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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쉐린 별 1개 받은 한식당 '품'- [노영희 셰프]

해암도 2019. 1. 15. 06:12

"난 밥만 팔지 않는다, 한국의 풍취도 함께 판다"

[노영희 셰프]
미쉐린 별 1개 받은 한식당 '품'
최근 10주년 맞아 요리책 출간

"힘들어서 접고 싶었던 순간은 없었느냐"고 묻자 노영희(57)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요식업계를 쥐락펴락해온 '큰언니'의 단단한 표정에 순간 균열이 일었다. "재작년 말요…. 사드에다 뭐다, 손님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어요. 애초에 수익을 내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일 아니었고, 그달에 번 돈을 그다음 달 재료비에 쏟아붓는 것도 각오하고 해왔지만, 그 무렵엔 사비를 다 털어도 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도 이 악물고 버텼어요. 10년은 채우고 싶었거든요. 10년은…." 말끝에 그의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고급 한식당들의 명멸에도 10년을 뚝심 있게 버틴 한식당 '품'의 요리사이자 스타일리스트인 노영희
고급 한식당들의 명멸에도 10년을 뚝심 있게 버틴 한식당 '품'의 요리사이자 스타일리스트인 노영희의 깐깐함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7남매 중 막내예요. 방학이면 식구가 많아서 대청마루에 상을 세개씩 펴고 밥 먹었어요.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음식을 대충 차리질 않았어요. '대충 먹으면 대충 산다'고 하셨죠." /김지호 기자
2008년 12월 서울 남산자락에 문을 연 한식당 '품(品)'이 10주년을 맞았다. 강산도 변할 시간. 그간 겪은 풍파는 헤아릴 수 없다. 2016년 미쉐린 가이드로부터 처음 별 1개를 받았고 지금껏 이를 유지하고 있다. '품'을 지휘하는 요리사이자 대표인 노영희는 10년을 기념하려고 최근 요리책 '품(Poom)'을 펴냈다. 158개 한식의 요리법과 사진, 영문 설명을 실었다. 한 권에 12만원. 오뚜기 재단 출판지원사업이 제작비를 댔다. 1000권만 찍었다는 한정판 책 표지엔 묵직한 놋수저가 달렸다. 노씨는 "돈값 하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 촬영에만 6년쯤 걸렸다"고 했다.

◇이 악물고 버틴 10년

10년 동안 명멸한 고급 한식당이 한둘이 아니었다. 노씨는 "그래도 내가 10년을 버텼더니 다들 장사가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며 웃었다. 그 사이 SK행복나눔재단에서 '오늘'이란 레스토랑을 열었고, 광주요의 '비채나', CJ의 '소설 한남'이 생겼다. 신라호텔 '라연'과 롯데호텔 '무궁화'도 재단장하고 문을 다시 열었다. 개인이 하면서 버텨온 고급 한식당은 '품'밖에 없는 셈이다. 노씨는 "새 레스토랑이 생기면 우르르 거길 갔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돌아오고들 한다. 그 기간을 참고 견디면 되는데, 쉽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한식은 비싼 돈 주고 먹는 것을 낯설어하는 문화에 좌절한 적도 여러 번이다. "드라마만 봐도 기업인·정치인이 모이면 와인 마시고 스테이크 썰거나 일식을 먹어요. 한식 먹는 그림은 웬만하면 안 나오죠. 한 그릇 만원만 넘어도 뭐라 하는 게 한식인 거죠. 작년·재작년 재료 값만 50%가량 올랐는데, 음식값은 함부로 올릴 수도 없어요. 한번 큰맘 먹고 올렸다가 된통 당했죠. 화내는 분이 너무 많았어요. 연봉 몇억씩 받는 분들도 그래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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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진달래 화전, 민어 만두탕, 송이버섯새우찜
그래도 버틴 건 기본을 지킨 덕분이다. 따뜻한 음식은 따뜻하게, 찬 음식은 차갑게 내는 데 집중했다. 갈치 하나를 내도 일일이 가시를 바르고 포를 떠서 한입에 넣을 수 있도록 했고, 갈비찜도 기름을 일일이 떼고 한입 크기로 썰어 냈다. 외국인 손님이 와도 음식을 남김없이 싹 먹고 가는 비결이 여기 있다.

제철 음식을 낸다는 원칙을 고집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는 봄이면 진달래 화전을 꼭 낸다. 한식이 때론 시(詩)가 될 수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통영부터 지리산까지 뒤져 음력 삼월삼짇날을 위한 진달래를 구하지만 해가 갈수록 식용 진달래 구하기가 별 따기다. 6월엔 전남 신안에서 구해온 민어로 어(魚)만두 빚어 탕을 내고, 9월엔 경북 봉화에서 가져온 송이로 송이버섯새우찜을 낸다. 겨울엔 통영 굴로 굴전과 굴동치미 냉채 등을 놓치지 않고 만든다. 노씨는 "사계절 음식을 온전히 먹을 때 비로소 우리도 나이를 제대로 먹는다고 믿는다"고 했다. "한식당은 밥만 파는 곳이 아니라고 믿어요. 우리의 계절과 풍광이 그릇에 담기는 것 아닙니까. 오롯이 우리나라의 풍취를 맛보게 해주고 싶어요."

◇때론 투사처럼

몇 년 전부터 '품'에서는 노쇼 문화를 없애기 위해 6인 이상 손님이 오면 따로 예약금을 받고, 당일 취소할 때 위약금을 받기 시작했다. 6년 전쯤 한 외국계 회사가 16명을 예약해놓고 당일 오후 2시 반쯤 예약을 취소했을 때 노씨는 공정거래위원회에 전화를 넣고 업체에 내용증명을 보내려 했다. "돈 못 준다"고 버티던 업체도 결국 돈을 냈다. 노씨는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선 욕먹어도 때론 싸워야 한다"고 했다. 노씨는 "잡지나 신문 정기 구독할 때도 신용카드 번호 불러주면 결제가 되는데 음식만 안 된다. 그것만 법으로 고쳐도 노쇼는 대부분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52시간 제도에 대한 일침도 놨다. "52시간 근무제가 시작되면서 나처럼 법 잘 지키는 사람도 불법을 저지를 수밖에 없게 됐지요. 가뜩이나 요리하는 애들 돈 많이 못 받는데, 52시간 제도 하면서 월급까지 깎을 순 없잖아요. 그 사람 월급 깎아주고 사람 하나 더 쓰라고? 이론과 실제가 이렇게 다릅니다."

요식업체에 만연한 메뉴 베끼기 문화도 질타했다. "제일 기운 빠질 때가 대기업이 공부 안 하고 남의 식당 찾아와서 메뉴 베껴갈 때예요. 우리 직원들은 베끼러 온 사람들 보면 딱 알아채요. 한 명은 음식을 젓가락으로 헤쳐보고 한 명은 사진 찍고 한 명은 받아 적고요(웃음)."

노씨는 그럼에도 벌써 20주년을 꿈꾼다. "우리도 오래가는 근사한 식당 가져볼 때가 됐다고 믿어요. 이 없으면 잇몸으로 버텨보려고요." 그의 음성이 제철 재료처럼 싱싱했다.


 조선일보     송혜진 기자      입력 2019.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