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최종병기 활'

해암도 2017. 2. 2. 08:55

바람이 거셀수록 활시위를 세게 당겨라

이민족을 '이리, 벌레'라 부른 中, 우리만 '활 든 동쪽 사람'이라 해
전장서 활쏘기에 당한 공포가 한민족 존중으로 이어진 결과
"화살 쏠 때 바람은 극복하는 것" 영화대사처럼 生의 시련 맞서야

남정욱 작가
남정욱 작가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중국은 사방의 다른 민족을 낮춰 불렀다. 서융(西戎)은 개, 남만(南蠻)은 벌레, 북적(北狄)은 이리인데 동이(東夷)만 유일하게 사람 취급하여 '큰 활을 찬 사람들'이다.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존중 혹은 두려움. 후자일 공산이 크다. 성 꼭대기에서 날린 화살이 자기네 황제의 눈알을 꿰뚫었던(안시성의 양만춘) 기억이 생생한 중국에 우리는 공포의 활쏘기 국가였다.

중국이 창의 나라, 일본이 칼의 나라라면 우리는 활의 나라다. 활 쏘는 민족은 복장부터 다르다. 무용총 수렵도를 보면 웃옷이 다 좌임(左)으로 왼쪽 옷깃이 안으로 들어가 있다. 이유는 왼쪽 옷깃이 오른쪽을 덮으면 활을 쏠 때 거치적거리기 때문이다. 아마존의 여전사들이 활을 쏠 때 걸리지 말라고 오른쪽 가슴을 가죽으로 누른 것과 비슷한 이치다. 왜 우리는 이렇게 활을 사랑했을까. 인간의 역사는 지리적 환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우리나라가 활이 발달한 건 대규모 병력이 맞불을 수 있는 너른 평야가 적고 산이 많은 지형 때문이다.

이 활 이야기를 역사에 재미있게 녹인 작품이 영화 '최종병기 활'이다. 배경은 병자호란이다. '병자년 발발, 정축년 종료'라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도 부른다. 쳐들어온 것 가지고 트집 잡는 거 아니다. 무슨 유엔이 있던 시대도 아니고 피차간에 매너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큰 나라가 작은 나라 치는 것이 흉이 아니던 시대다. 짜증 나는 건 청나라가 일을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백기 내걸고 인조는 청태종 홍타이지를 향해 가며 세 번 절하고 땅에 아홉 번 이마를 찧었다. 거기까지도 괜찮다. 항복식이 끝나고 홍타이지가 자리를 뜬 후에도 인조는 밭 가운데에 꿇어앉아 있었다. 가도 좋다는 소리를 안 해줘서 그랬다. 짓밟은 다음에는 체면도 좀 세워주고 그래야 한다. 그게 승자의 미덕이다. 좁쌀만큼도 없었다. '최종병기 활'은 이런 아수라장에서 청나라군에 끌려간 누이동생을 찾아 나선 민간인 명궁의 고군분투기다.

[남정욱의 영화 & 역사] 바람이 거셀수록 활시위를 세게 당겨라
/이철원 기자
활 역시 처음에는 사냥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전쟁의 역사가 개막되면서 병기로 진화한다. 칼이나 창은 힘으로 던진다. 활은 도구의 힘을 이용한, 물리학이 개입된 최초의 무기다. 활이 휘었다가 펴질 때 발생하는 몸체의 힘을 안쪽에 덧댄 뿔이 밀어주고 바깥쪽 힘줄이 당기면서 엄청난 탄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에 깃을 달아 방향을 조절하고 회전까지 만들어 냈으니 누대에 걸친 집요한 노력의 결과다.

영화 속에서 청군은 육량시라는 화살을 사용한다. 여섯 량 화살 무게에서 촉이 가장 높은 비중이었을 것이니 삼겹살 1인분 질량의 쇳덩어리가 날아오는 셈이다. 거의 타이슨급(級) 펀치인데 다행히 속도가 느리고 사거리가 짧다. 여기에 맞서는 조선의 화살이 속칭 아기살이라고 부르는 편전(片箭)이다. 영화 속 주인공은 대부분 일반 활을 쓰고 편전은 가끔 쓰지만 조선시대 편전은 공식적인 최고의 무기였다. 편전은 길이가 일반 전투용 화살의 절반으로 보통 45㎝ 내외다. 당연히 일반 활에는 메길 수가 없다. 해서 반으로 쪼갠 대나무 통에 넣어서 쏘는데 유효 사거리는 300m 정도로 일반 활의 두 배 이상이다. 어느 한가한 분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편전의 날아가는 속도는 현대 양궁의 화살보다 빠르다고 한다. 짧은 데다 빠르기 때문에 칼로 화살을 걷어내는 통상적인 방어법이 불가능하다. 칼을 휘두르기 전 이미 몸에 와서 박힌다. 영화의 영어 제목이 '화살의 전쟁'인데 내용을 짚어냈다.

활 하면 또 떠오르는 인물이 이순신 장군이다. 난중일기에 자주 나오는 말 중 하나가 자기가 활을 잘 쏜다는 자랑인데 장군의 활쏘기는 거의 중독 수준으로 기쁠 때도 활쏘기, 슬플 때도 활쏘기, 심란한 때도 어김없이 활을 잡았다. 그럼 장군은 얼마나 활을 잘 쏘았을까. 일기를 보면 50발을 쏘아 43발을 표적에 꽂았다고 적었다. 잘 쏜 걸까, 못 쏜 걸까. 임진왜란 직후 함경도에서 군관 생활을 했던 박계숙과 그의 아들인 박취문 부자가 남긴 '부북일기(赴北日記)'를 보면 박계숙은 50발을 쏘아 48발을 맞혔다. 아들인 박취문은 이시복이란 군관과 활쏘기 시합을 하면서 스코어를 적었는데 박취문은 18 9발 연속 명중, 이시복은 무려 200발 연속 명중이다. 참고로 '부북일기'에서 활쏘기 성적이 나쁜 군관들의 기록이 50발을 쏘아 43발 명중이었다. 충무공 예찬론자들이 들으면 좀 실망일 수 있겠다. 영화 끝 부분에 멋진 대사가 나온다. "(화살을 쏠 때)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바람을 인생으로, 세상으로 바꾸면 울림이 더 커진다.


                조선일보    남정욱 작가    입력 : 2017.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