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볶고 무치고 부쳐낸 고명만 7가지, 이건 요리다

해암도 2020. 5. 7. 07:06

 

국수 '따위'라고 말할 수 없는 시어머니의 국수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름, 만삭이었다. 시부모님과 식사 약속을 잡는데 어머니께서 집에서 국수나 삶아 먹자 신다. 분명 아들, 며느리 밥값 내게 하는 게 마음에 걸려 그러셨을 테다.

시부모님과 우리 부부가 외식을 할 때면 매번 '밥값 먼저 계산하기' 작전이 벌어진다. 밥 먹다 중간에 화장실 가는 척 하고 계산하기, 식당에 먼저 도착해서 주문과 동시에 계산하기, 넷이 같이 갈 때는 제일 늦게 들어가면서 식당 카운터에 카드 맡기기. 이제는 하루 전에 가서 계산하는 방법밖에 없다.

나는 원래 국수를 좋아했다. 이제 어머니는 내 국수를 담을 때 집에 있는 가장 큰 그릇을 꺼내신다. 가족 중 가장 많이 담아 주신다. 그마저도 한 그릇 먹고 더 먹는다.

만삭의 여름에 어머니 국수를 처음 먹었다. 단연코 이 세상 국수 중 제일 맛있다. 호박, 양파, 버섯은 기름에 하얗게 볶아 놓고, 오이는 고춧가루 양념에 무쳐 놓았다. 종종 썬 김치는 참기름에 윤기가 반들반들! 면과 동량으로 김치를 넣어 먹고 싶다. 화룡점정은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하여 부쳐놓은 달걀지단이다. 고명만 7가지다.

결혼한 지 꽤 됐을 때인데 왜 그제야 어머니의 국수를 맛보았나 억울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아들, 며느리에게 따뜻한 밥,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으셨던 마음이셨을 게다. 국수 '따위'는 메뉴 선정에서 항상 밀렸을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의 국수에 입문한 뒤 국수 앓이가 시작되었다. 직성대로라면 일주일에 두어 번 먹으면 좋겠다 싶다. 출산 후 뭐가 먹고 싶냐는 어머니 물음에 "저는 항상 어머니 국수예요" 했다.

산후조리원에서 퇴원하여 집에 온 며칠 후 어머니는 국수를 만들어 오셨다. 큰 양푼에 면과 고명을 푸짐하게 올리고, 노란 주전자에 국물을 담아 오셨다. 이쯤 되면 국수 '따위'라고 말할 수 없다. 이건 요리다.

 

                              ⓒ 홍정희

 

며칠 전 시아버지 생신 축하를 겸해서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갈비탕과 소고기를 포장해 가겠노라 남편이 미리 전화를 드렸다.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께서 국수나 삶아 먹자 신다.

순간 나는 "네네 너무 좋아요" 할 뻔했지만, 꾹 참았다. 잘했다. 시아버지 생신인데 며느리가 좋아하는 국수라니! 하물며 어머니는 온갖 고명을 일일이 준비하고 육수도 우려내느라 국수 '요리'를 분주히 만들어 내야 한다. 먹고 싶지만, 너무 먹고 싶지만 잘 참았다.

어제는 잘 참고 갈비탕과 소고기를 먹었다. 오늘은 못 참겠다. 어머니만큼 많은 고명은 못 만들지만 집에 있는 달걀과 호박, 딱 반개 남은 양파, 어제 시댁에서 얻어 온 어머니 김치로 국수를 만들어 본다.

김치 덕분인지, 남편이 제법 엄마 국수 맛이 난다는 칭찬을 해준다. 면 좋아하는 아이도 함께 맛있는 점심 한 끼 했다. 직성이 '조금' 풀린다. 다음에는 "어머니 국수 먹고 싶어요" 해야지!

 

 

오마이뉴스(시민기자), 홍정희(assa2015)    20.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