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궁중 음식의 또 다른 이름 정성

해암도 2017. 2. 19. 10:07

3대째 조선왕조 궁중음식 이수자 정라나

신선로, 구절판, 갈비찜, 탕평채 등은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궁궐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 왕족만 먹을 수 있었던 이 음식들은 이제 쉽게 접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조선왕조 궁중음식은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대중화될 수 있었을까? 궁중음식의 레시피를 표준화, 계량화하여 대중화의 다리를 놓은 사람은 황혜성(1920~2006) 전 성균관대 교수였다. 황 교수의 외손녀인 정라나(43) 경희대학교 호텔관광대학 교수는 할머니와 어머니에 이어 삼 대째 궁중음식 이수자가 되었다.

조선왕조 마지막 주방 상궁에게 배우다

고 황혜성 교수는 조선시대 말기 고종과 순종의 일상식을 만들었던 한희순 주방 상궁에게 궁중음식 전통 조리법을 배웠다. 1971년 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해 체계적으로 궁중음식이 전수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황 교수는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됐으며 세 딸인 한복려, 한복선, 한복진씨에게 궁중음식 전통 조리법을 가르쳤다. 첫째 딸 한복려씨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궁중음식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됐으며 둘째 딸 한복선씨는 요리 연구가가 되어 강의와 저술 활동으로 궁중음식의 대중화에 힘썼다. 셋째 딸 한복진씨는 전주대에서 전통문화음식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정라나 교수는 한복선씨의 첫째 딸이다. 그는 산업디자인학과로 입학해 3학년 때 식품영양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22년째 가업을 잇고 있다. 현재 조선왕조 궁중음식 이수자는 정 교수를 포함해 모두 20명이다. 매달 한 차례 공부 모임을 진행하고 강의도 하면서 1년 1회 이상 궁중음식 재현 행사를 열고 있다. 궁중음식을 글과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도 하고 있다.


“황혜성 교수님은 한희순 주방 상궁에게 도제식으로 궁중음식 조리 기능을 배웠어요. 전통 조리법을 재현하는 훈련을 받으면서 한희순 상궁이 만드는 모든 궁중음식의 재료를 계량화해 레시피를 만들고 책으로 펴냈습니다. 덕분에 레시피만 보면 누구나 궁중음식을 만들고 맛볼 수 있게 됐습니다. 궁중음식의 대중화 시대를 연 거죠.”

《이조 궁정요리 통고》(1957)에 나온 신선로 재현.

정 교수는 할머니와 이모들 덕분에 어릴 때부터 동화책보다 요리책이 많은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전공을 바꾸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음식 쪽을 공부할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어릴 때는 가업을 잇는 게 굉장한 부담이었어요. 집안 어른들이 하는 일을 잘할 자신이 없었죠. 스무 살이 넘어 철이 들면서 할머니가 모은 소중한 고문헌 자료를 잘 관리하고 보존하려면 가족이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할머니의 손자, 손녀 중에서는 제가 유일한 궁중음식 이수자예요.”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정 교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리학원에 다녔다. 귀국 후 연세대 대학원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해 급식경영 분야를 공부하면서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일을 돕고 배웠다. 수백 종류에 달하는 조선왕조 궁중음식을 재현하는 조리법을 익히고 조교를 하면서 강의 경험도 쌓았다.


“궁중음식은 크게 일상식과 의례식으로 나눌 수 있어요. 일상식은 왕과 왕비의 삼시 세끼, 의례식은 제례・혼례・상례 때 차리는 잔칫상이에요. 조선왕조 궁중음식의 종류는 수백 가지에 달해요. 이수자들은 이 모든 음식을 다 만들 줄 알아야 해요. 이 분야에 들어선 지 20년이 넘었지만 배울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요. 할머니가 대단한 분이란 생각이 더 커지죠.”

정 교수는 조선왕조가 500년이나 이어졌지만 남아 있는 고문헌은 많지 않다고 전했다. 수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소실된 탓이다.


“궁중음식은 제철에 나는 최상의 재료로 최고의 조리 기술자들이 만든 음식이었어요. 재료와 조리법이 매우 다양합니다. 구절판 같은 음식을 만들 때는 음양오행을 상징하는 다섯 가지 색이 골고루 드러나 조화를 이루도록 했습니다. 여러 사람의 노력, 시간, 기술로 만드는 궁중음식의 또 다른 이름은 정성이라고 할 만해요.”

그는 조선왕조 궁중음식은 꼭 궁에서만 먹은 건 아니었다고 했다.


“조선시대는 동성동본 결혼이 금지된 사회였어요. 왕자는 밖에서 아내가 될 사람을 찾아 궁 안으로 들였고 공주는 밖으로 내보냈어요. 잔치 때 음식을 싸 주는 풍습이 있어서 혼인할 때 궁에서 만든 음식을 소수이긴 했지만 외부인도 맛볼 수 있었죠.”

그는 2004년 CJ식품연구소에서 일하다가 2006년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2009년부터 경희대 호텔관광대학 조리서비스 경영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궁중음식의 세계화를 꿈꾸며

구절판.

전통을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하고 이어가는 것 못지않게 전통을 현 시대에 맞게 적응하고 확산하는 작업도 매우 중요하다. 전통의 생명력은 대중의 관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미국의 가정집에서 한국 음식을 요리할 때 참고할 수 있는 레시피를 만드는 작업을 했어요.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로 현지인의 입맛을 고려해 가정에서 간편하게 요리할 수 있도록 자료를 모으고 정리했어요.”

타락죽과 잣죽.

정 교수에 따르면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궁중음식은 고기류가 다수다. 갈비찜, 불고기, 비빔밥, 잡채 등이 인기 메뉴라고 했다. 최근 정 교수가 심도 있게 연구하는 분야는 한국 음식을 다른 나라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식문화를 비교하는 것이다.

“외국인에게 들기름 냄새를 맡고 맛을 보게 하고 떠오르는 형용사를 나열해보라고 하죠. 한국인은 ‘고소하다’처럼 음식과 관련된 형용사를 쓰는데, 미국인은 음식과 관계없는 표현을 사용해요. ‘석유 냄새가 난다, 풀 냄새가 난다’고 반응하는 식이죠. 영어판 레시피를 만들 때 이런 부분을 반영해요.”

궁중상추쌈차림.

정 교수는 올해도 세계 음식문화 비교 연구에 매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저는 나라별 기본 맛을 비교하는 게 재밌어요. 예를 들면 매운맛을 남미, 베트남, 한국에서 비교하면 모두 다른 결과가 나와요. 남미인들이 좋아하는 타바스코 소스는 매운맛에 신맛이 가미되어 있어요. 한국인은 매운맛과 단맛을 즐기죠. 이처럼 나라별로 매운맛을 어떤 것과 어울려 먹는지 궁금해요. 이런 연구가 계속 쌓이면 한식 레시피의 세계화 작업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한식의 세계화란 그 나라의 문화에 맞게 한국 음식을 만들고 맛을 즐길 수 있도록 돕는 거니까요.”

도미면.

궁중음식연구원에는 한국 음식의 정수를 배우고 싶다며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10년, 20년 이상 이곳을 드나들며 궁중음식 요리법을 배우다가 강사가 된 이들도 있다. 최근에는 단기 특강에 참여하는 외국인도 늘고 있다. 해외에서 한국 음식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국가 브랜드 이미지가 곧 음식에도 영향을 미쳐요. 나라가 강해져야 그 나라의 대표 음식도 파워를 갖습니다. 아직 우리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외국인도 많아요. 제 연구가 한국 음식의 세계화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임현선 톱클래스 기자   사진 김선아, (사)궁중음식연구원          조선    입력 : 2017.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