도 조금씩 제분하고, 깨도 금방 볶아 쓴다. 김은 향이 강한 기장 김. 육수는 소 등뼈에 목뼈, 살코기 등을 넣고 푹 고아 기름을 전부 걷어낸다. 김 대표는 "과정이 복잡할수록 맛은 더욱 깊어진다"고 했다. 유일한 단점은 술. 차 없이는 못 오는 곳이라 1인당 막걸리 1잔 이상은 팔지 않는다.
서울에서 들기름 막국수를 즐길 수 있는 곳은 강남역에 있는 '청류벽'이다. 평양냉면 맛집 '피양옥'에서 2018년 문을 열었다. 가게 한쪽에 있는 들기름 착즙기와 메밀 제면기에서 면과 기름을 뽑아 만든다. 삶은 소와 돼지고기가 한 접시에 담긴 '제복쟁반'도 유명하다.
◇전통의 노포 맛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4일 후퇴 때 부친 조규현과 모친 맹복례는 남한으로 각각 피란을 내려와 다섯째 숙부님의 소개로 서울에서 중매결혼을 하여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성천막국수는 아버님의 고향인 평안남도 성천군 사가면 회덕리 389번지에서 따온 지명이다."
동대문의 막국수 맛집으로 유명한 '성천막국수'는 최근 백종원의 아내 소유진, 즉 '소 여사 맛집'으로 인기몰이를 하는 노포다. 맛의 비결은 단순함. 물 막국수를 시키면 살얼음 낀 맑은 육수에 면 덩어리만 나온다. 겨자, 식초를 넣기 전 국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직원은 "숙성한 동치미 국물"이라고 하지만 달콤새콤하지 않다. 그냥 깊은 시원함! 평양냉면을 어려워하는 사람도 즐길 수 있는 맛이다.
비빔 막국수는 똬리를 튼 면 위에 다대기 같은 양념장이 한 술 올려져 나온다. 참기름이 많아 느끼할 듯한데 막상 한 입 먹으면 감칠맛에 반한다. 유일한 반찬은 '무짠지'다. 무짠 지에 식초 반 바퀴, 양념장 한 숟가락, 겨자를 조금 넣고 비벼 먹는 사람이 많다. '춘천=막국수'란 공식을 만들어 낸 샘밭막국수도 빼놓을 수 없다. 3대째 내려오는 맛집. 깨와 김, 참기름, 양념장이 올려진 국수를 비벼 먹다가 절반쯤 남은 국수에 찬 육수를 부어 마신다는 공식을 만들어 낸 곳이다. '막국수 먹고 싶다' 할 때 떠오르는 가장 정석의 맛이다.
조선일보 이혜운 기자 입력 20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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