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소를 타고 동쪽에서 오는 백발노인
▶ 나이 150살 때 아랍으로 간 사람
노자는 주나라의 정치 타락을 비관하여, 먼 곳으로 떠날 결심을 했다. 그가 가고자 했던 곳은 아랍지역(서역)이었다. 몇 살 때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태어날 때부터 81세였던 걸 감안하면 150살쯤 살았을 때가 아닐까 싶다.
그때까지 노자는 제자를 육성해 뜻을 전수한 흔적도 없고, 삶의 행적도 뚜렷하지 않다. 조물주 스타일의 정치를 가슴 속에 품었던 철학자인만큼 현실 정치 속에 뛰어들어 콩 놔라 배 놔라 할 사람도 아니었을 것이다. 말은 안했지만, 공천이니 계파니 배신이니 하는 정치타령을 무수히 들었을 것이니 신물이 났을 것이다.
왜 하필 아랍이었던가.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를 '접속'했던 우주인인 만큼, 노자는 세계의 넓이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진리가 진실로 모든 것에 틀림없이 통하는지를 살펴보고 싶었을 겄이다.
그는 서쪽의 진나라를 지나, 국경 검문소가 있는 함곡관을 지나간다. 두 골짜기 사이에 상자처럼 움폭 패인 고개에 세워진 관문이었는데, 이곳의 검문소장은 윤희였다. 윤희 또한 그 오지에서 정신수련과 학문정진에 힘써 상당한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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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타고 다닌 노자. |
어느 날 아침 나절 멀리 동쪽에서 푸른 소를 타고 오는 백발노인이 있었다. 햇살을 받는 등뒤에선 적보랏빛 아우라가 환하게 아른거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윤희는 뭔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끼고 그에게 나아가 큰 절을 한다. 그는 노인에게 크게 대접을 한 뒤, 이 어지러운 세상을 밝힐 몇 말씀을 남겨달라고 간청을 한다. 노인은 대접도 대접이거니와 괜히 청을 거절했다간 여권 발급을 거부하는 사태가 빚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 내가 이 땅을 위해 뭔가 몇 마디 해주고 가야하긴 하겠다.
윤희가 내미는 대나무 조각에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가다보니 오천 글자가 되었다. 며칠이 흘렀는지 몰랐다. 그간 윤희는 노자의 글을 받아들고는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거대하고 치밀하면서도 작위적인 데가 없는 자연스런 문장이 누에의 고치실처럼 이어져나오는 게 아닌가. 도경과 덕경 81장이 다 씌어지고 노자가 다시 여장을 챙길 때, 윤희가 관직을 팽개치고 그를 스승으로 모시며 수행하겠다며 따른다. 노자는 푸른 소, 윤희는 흰 소를 타고, 멀리 서역의 사막을 향해 떠났다.
▶ 도덕경 마니아였던 톨스토이와 하이데거
두 사람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역사상 둘의 자취는 사라진 것 같다. 1788년 영국의 천주교인이 중국에 왔다가 노자의 책을 들고 돌아갔다. 이후 유럽에는 도덕경신드롬이 일었다. 로마의 보체 신부는 이 책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1828-1910)는 동양사상에 심취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출판업자가, 톨스토이에게 물었다. "당신의 생과 문학에 가장 영향을 끼친 이는 누구입니까?" 그때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공자와 맹자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노자에게 받은 영향은 그보다 훨씬 거대했다." 러시아에서 도덕경을 퍼뜨린 사람은 톨스토이였다.
노자에 미친 또 하나의 사상가는 독일의 하이데거(1889-1976)였다. 그는 유럽에서는 튀는 철학자였지만, 동양에서 보자면 매우 상식적인 지식인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서양의 존재론 사이에서 '없음'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이었다. 하이데거는 도덕경 11장의 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유지이위리, 무지이위용)이란 구절에 '뻑' 갔다. 이 말을 풀면 '있음이 가치가 있는 것은, 없음이 어떤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란 의미다.
컵 둘레의 '있음'이 가치가 있는 것은 그 안의 '없음'이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문이 '열릴 수 있음'이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열리지 않음(닫힘)'이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방의 사방 벽이 가치가 있는 것은 그 안의 빈 곳(없음)이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마차의 바퀴테두리와 살이 가치가 있는 것은, 테두리 사이의 빈곳이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근무가 가치가 있는 것은, 주말의 쉼이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입 속이 꽉 차 있다면 음식을 먹을 수 없다. 방을 넓히는 방법은 집은 큰 것으로 갈아치우는 방법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쉬운 것이 방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치워 비우는 일이다. 이런 사례들이 말하는 중요한 착안은 바로 '없음의 효용'이다. 소용없어 보이는 것에 큰 소용이 숨어있다. 무(無) 속에 유(有)가 들어있다는 통찰에 하이데거는 유레카를 외쳤다.
하이데거가 서재 벽에다 붙여놓은 것도 노자의 글귀였다. 15장에 나오는 두 구절이다.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動之徐生
(숙능탁이정지서청 숙능안이구동지서생)
나는 하이데거가 어떻게 저 구절을 제대로 이해했는지가 더 놀랍다. 저 말은 도덕경 속에 100년쯤 살아야 체득할 수 있는 수준의 '우주관 겸 정치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아느냐고? 내가 뭘 알겠는가? 맹인모상으로 알음질을 해보는 것이다.
"누가 할 수 있겠는가, 탁한 것을 고요함으로 천천히 맑게 만드는 것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죽은 것을 오래 꼬물거리게 해서 서서히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을"
▶ 조물주에게 길을 묻다
노자는 이것은 누가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지만, 사실은 조물주가 시범으로 매년 보여주시는 사업이다. 가을이 되면 봄 여름의 무성한 생명이 일궈놓은 탁한 것들을 고요하게 만들면서 깨끗하게 정리를 한다. 봄이 되면 다 죽은 것 같은 것에 빛을 비추고 물기를 흘려 천천히 생명을 탄생시킨다. 세상의 생태계가 사계절을 사이클로 하여 돌아갈 수 있도록 해놓은 조물주는,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이다.
언제 하느님이 봄마다 나서서 꽃 육성사업을 벌이는 것을 본 적 있는가. 가을에 잎사귀 떨어뜨리기 운동을 한 적이 있던가. 그렇지만 아무 형상도 없는 그 무엇에서 만물을 움직이는 거대한 리더십이 나온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번잡과 소란을 진정시키고, 또 힘이 빠진 세상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불어넣어 생기를 회생시키는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노자는 그것을 세상에 물었고, 하이데거는 그것을 '무'가 만들어내는 위대한 권능으로 이해했다.
▶ 짜라투스트라와 노자
노자가 아랍으로 갔던 그 시절, 그곳에는 고대 페르시아제국이 번성하고 있었다. 그곳의 아케메네스 왕조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유일신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왕국의 종교로 채택하고 있었다. 조로아스터는 짜라투스트라와 같은 사람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아후라 마즈다라는 지혜의 신을 신봉했다. 이 종교를 배화교라고도 불렀는데, 그것을 리추얼 때 불꽃이나 타는 냄새를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주가 선과 악으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했으며, 기존의 신들을 통합해서 아후라 마즈다 밑에 두어 신앙체계를 새롭게 정리했다. 노자와 윤희는 페르시아까지 갔을까. 그곳에서 저 신앙에 대해 어떤 의견을 내놨을까. 우주선악설의 신화적 철학에 머문 그들에게, 현대과학과 의미심장한 일치점을 지닌 노자우주론이 스며들 수 있었을까. 짜라투스트라 시절에 노자가 그곳을 향해 갔다고 하니, 기묘한 흥분이 생겨나지 않는가.
▶ 왜 도덕경을 읽어야 하는가
스무살에도 읽었고 마흔살에도 읽었고 지금도 읽는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늘 모르겠다. 이 책은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 무엇인가를 깨려고 하는 것 같다.
그가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 말보다 크고 말보다 작으며 말보다 예민하며 말보다 흐릿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도덕경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겠다고, 그 교훈 속에서 내 삶의 등대를 발견하겠다고, 행간을 수색하며 불을 켜던 눈들은 모두 무위로 돌아간 것 같다. 응당 그것이 있을만한 곳이, 사실은 인간이 그동안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방해해온 함정이었다는 인식이 문득 찾아왔을 때, 이 말씀의 행렬은 내게 마음이 들어가서 숨쉴 수 있는 여지를 내주었던가. 모르겠다.
도덕경에는 도덕이 없다. 도덕을 찾아나섰던 많은 이들은 도경과 덕경이 합쳐져 생겨난 이름인 것을 알고 황당해 한다. 도와 덕을 합친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도덕이 되는 것도 아니다. 12년전에 낸 <옛공부의 즐거움>에는 '도덕경 비밀클럽'이란 글이 들어있다. 도덕경의 많은 구절들이 이 땅의 지식인들과 예술가의 언어와 사념 속에 얼마나 깊숙이 스며들었는가를 좌충우돌로 분석한 가벼운 글이다. 옛글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입증하려고 나름으로 용을 쓰며 풀어낸 것인데 졸렬함을 면치 못한 우스개일 뿐이다. 도덕경이 수많은 지식인들의 변주를 통해 우리 마음의 일부, 우리 견해의 일부가 되어있다는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린 도덕경의 행간 속에서 살고 있으며 도덕경의 관점의 끝을 잡고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 시인 송욱과 임어당이 꼽은 최고의 책은 도덕경
몇 권의 도덕경 중에서 오강남 선생이 펴낸 현암사 도덕경을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자주 읽는데, 그 머리말엔 잊지 못할 얘기가 몇 개 있다.
1980년에 돌아가신 서울대 영문과 교수이자 시인인 송욱은 작고 직전에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했는데, 자신의 수천 권의 장서 중에서 딱 한권만 꼽으라면 도덕경의 주석을 모은 책인 '노자익'을 택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성과 감수성으로 한 시대를 아로새긴 그가 다른 책을 다 버리고 이것 한 권만을 택한 건 어떤 의미였을까. 이 책이 숨긴 무한한 영감의 원천을 그가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덕경은 모든 지식을 버리고, 모든 수식어를 버리고, 모든 삶의 너울들을 버리고난 뒤, 이윽고 찾아나선 모태의 자리같은 것이라고 나는 믿어왔다. 이 책은 모든 책들의 고향이며 사유들의 시작이며 꿈들이 피어나는 계곡같은 것이다.
임어당도 동양의 글 중에서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고 말했고, 도덕경을 영문으로 번역한 진영첩은 "도덕경이 없었다면 중국인의 성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헤겔이나 하이데거도 이 책에 심취했다는 오강남 선생의 머리말을 읽으면서 나는 '책의 책'이라는 개념을 마음 속에 심었던 것 같다.
▶ 말해지지 않은 것을 더듬거리며 말하기
수많은 책들이 목표로 해온 '뭔가 말하기'가 담겨있는 게 아니라, '말해지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한 어눌한 혀의 분투가 들어있는 책에 가깝다. 나는 더 나이 들어서도 이 책을 읽고 있음에 틀림없겠지만, 이 즈음에 한번, 내 방식대로 노자라는 분과 미팅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않으면 그냥 지나친 사람만 될 거 같아, 섭섭한 기분이 들까 싶어 저지르는 우행이다. 그래도 좋다. 읽으며 더 캄캄해지는 독서를 한번 더 나아가 보리라.
도는 도일수 있지만 항상 '도'인 것은 아니며
명칭은 명칭일 수 있지만 같은 명칭인 건 아니다
하늘과 땅이 시작할 때는 명칭이 없었고
만물이 생겨나면서 명칭이 생겨났다
그렇기에 욕망이 없던 때는 그 묘(妙, 근원적인 것)를 볼 수 있었고
욕망이 생겨난 때는 그 요(?, 현상적인 것)를 볼 수 있었다
이 두 가지는 같은 데서 생겨나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둘 다 현(玄, 신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모든 근원적인 것들로 들어가는 문이다
도덕경 제1장 '도가도'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
此兩者同出 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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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원적인 것 = 도, 현상적인 것 = 명칭
도와 명칭(이름)을 맨먼저 거론한 까닭은, 근원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을 나눠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도는 원천적인 것이며 명칭은 현상적인 것이다.
도는 하늘과 땅이 시작할 때 있었던 것이며 명칭은 사물이 생겨날 때 함께 생겨난 것이다. 하늘과 땅이 시작할 때엔, 생명이 지니고 있는 욕망(즉, 生意)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땐 원천적인 것이 저절로 유통되고 소통되었다. 그때 도가 있었던 것이다.
생명이 저마다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원천적인 것은 감춰지고 그 현상적인 것들이 유통되고 소통되었다. 그때 만물을 구분하는 분별의 상징인 명칭이 생겨난 것이다.
사실 근원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은 동일한 것의 양면일 뿐이다. 둘 다 조물주가 지닌 뜻인 신비함을 가지고 있다.
근원에도 조물주의 뜻이 있고 현상에도 조물주의 뜻이 있다면, 현상을 보면서도 근원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명칭으로 드러난 사물의 세상에서 우리가 근원적인 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도덕경 제1장이 말하고자 하는 교과과정 전체소개이다. 한 글자도 허투루 쓰인 말이 없다.
▶ 도가도(道可道)의 충격
도가도(道可道)가 대체 무슨 뜻인가.
앞의 도는 수행이나 진리나 방법(way)으로 해석하고, 뒤의 도는 '말하다'라는 뜻으로 푸는 이가 있다. 도(道)가 말하다는 뜻으로 쓰인 용례를 들어보이며 설득력을 높이려 한다.
노자가 자신이 해야할 첫말을 하면서 도(道)라는 한 글자를 이렇게 다른 의미로 쓸 만큼 말솜씨를 부리려고 했을까. 도덕경은 시에 가깝기에 일상으로 쓰는 말들 중에서 생략해도 알 수 있는 것은 줄여서 간명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도가도는 도이가왈도(道以可曰道) 정도의 문장으로, '도는 도일 수(도로 불릴 수) 있다'라는 의미로 충분하다. 이 문장의 핵심은 앞의 도와 뒤의 도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자는 왜 이 말부터 했을까.
도(道)라는 말은, 노자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길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면서 그 길을 은유로 표현한 무엇을 동시에 가리키는 말이다. 구체적인 대상으로 생각해보는 게 쉬울지 모른다.
"길은 길일 수 있다" 즉 하나의 길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길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말을 더 분명히 하면 '도불가도(道不可道)이다. 길이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 당신이 알고 있는 도는 도가 아닐 수 있다는 말
노자의 첫마디는 '도는 도일 수 있다'이지만, 뒤집으면 '도가 도 아닐 수 있다'는 비평적 발언이다.
세상에 도라는 말이 흔하지만 그 말들이 진짜 도를 품고 있는 게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도라는 이름을 쓴다고 도가 되는 건 아니란 얘기다. 왜냐하면 도는 말로 규정되고 고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길을 묻는 사람에게 노자는 말한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에게서 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죠? 그 사람들이 그걸 도라고 말한다고 진짜 도는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도라고 표현한다고 그게 늘 도인 것은 아닙니다. 말과 도가 언제나 일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내겐 무한한 감동이었다. 관성적 생각을 깨고 개념의 너울들을 헤치고 들어가 그 속에 본질로 존재하는 무엇을 들여다보게 해준 명언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도라고 생각했던 그것부터 의심하라. 그건 도일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도라고 불려진 그것과 도의 진면목이 항상 일치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시의 사상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도의 근원성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적 언급에 가까울 것이다.
도는 인간의 지각과 지식과 지혜가 깨달았다고 믿는 그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이며 더 가까운 것이다. 노자는 이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도가도'는 나의 지식과 나의 언어와 나의 인식을 뒤흔들면서, 본질에 대한 깊은 갈증을 이끌어냈다. 이른바 '도덕경적인 목마름'이다.
▶ 꽃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엔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無名)/그는 다만(天地)/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之始)/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有名)/그는 나에게로 와서(萬物)/꽃이 되었다.(之母)
김춘수의 '꽃'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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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마치 도덕경 제 1장의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를 직역한 것처럼 정확하게 상응한다.
'그는 다만 …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바로 아직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 태동기의 카오스를 의미한다. '그는 다만'이 왜 '천지'와 같은 개념인가. 이때의 천지는 '분화되지 않은 우주'인데, 진짜 만물이 분화되지 않은 게 아니고 인간의 인식과 분별 속에 분화되지 않은 우주를 말한다. 이것이 서양 과학의 카오스와 노자의 카오스가 달라지는 지점이다. '다만'이란 말은 분별되기 이전의 우주를 표현하는 기막힌 낱말이 아닌가. 아직도 무엇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비로소) 나에게로 와서 …이 되었다'는 것은 분별과 인식의 세계인 문명세계로 접어든 것을 뜻한다. '나에게로 와서'가 왜 '만물'로 치환될 수 있을까. 나에게로 온다는 것은 내 인식세계로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인식세계 속에 들어와야 만물은 만물이 될 수 있다. 들어오지 않은 것은 카오스상태로 있는 것이다.
몸짓은 시(始)의 놀라운 번역이다. '시(始)'는 여자의 몸에 남자의 정자가 막 결합하기 직전의 결정적 순간을 뜻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어떤 몸짓의 기미와 일치하지 않는가. '그는 나에게로 와서'라는 말은 성적 결합의 암시이다. 내가 그것의 이름을 꽃이라고 불렀을 때, 나라는 인간과 이름없던 저 붉은 것은 마치 섹스를 하듯 서로 결합해 '꽃'이라는 것을 낳는다. 꽃을 낳았으니 꽃의 어머니이다.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만물의 어머니'이고 김춘수가 말하는 '꽃의 탄생비밀'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天下有始 以爲天下母)/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旣得其母)/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復知其子)/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旣知其子 旣得其母 沒身不殆)
김춘수의 '꽃'의 일부
이 구절은 노자의 주장들이 무르익는 도덕경 제52장의 구절들을 빼다박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은 천하가 시작된 비밀인데, '꽃이라고 호명함으로써 비로소 꽃을 낳아 만물의 시작을 이룬 것처럼'이란 의미이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이란 말은 '내가 낳은 꽃에 알맞는'이란 뜻이다. 꽃의 빛깔과 꽃의 향기를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어머니의 격(格)을 얻을 수 있다.
[도덕경 비밀클럽③]현상적인 것을 절대가치로 삼지마라
제2장 천하개지미(天下皆知美), 아름다움과 착함의 가치를 습격하다
하늘아래 모두가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지만
이는 미운 것일 수 있다
모두가 착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착한 것이라지만
이는 착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없음과 있음은 서로를 생겨나게 하며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완성하게 하는 것이며
길고 짧음은 서로의 형태를 보완하는 것이며
높고 낮음은 서로에게 기울어지는 것이며
목소리와 악기소리는 서로 화음을 이루는 것이며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조물주를 닮은 사람은
일하지 않은 듯 일을 처리하고
가르치지 않은 듯 가르침을 행하고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만들었으면서도 표현하지 않고
생겨나게 했으면서도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했으면서도 티내지 않고
공을 이뤘으면서도 이룬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결코 집착하지 않기에 그것을 놔버린 적도 없다.
--- 도덕경 제2장 天下皆知美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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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 주나라 유왕의 왕후였던 미인 포사. |
▶ 현상적인 것을 절대가치로 삼지마라
제1장에서 노자는 근원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이 함께 조물주의 뜻을 품고 있다고 말한 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현상적인 것에 대한 인식체계를 흔든다. 현상적인 것이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현상적인 것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우리가 근원적인 것을 놓치는 이유라는 것을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기습적인 방식으로 바로 공격에 들어간다. 자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그러면 누구누구요. 라고 자기가 아는 예쁜 여자를 거명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묻는다. 그 여자가 그 여자보다 훨씬 더 예쁜 모씨보다도 더 예쁜가? 아니 그렇지는 않네요. 이런 대화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쁘다고 하는 것, 착하다고 하는 것은 다만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그렇게 묻지 않았을지 모른다. 자네 그 여자가 왜 예쁘다고 생각하나? 우선 예쁘게 생겼고 조물조물 시원스럽게 생겼고 키도 적당하고 몸무게도 알맞고 목소리도 곱고 태도도 상냥해서 예쁩니다.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미추와 장단과 경중과 전후와 음성까지 모두가 상대적인 것이니, 그것은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언제든지 허물어질 수 있는 경계를 오가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세상 만물이 상대적인 가치 위에 있는 것일 뿐인데,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아름답다거나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세상만물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네.
노자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 속에 숨어있는 상대성을 열거한다. 있는 것이 아름답고 없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없어야 있는 게 생겨날 수 있다. 있어야 사라질 수 있다. 어느 게 낫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어려움은 좋고 쉬움은 나쁘다? 그렇지 않다. 길고 짧음과 높고 낮음도 그렇다.
▶ 100% 아름다움이나 100% 착함은 뭔가 잘못된 게 숨어있다
이런 방식으로 풀어낼 경우, 노자는 세상의 상식적인 인식의 허점을 꼬집으며 자신의 논리를 펼쳐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다른 의미로 읽힐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100%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100% 맹신 자체가 추악함이나 불미스러움이라는 관점이다. 이에 덧붙여 100% 선한 것 또한 있을 수 없으며 그런 것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왜 그럴까. 자연 혹은 조물주는 세상의 존재를, 불완전 속에서 보완하면서 서로를 완성해가도록, 프로그램을 짜놓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사상에 대한 반격이다. 즉 아름다운 것과 착한 것이라는 '가치'를 강조하고 과장해 세상사람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바꾸려고 하는, 공자와 같은 사상가들이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임의적으로 어떤 가치를 내세워 세상을 그것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려고 하는 노력은 추악하며 나쁘다는 비판이다.
조물주는 작위적인 뭔가를 하지 않고 굳이 논리로서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사물이 이미 상대적인 짝이 있어 서로 뭔가 하고 있고 서로를 말없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만물을 만들어 움직이게 했으면서도 아무 것도 안한 것처럼 자연을 그대로 둔다. 소유하지도 않고 티내지도 않고 그것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한번도 이 자연 속에 들어있는 '도(道)'에서 떠난 적도 없고 벗어난 적도 없다.
상대적인 것이 저절로 움직이는 그 속에 도가 있으며, 어떤 특징이나 가치를 결코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놔둔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물들의 상대성과 상보성이 스스로 자연을 조절하며 세계를 꾸려가도록 생태계를 기획해놓았다는 뜻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하는' 도의 법칙(섭리)으로 자연 속에 스며들어있다는 게 노자의 주장이다.
▶ 아름다운 여자는 왜 아름답지 않는가
제1장에서 인간의 뇌리에 서로 단단히 붙어있었던 명칭(名)과 근원(道)을 떼어 생각하게 한 노자는 역사를 근원의 시대와 명칭의 시대로 나눈다. 명칭의 시대가 본질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상황에 대해 일깨운다. 문화나 문명이라고 불리는 것은 '명칭의 시대'와 같은 말이다.
만물은 이름으로 인식되고 이름은 바로 본질과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이 아니기에 본질이 오히려 가려지고 등한시되는 결과를 낳았다. 명칭의 시대에 근원의 본질을 찾는 방법은 명칭에 구애받지 않고 근원에 주목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름이 없던 시대에 옛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생각의 기틀에 일대충격을 준 노자는 바로 개념이 이룬 가치체계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제2장이다. 먼저 거론한 것이 감각적으로 확인하기 쉬운 미(美)의 문제다. 아름다운 것은 진짜 아름다운 것인가.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노자는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추하다는 개념이 없다면 아름다움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들로만 되어 있다면 그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절대적인 것에 가까운 아름다움을 상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인간이 아름다움에 압도당한 상황을 말한 것이지 추함이라는 상대적인 가치를 전제하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은 젊은 날의 질풍노도를 만들어내는 기폭제다.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과 빛나는 피부, 눈부신 신체의 굴곡들이 자아내는 아우라는 이것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석할 틈도 없이 한 영혼에 들이닥쳐 아름다움의 전형으로 새겨진다. 한 여인의 형언할 수 없는 표정과 우수의 눈빛, 한 가닥의 엷은 웃음이 일으키는 빅뱅은 아름다움의 절대성을 신봉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육체의 아름다움은 잠정적이고 한시적이며 지속 불가능한 불안한 어떤 상태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그 절대적인 미의 여신들이 가차 없이 늙어가는 것을 보며 깨닫는다. 늙어가는 자신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미는 그런 주인을 배신하고 하나씩 패를 뒤집어 추(醜)를 보여준다. 세상 모두가 미를 미라고 알고 있지만, 이에는 이미 추악이 숨어있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노자다.
▶ 절세미인 경국지색은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아름다움에는 추악함이 있다. 추악함이 있기에 아름다움이 있다. 추악함과 아름다움이란 상반되는 개념이 서로를 길항하는 개념이 가치의 실체이다. 아름다움이란 가치를 예찬하는 것은 추악함에 대한 두려움이나 기피를 숨기고 있을 뿐이다. 미추는 조물주가 프로그램화해놓은 감각의 상태를 말하는 것일뿐애며, 따라서 미가 절대불변의 가치일 수 없다는 얘기다.
가만히 살펴보면 아름다운 것은 대개 생명에 가깝고 추한 것은 죽음에 가깝다. 인간이 죽음을 회피하고 생기를 증대하려는 무의식이 이런 가치를 조장한다고 볼 수 있다. 노자가 미에 대한 가치 교정부터 나선 까닭은 가장 이해하기 쉽고 충격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쁜 여성을 예를 들고, 그녀도 역시 추악함과 끊임없이 다퉈야 하는 잠정적인 존재일 뿐이라고 쐐기를 박는다.
노자는 미와 대립된 개념으로 추(醜)를 쓰지 않고 악(惡)을 쓰고 있다. 두번째 구절에는 바로 선이 나오는데 미추와 선악을 세트로 썼으면 좋았을 법 한데, 왜 미악(美惡)과 선불선(線不善)으로 맞세웠을까.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배치했을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는 아름다움이 지닌 악함을 내세워 설득력을 높이려 했던 것 같다. 공자와 노자가 살던 시대 이전의 중국 고대국가 하나라의 걸왕을 보라. 말희가 망치지 않았던가. 은나라 주왕을 녹인 달기, 주나라 유왕이 푹 빠졌던 포사, 그리고 춘추전국시대 여희는 모두 경국지색의 악녀로 손꼽혔다. 그리고 도탄에 빠진 백성의 증오대상이었다.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으로 떠받들던 그녀들이 결국은 악(惡)과 증오(憎惡)대상이 아니었던가. 노자가 미와 악을 병치한 건 그런 역사적 교훈을 읽었기 때문이다.
▶ 권선징악을 비웃다
노자는 이쯤에서 '선(善)'의 문제를 꺼낸다. 그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 대목이다. 당시 선을 부르짖고 다녔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바로 공자이다. 공자의 논지를 흔드는 상대적 가치론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공자는 '춘추'라는 역사책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다. 이 책은 주대(周代) 노나라를 중심으로 기록한 242년의 역사서이다. 사관들이 편년체로 기록해놓은 것을 공자가 자신의 윤리적 관점으로 편집한 책이다. 공자시대의 좌구명이란 사람이 주석을 달아 펴낸 것이 '춘추좌씨전'인데 이 책은 '악은 징벌하고 선은 권한다(勸善懲惡), 성인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편집할 수 있었겠는가"라며 공자를 예찬한다.
춘추좌씨전이 나온 이후 '권선징악'이란 말은 하나의 유행어가 되었다. 춘추의 편집자 공자는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하라는 정언명령을 내린 위대한 아이콘이 된다. 공자가 인간을 넘어 성인으로 추앙받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바로 춘추좌씨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자의 도덕역사서에 감격하고 있을 때 "그건 헛소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게 노자다. 그토록 단호하게 선을 권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노자는 공자 주장의 허점을 파고든다. 그는 권선징악론이 지닌 기계적인 잣대를 슬쩍 허물어뜨린다. "모두가 선을 선이라고 알고 있지만 여기엔 불선(不善)이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선하지 않음이 세상에 넘치기에 선을 권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다. 선을 권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은 이미 세상이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그 사람이 선한 얘기를 한다고 좋아라 하지만 사실은 선하지 않은 세상을 그가 이미 전제하고 있기에 그것을 가치로 세일즈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공자로선 정말 듣기 싫은 시비였을지도 모른다.
선함과 선하지 않음은 상대적인 개념이며 세상이 구분해놓은 가치일 뿐이다. 선한 것을 권한다고 반드시 선해지지 않으며 악한 것을 징벌한다고 악함이 제대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조물주가 이미 그 상대적인 양상을 모두 준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이 예찬하고 강요한다고 선한 세상이 되지는 않으니, 그 그늘과 이면까지를 생각해야 무리한 권선징악이 낳을 수 있는 폐단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가치로 세상을 한 줄로 세우려는 기획은 세상을 편안하게 하지 않는다는 걸, 우린 역사를 통해 자주 깨달았다. 어떤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강제와 폭력이 발생하고 다양한 삶의 양식과 개별적인 주체의 선택을 무히사고 일사불란하게 사람들을 제어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것도 경험을 통해 배워왔다.
그러면서 노자는 우주를 이루는 상보적인 존재양상을 죽 나열한다. 유무, 난이,장단,고저,음성,전후의 상대성을 보여주면서 선과 악이 하나의 모체에서 나온 양립하는 문제임을 설득한다. 악을 때려잡고 선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도덕전쟁을 벌이는 것이 세상을 경영하는 옳은 방식이 아니며 선과 악이 병존하며 길항하는 특성을 잘 파악해 자연스러움의 정도에서 그치도록 세심하게 조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역설이다. '서로 다른 가치를 존중하라." 이런 캐치프레이즈다.
▶ 공자의 '성인'과는 다른 노자의 '성인'
가치의 양면성을 강조하고 다른 가치를 억압하는 것이 세상만물의 질서를 위배하는 것이라는 논지의 말을 한 뒤 노자는 '성인'이란 존재를 불쑥 들이민다. 공자는 유학자적인 전범을 보인 옛사람을 성인이라고 불렀다. 당시의 상식으로 성인은 당연히 유학자였을 것이다. 공자가 평생 흠모했고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한 인물은 무왕의 동생 주공이다. 무왕은 동생인 주공을 전략가로 등용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웠다. 주공은 형님이자 천자인 무왕의 스승 역할을 했다.
주공은 무왕을 도와 주나라 개국 초기의 국가질서를 세운다. 무왕은 집권한 지 6년만에 세상을 떠난다. 주공은 왕위를 맡아달라는 청을 사양하고, 무왕의 아들인 희송에게 왕위를 잇게 한다. 이분이 성왕이다. 왕의 나이가 아직 어렸기에 주공은 제국을 섭정하는데 이때 나라의 기틀을 갖추는 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성공시킨다. 주공이 세운 국가 시스템은 이후 천년동안 중국대륙을 이끈 핵심모델이 된다. 공자가 그를 주목한 것은 인품과 자질과 업적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후국 노나라의 정치브레인이었던 주공의 성공스토리를 발판으로 노나라 출신이었던 자신의 사상적 권위를 강조하고자 하는 전략도 있었을 것이다. 공자는 유학자의 미덕과 실천력을 함께 갖춘 주공을 성인이라 일컬으며 그와 닮은 일이 바로 유학자의 길이라고 강조해왔다.
그런데 노자는 전혀 다른 '낯선 성인'을 불쑥 들이민다. 노자의 성인은 주공처럼 정치가로 팔을 걷고 국가업무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듯한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듯한 불언으로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이다. 이 분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큰 일을 성공시켜도 자신이 했다는 티를 내지 않고 공을 세운 뒤엔 그것에서 바람처럼 물러나는 분, 물러났지만 굳이 떠난 것은 아니기에 늘 그 자리에 계신 분. 이 분은 누구란 말인가.
노자의 성인은, 어떤 가치 쪽으로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 그것이 무위다. 어떤 가치가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불언이다. 공자는 권선징악을 하라고 했으니 유위(有爲)로써 일을 처리했고 이게 옳고 저게 그르다고 말을 했으니 유언(有言)이었고 주공의 공적에 머물러 있었으니 유거(有居)였다. 공자의 성인은 노자의 잣대로는 도저히 성인이라 할 수 없었다. 여기에 이 글의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다. 그럼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누구인가. 도덕경 내내 그는 이것만을 의식하는 듯해 보일 정도로 집요하다. 그 분은 세상 천지만물을 만든 조물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