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화 ‘일대종사’ - 왕자웨이 감독

해암도 2013. 9. 1. 13:10

 

절정의 영상으로 브루스 리 스승 일대기 담아내다

사진 중앙포토

 

솔직히 왕자웨이(王家衛)는 더 이상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가 야심 차게 내놓았다던 2007년작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좋지 않았다. 지나치게 동어반복적이었다. ‘중경삼림’의 미국판이었다. 지루했다. 완성도도 심각하게 떨어졌다. 캐릭터들이 자기연민에 빠져 전전긍긍해 했다. 왕자웨이 자체가 그래 보였다. 그에겐 이제 자기복제만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과거는 영광이었다. ‘아비정전’에서 ‘동사서독’ ‘중경삼림’ ‘화양연화’ 등으로 이어지던 1990~2000년의 10년간은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왕자웨이는 그때 이미 일가를 이뤘다. 전설을 만들어 냈다. 그러던 그가 2004년에 내놓은 ‘2046’부터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같은 해 그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스티븐 소더버그와 함께 한 옴니버스 작품 ‘에로스’는 왕자웨이의 미학이 쉽게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줬다. 고급 콜걸이던 후아(공리)는 재단사인 장(장첸)이 자신을 흠모하고, 종종 훔쳐보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 늘 그를 깔보는 척한다. 잦은 과음과 무절제한 생활로 후아는 죽을 병에 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장을 침대 가까이로 부른다. 그리고 그에게 자위를 해준다. 그녀가 장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애정표현이다. 여자는, 혹은 남자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로 상대를 사랑하려 할 때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 세상 그 누구가 뭐라 하든.

왕자웨이의 사랑은 늘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비껴서 있다. 의식하지 않는다. ‘해피 투게더’에서 장궈룽(張國榮)과 량차오웨이(梁朝偉)가 뜨겁게 키스를 하듯이. ‘타락천사’에서 자신의 무릎으로 무심한 척, 진청우(金城武)의 머리를 베개 하는 이상한 여자 린칭샤(林靑霞)처럼.

한동안 범작으로 잠행해 오던 왕자웨이는 이번 신작 ‘일대종사’로 자신이 영화 무림의 최고 고수임을 다시 한번 입증해 내는 데 성공했다.

 

실로 너무도 어마어마해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작품을 왕자웨이는 이번에 만들었다. 영화 인생 25년 만에 최고의 걸작을 만들어 냈지만 사람들은 다시 한번 이게 그의 끝이 아니라는 기대와 흥분감을 갖게 됐다. 그는 여전히 걸작을 양산해 내는 진행형의 위대한 작가다.


‘일대종사’는 영춘권의 창시자이자 브루스 리의 스승이라는 예원(葉問)의 일대기를 그리는 척한다. 그래서 단순 액션의 무협영화인 척한다.
 
하지만 ‘일대종사’는 훨씬 더 큰 가치와 의미를 지향한다. 왕자웨이가 실제로 그리고 싶었던 것은 예원이 활동했던 1930년대의 사람들이었다. 시대를 타고 넘었던, 그럼으로써 한 시대를 일궈냈던 사람들. 가히 ‘일대종사’라 부를 만한 수많은 익명의 역사 속 인물들. 왕자웨이가 주목한 것은 역사는 늘 거대한 물결을 이룬다는 것이며 영화는 그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찾아내고 기록할 의무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일대종사’가 거대 담론의 철학만을 얘기하고 있는 작품이 아니다. 눈이 부실 만큼 영화는 찬란하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 빛의 후광이 오래도록 눈을 부시게 만든다. 왕자웨이를 뛰어넘는 탐미주의자가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싶다.

영화적으로 가장 뛰어난 장면은 궁이(장쯔이)와 마삼(장첸)의 기차 역에서의 대결 신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전함 포템킨’에서 보여 준 계단 신처럼 영화 역사에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그러나 각자 개인적으로 좋아할, 빼어난 장면들이 너무 많다. 대사는 거의 철학이다. 이런 대목이 있다. ‘믿음은 언젠가 보답을 받는다. 등불을 켜면 사람이 모인다.’ ‘일대종사’는 이 시대의 등불 같은 영화다.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왕가위에게 몰려들 것이다.

온라인 중앙일보·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2013.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