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욕 없는 세계

해암도 2017. 11. 5. 05:07

소비의 행복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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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욕이 사라지는 시대다. 물건에 대한 욕심보다 가치와 시간, 체험이 더 중요해졌다는 뜻이다. 요즘 사람들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좇기보다 눈앞에 보이고 직접 만질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을 추구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소비가 더 이상 행복이 아닌 시대, 어디서 행복을 찾아야 할까?”/플리커
루시드 폴이 무농약 인증을 받고 음원차트 1위를 한 것만큼 좋다는 기사를 봤다. 제주에 내려가 농부가 된 지 4년 만의 쾌거라고 했다. 2005년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스위스의 로잔 대학에서 공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하지만 박사 학위를 받은 2008년 미련 없이 스위스를 떠나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얼굴에서 그 사람의 직업이 드러나지 않아야 좋은 삶이라는 어느 소설가의 말은 노동이 우리의 정체성을 그만큼 훼손시킨다는 뜻이다. 루시드 폴의 얼굴이 내겐 농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를 인터뷰할 때도 그는 가수로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고시 공부 중인 교회 오빠처럼 보였다.

그가 작년 한 홈쇼핑에서 감귤을 팔았다는 뉴스도 발견했다. 안테나 뮤직 소속의 가수들이 한꺼번에 등장해 흥겨웠다고 했다. 얼마 전, 일본의 다케오 도서관에서 유독 농업 관련 잡지가 눈에 띄어 놀랐다. '다베루 통신'처럼 시골 농부를 스타로 만드는 잡지뿐만 아니라, 장아찌와 쌀만 사진 찍어 만든 잡지도 있었다. 막 재배한 쌀로 만든 오니기리 특집도 있었는데, 직접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아 더 흥미로웠다. 일본의 서점을 돌며 느낀 건 지방 공동체가 살아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지난 20년 넘는 장기 불황을 겪으며 외면의 확장보단 내면이 깊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여권도 운전면허증도 만들지 않는다는 '사토리 세대'에 대한 기사를 읽었을 때, 나는 '패기 없는 일본 젊은이'라는 이미지보다, 현재를 소중히 하며 소박하게 사는 달관이나 지혜가 더 먼저 다가왔다.

흥미로운 건 세계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에서 농업 분야에 진출하는 대졸자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농업이 활발한 메인주에서는 무려 40%나 급증했는데, 2013년에는 신세대 농부를 위한 라이프스타일 잡지 '모던 파머'가 창간됐다. 세계적인 라이프스타일 잡지 '킨포크'의 농업 버전인 셈이다. 포틀랜드에서 시작된 '킨포크' 역시 친구나 이웃들과 모여 소박하게 식사하며 소통하는 삶을 모토로 출발했다.

'물욕 없는 세계'는 일본 잡지 에스콰이어 편집장으로도 일했던 '스가쓰케 마사노부'의 책이다. 이 책은 대량생산 대량소비하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느낀 사람들의 지독한 피로감에 대한 묘사이며, 과시하거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지위 소비가 더 이상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예견이기도 하다. 행복이 연봉과 큰 상관이 없다는 연구 결과는 행동경제학자들이 다양한 연구로 속속 밝혀내고 있다. 행동경제학의 아버지 대니얼 카너먼은 기본적인 의식주가 충족되면 그 이상의 수입이 꼭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밝힌다. 그의 가설 중 하나는 연봉이 높으면 오히려 행복감이 줄어드는데, 그 이유는 고수입 그룹이 일에 쓰는 시간이 수입이 작은 그룹보다 절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일에 비례해 스트레스 양도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

"수입과 장시간 노동이 행복의 증가를 촉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과연 무엇이 행복도를 높이는가? 답은 놀라울 것도 없다. 더 많은 시간을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보내는 것. 더 많은 시간을 친한 사람과의 관계를 위해서 쓰는 것, 식사나 운동에 더 시간을 쓰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경제가 본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체제가 아님을 알려준다… 경제는 인간의 욕망 중 가장 중요하지 않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만들고, 기르고, 행동할 것! 이것은 최근 붐처럼 일어나고 있는 '메이커스' 운동과도 맥이 닿아 있다. 최근 브루클린이나 도쿄의 가장 주목받는 상점 안에 놓인 재봉틀은 그런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상점이지만 동시에 공방인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물건을 파는 동시에 직접 만드는 곳이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메이커스'는 3D프린터 같은 디지털 공작기계 보급에 따른 미국의 새로운 제조 혁명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을 쓴 '와이어드'의 전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인터넷 세대에 의한 물건 제작의 흐름을 이렇게 기록한다. '웹의 대단한 점은 이것이 발명뿐 아니라 생산 수단까지 민주화한 점이다.' 대량생산 시대에는 기술과 설비와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제조업이 대기업과 숙련공에게 독점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변화하고 있다고 앤더슨은 지적한다. '물건 제작이 디지털화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시대가 가내공업으로 회귀하는 모습이라고 선언한다. 산업혁명 이전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물건을 직접 만들어 썼다. 하지만 대기업이 제조업을 독점한 자본주의 시대에 우리는 내 앞의 물건이 누구로부터 어떻게 왔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과연 직접 만든 물건들을 '다이소' 같은 곳에서 산 물건처럼 취급할 수 있을까. 우리가 창조적으로 물건을 만들어 쓴다는 건 넘쳐나는 쓰레기를 줄이는 일과도 닿아 있다.

물욕 없는 세계 - 스가쓰케 마사노부 지음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더 이상 물건을 수집하지 않는 세대에 대한 분석이다. 20대 일본 남성 중 여자 친구가 있는 비율은 고작 20%인데 그 이유가 "그들이 욕망을 콘텐츠 형식으로 해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타쿠들이 2차원상의 캐릭터를 언급할 때 쓰는 은어인 '우리 마눌'이 상징적인 용어다. 무료 콘텐츠가 범람하는 이 시대엔 부담 없이 접근해 댓글을 달거나 직접 2차 창작을 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다. 욕망 자체가 콘텐츠화되었기 때문에 과거처럼 하드 디스크에 파일을 모으거나, CD를 사는 등의 물리적 소유가 필요 없는 것이다.

2009년 유엔은 '호모 헌드레드'를 선포했다. 생애주기가 70세에 맞춰져 있던 시대가 점점 저물고 있다. 우리는 은퇴 후, 과거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야 하는 세대가 될 것이다. 직업을 몇 번씩 바꾼 루시드 폴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그의 행적은 다른 삶에 대한 확실한 아이디어 하나를 준다.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하는 사람이 됐을 때 느껴지는 주체적인 삶의 기쁨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봉숭아 꽃씨를 뿌려 그곳에 열린 꽃과 이파리로 봉숭아물을 들였었다. 봉숭아꽃물은 세상 그 어떤 아세톤으로도 지워지지 않아서, 꽃물이 빠질 때까지 내내 변하는 손톱을 바라봐야만 했다. 문득 그것이 엄마와의 시간이며 추억이었단 걸 깨달았다. 집에 가는 길, 매니큐어 대신 꽃씨 하나를 샀다. 오래 걸릴 줄 알지만, 행복했다.

물욕 없는 세계 - 스가쓰케 마사노부 지음       

조선일보   백영옥·소설가      입력 : 2017.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