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산병원 이비인후과 장용주 교수(57)는 2015년 9월 프랑스 칸에서 열린 유럽안면성형재건학회 학회에서 ‘조셉 메달’을 받았다. 현대 코 성형수술의 창시자 자크 조셉을 기려 매년 코 성형수술 발전에 기여한 의사에게 주는 상으로, 장 교수는 아시아의 첫 수상자였다.
장 교수는 3년 뒤 미국안면성형재건수술학회가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개최한 국제학회에서 ‘에프레인 다바로스 상’을 받았다. 초창기 얼굴성형수술을 보급한 멕시코 의사를 기려 4년 마다 수여하는 상으로, 아시아 의사로선 역시 처음이었다. 두 상을 모두 받은 의사는 네덜란드의 원로 의사 놀스 트레니제에 이어 두 번째다.
장 교수는 코 성형수술에서 세계 각국의 의사들이 인정하는 최고수다. 국내외 의사들은 자신이 치료하기 힘든 환자를 보내고 있으며, 이렇게 온 환자 가운데 태국의 외교관은 사고 후 뭉그러진 코를 회복해 러시아 대사로 취임하기도 했다. 국제학회에서 외국 의사가 장 교수의 수술 장면을 영상으로 틀어놓고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그러나 장 교수가 처음부터 명예로운 의사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문학과 음악을 사랑했던 청소년기에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 의사를 꿈꿨다. 의사가 그런 직업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하자마자, 울퉁불퉁한 산길을 걸으며, 때로 눈물 흘리면서, 이 자리까지 왔다.
장 교수는 고2때부터 생긴 편두통 때문에 의사가 되지 못할 뻔 했다. 편두통이 나타나면 앞이 안 보이고 구토가 계속 됐다. 대입 모의고사를 아예 못 친 적도 있었다. 그는 “제발 학력고사 때 안 아프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다행히 시험 때 괜찮아서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다.
대학 입학 후에도 편두통은 계속돼 남들이 밤새 공부할 때, 다음날 행여 두통이 올까 봐 일찍 잠자리에 들어가야했다. 교회를 거쳐 성당에서 열심히 기도해서였을까, 가톨릭학생회 회원으로 주말마다 쪽방촌을 돌며 환자들을 본 데 대한 하늘의 보상일까, 편두통은 본과 3학년 때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장 교수는 인턴 때 내과와 정신과 사이에서 고민하다, 정신과 환자들이 의사를 안 만나려고 앙버티는 것에 충격 받아 내과에 지원했지만, 낙방의 쓴 맛을 봐야 했다. 몇 달을 방황하다가 뻥 뚫린 가슴을 부여잡고, 군의관으로 입대했다. 전방에서 사병들을 동생처럼 보살피며 근무할 때 의대 동기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비인후과의 젊은 교수들이 전공의 지원자들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데, 지원해볼래?”
‘장 중위’는 휴가를 내서 주임교수를 찾아갔지만, “너 같은 놈 필요 없다”는 매몰찬 이야기를 들었다. 어째야 하나 고민하다 시험에 도전했지만, 선배 의사로부터 ‘내년에 다시 시험 쳐야 할 것 같다“는 비보를 들어야만했다. 두 번 연거푸 전공의 시험에 떨어지다니, 세 번째의 기회는 올까, 타박타박 허탈하게 귀대해서 당직을 서던 밤, 눈물이 주르르 꽉 다문 입술 위까지 흘러내렸다. 그러나 며칠 뒤 본과 4학년 때 결혼한, 후배 의사인 아내로부터 연락이 왔다. “혹시나 해서 병원 홈페이지에서 확인했는데, 당신 이름 있어요!”
주임교수가 마뜩치 않아하는 상태에서, 군 전역 뒤 다른 동기보다 2개월 뒤늦게 시작한 전공의는 순탄치 않았다. 1년 반 남짓 그야말로 찬밥 신세였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얼마 전 작고한, ‘귀 분야의 대가’ 김종선 교수가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오세아니아 이비인후과학회에 함께 참석할 제자를 찾았지만, 모두들 “영어에 자신이 없어서…”하며 주저했다. 장 교수는 바다 밖으로 처음 나가는 길에 자원해서, ‘씩씩하게’ 발표하고 외국 의사들과 용감하게 소통했다. 김 교수를 통해서 ‘장 교수의 떡잎’에 대해서 시나브로 소문이 났고, 주의의 눈길이 조금씩 달라졌다.
장 교수는 ‘귀의 세계’도 흥미진진했지만, 얼굴의 중간에 자리 잡아 사람의 인상과 표정을 결정하고, 호흡의 첫 관문이기도 한 코의 세계에 더 이끌렸다. 코 분야 명의였던 민양기 교수로부터 논문 쓰는 법을 배운 것은 향후 의학자로서의 삶에 토양이 됐다. 민 교수는 《의학 연구자를 위한 영작문 사전》을 펴낼 정도로 영어 논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학자. 스승은 장 교수에게 한국 논문을 영어 논문으로 번역하는 법, 의료기기를 갖고 쓸 수 있는 논문의 기획 등을 시켜 논문의 중요성에 대해 눈 뜨게 했다. 장 교수는 민 교수가 주도한 각종 학회에 따라다니며 “코를 평생 전공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편두통이 없는 세상에서, 컨디션 걱정 없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던 장 교수는 후배들로부터는 ‘걸어 다니는 커밍스(Walking Cummings)’라는 말을 듣기까지 했다. 커밍스는 세계 각국 이비인후과 의사들의 교과서다. 장 교수는 전문의 시험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하고 서울대병원에서 전임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모교에서 교수 자리는 없었다. 주임교수의 ‘권유’에 따라 천안의 단국대병원 교수로 갔다.
천안에는 미국에서 의사생활을 하다 귀국한, ‘귀 분야 대가’ 이정구 교수가 있었다. 이 교수는 제자 교육에서도, 환자 진료에서도 ‘신사의 품격’을 보여주는 참의사였다. 이 교수는 “연구계획서를 써봐라”고 권유했고, 장 교수는 중이염과 난청에 대한 연구로 정부 과제를 따내서 병원의 자랑거리가 됐다.
이 무렵 두 가지가 그의 삶을 결정지었다. 첫째, 말안장처럼 납작한 코, 휘어진 코, 성형수술이 잘못돼 숨 쉴 때마다 아픈 환자들을 보면서 코 성형수술의 중요성에 대해 어섯눈이 떴다. 둘째, 연세대 윤주헌 교수부터 약 전문지에 바이러스 비염에 대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논문 검색을 하다가 바이러스와 관련된 이비인후과 논문이 거의 없는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감기가 부비동염(축농증)을 비롯해서 수많은 콧병을 일으키는데….
장 교수는 교수에게 주어지는 해외 연수 때 바이러스와 코 성형수술을 파고들기로 했다. 미국과 유럽의 이 분야 대가들에게 정성들여 이메일로 연수 여부를 물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현실적 대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데이비스 캠퍼스(UC Davis)의 조나단 위디컴 교수에게 “코 상피세포 이온채널에 대해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고 메일을 보냈고 허락을 받았다.
그는 데이비스에서 ‘세상은 좁고, 길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미국 연구소 생활을 시작한지 2개월 뒤 UC 샌프란시스코의 호머 부세이 교수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미안하게도 당신이 보낸 이메일을 뒤늦게 봤다. 관심 있으면 지금이라도 보자” 장 교수가 근황을 이야기하자 “현재 우리가 위디컴 교수팀과 공동연구하고 있다”는 대답이 왔다.
장 교수는 어느 날 아침 일찍 데이비스의 이비인후과 과장이 개최하는 심포지엄에 갔다가, 마찬가지로 일찍 온 의사와 인사를 나눴다. 상대편은 UC 데이비스에서 얼굴성형수술을 하며 미국 전역에 이름을 떨치던 조나단 사익스 교수였다. 둘은 곧바로 뜻이 통해서 친구가 됐고, 장 교수는 6개월 동안 얼굴 성형수술의 거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장 교수는 2002년 7월 단국대로 복귀했다가, 3개월 뒤 서울아산병원 이봉재 교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비인후과 의사 3명 가운데 1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1명은 개인 문제가 생겨 환자를 볼 수 없는 상황이니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큰물에서 제대로 공부하도록’ 기회를 준 단국대병원과 이정구 교수를 떠나야할지, 밤을 뒤척이며 고민했다.
미국에서 한 공부를 제대로 이어가려면 아산병원이 적합한 것은 분명했다. 이비인후과만 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마음을 흔들었다.
‘미국 가기 전, 30대 여성 환자의 말안장코를 수술할 때, 지원하는 과의 실수로 수술이 잘못된 적도 있지 않은가?’ 병원의 보상금과 별개로 사과의 뜻으로 개인 돈을 전했지만, 환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1주일 동안 밤잠을 뒤척이던 때가 계속 눈에 밟혔다. 장 교수는 단국대병원에 연수 지원금을 돌려주고, 서울로 향했다.
장 교수는 환자들과 희비를 나누며 숱한 치료법을 개발하고, 개선했다. 코 중간의 칸막이인 비중격이 휜 ‘비중격만곡증’의 코끝 부위를 교정하는 치료법을 세계 처음으로 개발했다. 유전적 이유로 수시로 코피가 나는 ‘유전성 출혈성 모세혈관확장증(HTT)’을 수술로 치료하는 분야에서 새 수술법을 선보였으며, 비염 수술 때 조직을 너무 많이 제거해 극심한 통증으로 고생하는 ‘빈코 증후군’을 해결하는 수술법을 개발해 200여명의 응어리를 풀어줬다.
장 교수는 2003년 5월부터 매년 ‘아산 코성형 심포지엄’을 열어 경험과 지식을 공유했으며, 이 학회는 2006년부터 해외에서 80~90명이 참석하는 국제학회로 성장했다. 세계 각국의 의사들이 연수를 요청해와 지금까지 세계 21개 나라에서 120여명이 수술을 배워갔고 이들이 난치 환자를 보내오고 있다. 그는 또 한 달에 한 번 꼴로 해외로 나가서 강의와 수술 시범을 펼치고 있다.
코 성형 분야에서 4권의 교과서를 펴냈으며 영어, 중국어로 번역돼 아시아 의사들의 필독서가 됐다. 미국, 중국, 인도 등에서 출간한 8권의 교과서에 집필자로 참가했다. 미국에서 펴낸 DVD 4개는 세계 의사들이 참고하고 있다. 《JAMA 얼굴성형술》, 《얼굴성형수술》, 《이비인후 Auris Nasus Larynx》 3개 SCI 학술지의 편집위원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그는 2013~14년 대한안면성형재건학회 회장을 맡았으며, 2018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제8회 범(凡)아시아안면성형재건학회(PAAFPRS) 이사회에서 코성형 수술에 대한 강의를 3개나 펼쳤고 만장일치로 차기 회장에 선출됐다.
장 교수의 업무가 늘어나면서 편두통이 다시 생겼다. 그래서 정부 과제의 연구는 손을 놓으려고 한다. 컨디션을 최고상태로 유지해서 진료와 수술은 계속 할 예정이다. 자신이 남들은 심각성을 잘 모르지만,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병의 환자이자 의사로서, 코 때문에 남모르는 고통을 앓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주 기자 stein33@kormed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