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앨리스 먼로의 『곰이 산을 넘어오다』

해암도 2017. 3. 5. 08:40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표정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앨리스 먼로

앨리스 먼로

인간은 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이제 다시는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비슷한 패턴으로 실수를 저지른다. 이를테면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을 닮은 사람을 또다시 사랑하게 되는 것 말이다. 심지어 헤어졌던 그 사람과 다시 만나 똑같은 상처를 다시 받기도 한다. 그와의 만남과 이별 속에서 엄청난 상처를 입었음에도, 다시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적 퇴행이다. 실수를 극복하고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다시 실수 속으로 뒷걸음치는 것. 프로이트는 이런 심리적 ‘퇴행’을 ‘재생’이라고도 불렀다.
 

정여울의 심리학으로 읽는 문학
앨리스 먼로의 『곰이 산을 넘어오다』

그렇다면 무엇이 재생되는 것일까. 바로 ‘기쁨’이다. 정신적 퇴행 속에는 은밀한 기쁨이 숨어 있다. 그 사람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그 사람을 좋아했던 기억’ 속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온갖 총천연색 기쁨이 내재해 있다.
 
하지만 이 은밀한 퇴행적 기쁨은 불행하게도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기쁨이다. 예전과 비슷한 패턴으로 당신에게 상처를 주는 연인은 이번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당신의 가슴을 산산조각낼 것이므로.
 
정신분석은 바로 이 지긋지긋한 ‘반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도구다. 항상 똑같은 잔소리를 반복하는 엄마들은 자식을 올바로 키우겠다는 일념도 있지만 스스로가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비슷한 문장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예컨대 “제발 공부 좀 하라”는 잔소리를 심각하게 반복하는 부모는 자신이 공부로 인해 콤플렉스를 느꼈던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다. 반면 ‘아이를 많이 칭찬하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적인 강박 뒤에는 부모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문제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때로 아이를 따끔하게 혼내지 못하고 내 아이 기죽는다며 자식의 나쁜 습관을 방치하는 부모도 마찬가지로 자기 부모와의 잘못된 애착관계로부터 비롯된 상처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 괴로운 반복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내 상처의 진원지를 찾아내어 그 아픔의 패턴을 분석해야 한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 『곰이 산을 넘어오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 ‘어웨이 프롬 허’

앨리스 먼로의 소설 『곰이 산을 넘어오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 ‘어웨이 프롬 허’

“이제는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영화 ‘어웨이 프롬 허’의 원작소설로 잘 알려진 앨리스 먼로의 『곰이 산을 넘어오다』는 이 징글징글한 ‘반복’과 ‘퇴행’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생생히 보여 준다. 대학 교수였던 남편 그랜트와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 피오나는 겉으로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삶을 꾸리고 있었다. 하지만 피오나가 알츠하이머에 걸리면서 두 사람의 행복한 삶은 산산조각난다. 피오나는 부엌 바닥에 남은 검은 얼룩을 문지르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 장면이 무척 의미심장한 상징이었음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거의 50년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 것처럼 보였지만, 알고 보면 그랜트는 젊은 시절 수 없이 바람을 피움으로써 피오나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았던 것이다. “이제는 괜찮은 줄 알았던” 것은 단지 마룻바닥이 아니라 ‘이제 다 나은 줄 알았던’ 피오나 자신의 깊은 상처였던 것이다.
 
아내 피오나를 치매 환자를 위한 요양원에 보낸 남편 그랜트는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아내가 점점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아픔을 소름 끼치게 경험하기 때문이다. 과연 피오나는 빠른 속도로 남편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고, 마치 남편이 보란 듯이 요양원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한다. 그랜트가 보기에 전혀 그녀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 아닌 남자 오브리와 함께 너무도 행복한 미소를 짓는 피오나를 보며, 그랜트는 마치 자신의 방탕한 젊은 시절에 대한 복수를 이제야 당하는 듯한 끔찍한 고통을 맛본다.
 
피오나는 알츠하이머를 앓으며 자신에게 소중했던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정신적 ‘퇴행’을 겪지만, 그 안에서 행복해 보일 뿐 아니라 어쩐지 짜릿한 쾌감마저 느끼는 듯하다. 항상 누군가의 완벽한 아내로 품격 있고 우아하게 살아가기 위해 억압해야 했던 자신의 참혹한 고통, 남편에게 배신당한 아내의 슬픔은 수십 년이 지나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비로소 느끼게 된 아내의 뼈저린 절망감
그랜트는 요양원에서 오브리라는 새로운 치매 환자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아내가 자신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나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기억을 잃어버린 척’하는 것은 아닐까-. 아내가 너무도 행복해 보이기 때문에, 그녀가 완전히 자신을 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는 아내에게 못할 짓을 저지른 자신의 과거가 더욱 찔리기 시작한다. “이따금씩, 놀라게 되요. 아내가 가면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해서요.”
 
그는 아내가 자신에게 복수를 하고 있다고, 자신에게 뒤늦은 형벌을 내리고 있는 거라고 아내를 원망해 보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것 같다. 그는 아내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미안하다는 말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진심으로 사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행복한 부부’로 살아가기 위해 그들은 과거의 상처를 서둘러 봉합해 버렸고, ‘다 잊은 척, 괜찮은 척’ 살아왔던 수십 년은 아내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랜트는 수십 년 동안 아내가 느꼈을 깊은 배신감과 좌절감, 상처 입은 자존감, 믿었던 모든 세계가 무너지는 절망감을 그제야 속속들이 느끼기 시작한다. 그랜트는 처음으로 자신의 요구가 아닌 아내의 요구에 귀기울여 주기 시작한다. 아내는 정말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행복해 보였기에, 그는 마침내 아내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로 한다. 사랑하지만, 놓아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당신이 나를 버려서 행복하다면, 당신이 나를 떠난 뒤 진심으로 기쁘다면, 당신을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랜트는 마치 아름다운 여배우를 남몰래 스토킹하는 무력한 열성팬처럼 변해 버린 자신의 신세가 서럽고 처량하지만, 아내를 사랑하는 더 커다란 길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난 당신 따윈 몰라, 가버려요’라는 표정으로 그를 낯선 사람으로 대하던 아내가, 갑자기 남편을 기억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내는 마치 이제는 통쾌한 복수가 말끔하게 끝났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랜트를 맞아들인다.
 
“당신이 와 줘서 기뻐.” 피오나는 그의 귓불을 친근하게 잡아당기며 원망하는 말투로 말한다. “당신이 그냥 떠나 버린 줄 알았잖아. 나 따윈 관심도 없이, 그냥 버리고 떠난 줄 알았잖아. 나를 팽개치고. 나를 버리고.” 그녀는 마치 과거에 남편이 자신을 저버린 것을 ‘묘사’하듯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한다. 당신이 나를 버리고 떠난 줄 알았지만, 이제라도 돌아와 줘서 기쁘다고.
 
피오나는 정말로 ‘기억을 잃은 척’ 연기를 한 것일까. 그녀의 알츠하이머는 명백한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남편을 잊은 척하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은 어쩌면 발칙한 연기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상처를 ‘반복’하는 일을 이제야 멈췄다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남편을 원망만 하고, ‘당신이 증오스럽다’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녀가, 통쾌한 복수극 한 번 왁자하게 치르고 나서는 마치 한바탕 씻김굿을 한 듯 트라우마로부터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는 완치될 수 없지만, 트라우마는 치유될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의 상처와 진정으로 대면할 수만 있다면. 깜찍한 연기를 해서라도, 한바탕 복수극을 해서라도, 내 안의 상처를 소중하게 보살필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
 
 
정여울 : 작가, 문학평론가. 문학과 삶, 여행과 감성에 관한 글을 쓴다.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헤세로 가는 길』등을 썼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7.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