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 전야, 방송국이 보이는 상암동 카페에서 이승우 소설 '사랑의 생애'를 읽었다. 밤길을 걷는데 팔 위로 스산한 가을 느낌이 들었다. 귀뚜라미 소리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계절이 바뀌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 어째서 매번 슬픔이 차오르는 걸까. 아무래도 '자연스럽다'는 말의 진의를 알아챌 만큼의 나이에 도착한 탓이다. 이제 내게 자연스럽다는 말은 나이가 들면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는 것, 사람도 사랑도 늙어간다는 것, 누구나 만나면 헤어진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에겐 펠리체 바우어란 여자가 있었다. 보험 회사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던 카프카는 세 번 약혼하고 세 번 파혼했는데, 약혼과 파혼 두 번은 모두 그녀와 했다. 그의 일기장에는 그러나 모순처럼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에겐 펠리체 바우어란 여자가 있었다. 보험 회사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던 카프카는 세 번 약혼하고 세 번 파혼했는데, 약혼과 파혼 두 번은 모두 그녀와 했다. 그의 일기장에는 그러나 모순처럼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녀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녀와 함께 살 수도 없다!
"사랑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사랑에 대해 더 진지하다. 더 진지하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함부로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시도하지 못한다. 함부로 하는 것은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함으로써 모독하느니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두려움은 멸시가 아니라 공경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싫기 때문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경하기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나는 이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카프카가 아닌 펠리체 바우어를 떠올렸다. 거절당하는 순간, 그것도 다시 한 번 거부당하는 순간 그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는 끝내 사랑을 믿지 못했던 한 남자에게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헤아렸다. 작가는 소설에서 감정을 다루기 어려운 생선 가시로 비유하며 "생선 가시를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생선을 만지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생선을 만지지 않고 생선 요리를 할 수 없듯, 감정을 만지는 게 힘든 사람은 사랑에 접근하지 못한다.
이승우의 소설이 3년 전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대학 후배에게 다시 사랑을 느낀 남자 이야기라는 건 의미심장했다. 사랑할 자격이 없음을 강조한 그 남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작가는 이것이 바로 '사랑이 저지른 짓'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갖춰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올 때 당신은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와서 당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이 들어오기 전에는 누구나 사랑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어떤 사람도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총이나 구원이 그런 것처럼 사랑은 자격의 문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3년이 지나고 이미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된 후배 선희가 시차가 어긋난 고백을 받고 했던 말은 무엇일까. 그녀에겐 이미 사랑하는 남자 영석이 있었다. 무엇보다 영석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선희에게 무섭도록 열중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한 번도 사랑해본 적 없는 이 남자에게 선희는 선물처럼 내려온 기적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만 존재하던 에덴동산에 제3자인 뱀이 개입한다. 두 사람의 연애에 다른 한 사람이 개입하면 사랑은 삼각관계를 형성하며 붕괴한다. 사랑이 죽음처럼 강한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의 위대함을 의미한다기보다, 질투의 물불 안 가리는 치명적 성격에 대한 경고로 이해하는 쪽이 훨씬 실용적이다.
"질투하는 사람은 결코 실체를 보지 못한다. 그는 자세히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왜냐하면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없는 것, 들여다보면 안 되는 것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지나치게 배율이 높은 자기 내부의 현미경을 통해 영석이 본 것은 선희가 아니었다. … 질투하는 사람이 질투하는 대상은 실체가 아니라 그 또는 그녀가 상상하고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그러나 허상이기 때문에 꿈쩍하지 않고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에 외부 존재의 조종을 받지 않는다. 허상은 견고하다. 그는 불안이 현실화된 것에 좌절하고, 어쩔 줄 몰라서 소리 지르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운다."
작가의 말처럼 "질투는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그가 느끼는 약점의 크기"를 나타낸다. 사랑해서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 때문에 질투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처럼 영석은 스스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마침내 의심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에겐 이 기회를 피할 능력이 없다. 그가 가진 유일한 자원이 한 여자의 사랑뿐일 때, 그는 불가피하게 질투의 화신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랑이 괴로운 건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이 가지고 싶은 게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걸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랑이 시작되면 우리는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걸 모르게 된다. 잘 알다가도 갑자기 모르게 된다. 작가 말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은 그걸 모르는(모르게 된) 사람이다.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왜 하나같이 '모르는 사람' 혹은 '모르게 된 사람'이 되어 헤매야 할까. 어째서 합리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던 그녀는 사랑 앞에서 그토록 의존적인 사람이 되어 괴로워할까. 어째서 그는 다가오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가오는 걸까. 작가의 말처럼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만이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걸까.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정의되지 않는 것이 신이고 삶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작가 말이 옳다. 삶은 '사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매번 또 다른 사랑의 정의를 읽으며 안심한다. 우리가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이야기는 계속 쌓여갈 것이다. 불 켜진 방송국을 바라보며 오늘 사랑에 대한 정의 하나를 추가했다. 삶에 대해서도 그렇듯, 사랑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사랑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사랑에 대해 더 진지하다. 더 진지하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함부로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시도하지 못한다. 함부로 하는 것은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함으로써 모독하느니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두려움은 멸시가 아니라 공경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싫기 때문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경하기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나는 이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카프카가 아닌 펠리체 바우어를 떠올렸다. 거절당하는 순간, 그것도 다시 한 번 거부당하는 순간 그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는 끝내 사랑을 믿지 못했던 한 남자에게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헤아렸다. 작가는 소설에서 감정을 다루기 어려운 생선 가시로 비유하며 "생선 가시를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생선을 만지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생선을 만지지 않고 생선 요리를 할 수 없듯, 감정을 만지는 게 힘든 사람은 사랑에 접근하지 못한다.
이승우의 소설이 3년 전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대학 후배에게 다시 사랑을 느낀 남자 이야기라는 건 의미심장했다. 사랑할 자격이 없음을 강조한 그 남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작가는 이것이 바로 '사랑이 저지른 짓'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갖춰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올 때 당신은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와서 당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이 들어오기 전에는 누구나 사랑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어떤 사람도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총이나 구원이 그런 것처럼 사랑은 자격의 문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3년이 지나고 이미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된 후배 선희가 시차가 어긋난 고백을 받고 했던 말은 무엇일까. 그녀에겐 이미 사랑하는 남자 영석이 있었다. 무엇보다 영석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선희에게 무섭도록 열중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한 번도 사랑해본 적 없는 이 남자에게 선희는 선물처럼 내려온 기적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만 존재하던 에덴동산에 제3자인 뱀이 개입한다. 두 사람의 연애에 다른 한 사람이 개입하면 사랑은 삼각관계를 형성하며 붕괴한다. 사랑이 죽음처럼 강한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의 위대함을 의미한다기보다, 질투의 물불 안 가리는 치명적 성격에 대한 경고로 이해하는 쪽이 훨씬 실용적이다.
"질투하는 사람은 결코 실체를 보지 못한다. 그는 자세히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왜냐하면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없는 것, 들여다보면 안 되는 것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지나치게 배율이 높은 자기 내부의 현미경을 통해 영석이 본 것은 선희가 아니었다. … 질투하는 사람이 질투하는 대상은 실체가 아니라 그 또는 그녀가 상상하고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그러나 허상이기 때문에 꿈쩍하지 않고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에 외부 존재의 조종을 받지 않는다. 허상은 견고하다. 그는 불안이 현실화된 것에 좌절하고, 어쩔 줄 몰라서 소리 지르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운다."
작가의 말처럼 "질투는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그가 느끼는 약점의 크기"를 나타낸다. 사랑해서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 때문에 질투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처럼 영석은 스스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마침내 의심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에겐 이 기회를 피할 능력이 없다. 그가 가진 유일한 자원이 한 여자의 사랑뿐일 때, 그는 불가피하게 질투의 화신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랑이 괴로운 건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이 가지고 싶은 게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걸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랑이 시작되면 우리는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걸 모르게 된다. 잘 알다가도 갑자기 모르게 된다. 작가 말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은 그걸 모르는(모르게 된) 사람이다.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왜 하나같이 '모르는 사람' 혹은 '모르게 된 사람'이 되어 헤매야 할까. 어째서 합리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던 그녀는 사랑 앞에서 그토록 의존적인 사람이 되어 괴로워할까. 어째서 그는 다가오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가오는 걸까. 작가의 말처럼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만이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걸까.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정의되지 않는 것이 신이고 삶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작가 말이 옳다. 삶은 '사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매번 또 다른 사랑의 정의를 읽으며 안심한다. 우리가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이야기는 계속 쌓여갈 것이다. 불 켜진 방송국을 바라보며 오늘 사랑에 대한 정의 하나를 추가했다. 삶에 대해서도 그렇듯, 사랑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사랑의 생애 - 이승우의 소설
조선일보 백영옥·소설가 입력 : 2017.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