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후반 필독서

해암도 2017. 10. 4. 05:55

질풍노도의 청춘을 뒤흔들었던 『데미안』의 그 구절

 

노후에 들어선 사람은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는 게 필요하다. 그 방법 중 하나는 예전에 밑줄 치며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어보는 것이다.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 인생 후반부에 제2의 사춘기를 겪게 될지 모른다. 흔들리는 대로 나를 맡겨보자. 또 퇴직하게 되면 만나는 사람의 범위가 좁아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외로움과 고독이 밀려온다. 이럴 때 책 읽기는 세상에 둘도 없는 절친이 돼 줄 수 있다. 출판사 대표가 인생 후반부의 필독서는 어떤 게 있고 책 읽기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준다. <편집자>    

 

젊은 날의 고독을 치명적 아름다움으로 그려낸 작품
" 새는 힘겹게 투쟁해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
인생 후반에 다가올 세계에 대한 두근거림 되살아나
     

독서는 정신적 안정감을 주며, 손상된 자아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정서적 부적응을 치유한다.  인생 후반부의 독서는 단순한 책 읽기 차원을 넘어 남다른 즐거움을 주는 오락일 수 있다. 뇌 운동을 활성화해 치매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안인희 옮김(문학동네, 2013). [사진 교보문고]

헤르만 헤세, 《데미안》, 안인희 옮김(문학동네, 2013). [사진 교보문고]

 
이십 대 시절 앞날이 막막하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집어 들었다. 며칠이고 『데미안』의 세계에 빠져 있다 보면 희미한 안개 속에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어렴풋이 드러나곤 했다. 『데미안』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러나 다시 읽으니 문장 곳곳이 낯익었고, 어느 문장은 멈추어 미소를 지었던 순간까지 기억났다.

 
1998년 도서출판 나무생각을 설립하면서 출판사를 이끌 두 축을 세웠다. 하나는 고령화 시대를 살기 위한 실버 분야와 사람에 대한 학문인 심리학 분야였다. 내가 고령화와 나이 든 어른이 주는 향기에 천착한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늙어버린 아버지. [사진 pixabay]

늙어버린 아버지. [사진 pixabay]

 
아버지는 내가 기억하기에 10가지가 넘는 직업을 가졌다. 공무원, 사료개발, 고아원 원장…. 어느 정도 머리가 여물자 나는 아버지가 신기했다.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저 정도면 좌절하고 술과 벗하거나 대쪽 같은 성격을 내려놓을 법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런 노동도 할 수 없는 신체 상태가 되자 사시는 아파트에 조롱박을 심고,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에서 나무젓가락으로 병조각을 집어 비닐봉지에 넣으며 하루를 보냈다.
 
향기가 나는 노년이 과연 가능할까? 그것은 나에게 큰 과제였고, 한국 사회의 숙제였다. 『고령사회 2018, 다가올 미래에 대비하라』를 필두로 고령화 시대에 관한 책들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관심은 당연히 퇴직을 앞두고 있거나, 퇴직한 이들의 생각과 행동의 변화에 두고 있었다.
 
프랑크 쉬르마허, 《고령사회 2018》, 장혜경 옮김(나무생각, 2011). [사진 나무생각]

프랑크 쉬르마허, 《고령사회 2018》, 장혜경 옮김(나무생각, 2011). [사진 나무생각]

 
대기업 사장을 지낸 J씨는 일·월·단위의 계획을 세우고, 자신이 쓸 작은 사무실도 얻었다. 손님을 맞아 커피를 대접하려는데 맹물이 나와 살펴보았더니, 커피를 안 넣었다는 에피소드도 들려주었다. 한 번도 자기 손으로 커피를 끓여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또 A씨는 퇴직을 하자마자 강원도 두메산골 첩첩산중 꼭대기에 집을 지어 홀로 지냈다. 부인은 시골 생활이 맞지 않는다며 서울에 있고, 자신은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유기농과 친환경의 표기가 얼마나 애매모호하며 거짓인가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고도 했다.
 
퇴직후 꿈꾸는 귀농귀촌. [사진 pixabay]

퇴직후 꿈꾸는 귀농귀촌. [사진 pixabay]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특별할 게 없지만 내면에는 처절한 싸움이 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과거의 영광과 안온함을 내동댕이치고 스스로 나와 새로운 세계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데미안』에서 이야기하는 ‘세상의 현상들이 교차하는 지점, 단 한 번뿐이고 아주 특별한,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고 특이한 한 지점’에 있다.
 
폭풍우 치는 밤 등대의 불빛
 
등대. [사진 pixabay]

등대. [사진 pixabay]

 
『데미안』은 은유와 심층 구조가 뛰어난 작품이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열 살 때부터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겪은 내면의 갈등과 체험을 다루고 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와 고독이라는 청춘의 병을 치명적인 아름다움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인생 후반에 내려지는 축복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제2의 사춘기라는 이름이다. 다시 한 번 적극적으로 흔들려 볼 수 있는 시기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제각기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누구나 인간이 되라고 던진 자연의 내던짐이다.” 이 말은 인생 후반을 맞은 이들에게 울림으로 다가갈 것이다.
 
『데미안』에 의하면 “세상을 인위적으로 반으로 나눈 다음 공식적으로 인정한 절반만을 존중할 게 아니라 세계 전체를 존중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새는 힘겹게 투쟁해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밑줄을 몇 번이나 그었고, 노트로 옮겨 적었던 구절이다. 
 
알은 세계다. [사진 freepik]

알은 세계다. [사진 freepik]

 
『데미안』은 인생 후반에 다시 접목하여 읽기에 매우 구체적이고 탐미적인 소설이다. 융은 이 소설을 ‘폭풍우 치는 밤 등대의 불빛’이라고 표현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인생 후반에 다가올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근거림이 다시 살아난다. 
 
50년 이상 인생의 고민과 체험, 성공과 실패, 사랑과 배신으로 다져진 우리는 두 세계를 어떻게 통합해야 할까? 고독하고 혼란스러운 통합의 과정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알을 깨고 진정한 자신(The self)을 만나는 길로 들어서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그것이 곧 진정한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다.
 
[사진 pixabay]

[사진 pixabay]

 

한순 도서출판 나무생각 대표 tree3339@hanmail.net  
      
    

[제작 현예슬]



[중앙일보] 입력 2017.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