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기사, 15집 이상 뒤지면 대개 포기...기업 경영에서도 부질 없는 미련 버려야
그렇다면 기사들은 어떤 때 돌을 던질까? 당연한 얘기지만 집으로 많이 뒤져 있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다. 프로기사의 경우 15집 이상 뒤져 있다면 사실상 희망이 없는 바둑이다. 이럴 때 돌을 던진다. 축구에 비유하자면 5대0 정도로 뒤져 있을 때 포기를 하는 것과 같다. 이길 가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아 돌을 던지게 된다.
[1도]는 ‘원펀치’로 불리는 원성진 9단과 ‘뉴신산’으로 불리는 박영훈 9단이 둔 바둑이다. 원성진 9단이 흑1로부터 강렬한 펀치를 날려 백대마를 끊자 백돌이 양곤마가 되고 말았다. 주변에 흑의 원군이 많아 두 백돌 중 하나는 거의 잡힌 모양이다. 그렇게 되면 이 일대에 엄청난 흑집이 생긴다. 계산과 끝내기에 능한 박영훈 9단이지만 더 이상 두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아 돌을 던지고 말았다.
이처럼 결정타를 맞았을 때 돌을 던지는 수가 많다. 복싱에서 왕년에 핵주먹 타이슨의 강펀치를 맞고 KO당하듯이 대마가 잡혀 승산이 없을 때 기사들은 중도에 패배를 선언한다. 복싱에서는 심판이 KO승을 선언하지만, 바둑에서는 선수가 스스로 패배의사를 밝힌다. 그러나 프로기사 중에는 반집 승부인데도 던지는 사람이 있다. 반집 차이면 0.5집으로 극히 미세한 승부라 끝까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반집 차이인 판에서 던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도저히 역전될 수 없는 반집일 경우 패배를 선언하는 경우도 있다.
희망이 없을 때: 바둑에서 돌을 던지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패배를 선언한 순간 희망을 접어야 하니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그래서 차마 “졌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 표시로 바둑돌 두세 개를 집어 바둑판에 놓음으로써 패배를 표시한다. 돌을 던지는 것은 기업으로 치면 운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가망이 없다고 보아 파산을 선고하는 것과 같다. 난국에 처한 기업은 구조조정이나 합병 등으로 살려내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도저히 회생하기 어렵다면 기업도 돌을 던져야 할 것이다.
[2도]는 일본의 사카다 에이오 9단과 후지사와 호사이 9단이 둔 바둑이다. 흑1로 둘 때 백2로 흑돌 한 점을 따내자 후지사와 9단은 여기서 패배를 선언했다. 흑의 대마가 잡힌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후지사와는 이길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3도]에서 다음 흑1로 백 세 점을 잡으면 백2에 두고 4로 이어간다. 공격당하던 백돌들이 흑집 속에서 집을 얻고 살아간 모양이다. 아직 둘 곳은 널려 있지만 흑이 집으로 뒤져 있어 승산이 없는 국면이다. 이 장면에서 돌을 던지지 않고 계속 두어가도 된다. 하지만 프로기사들은 도저히 이기기 힘든 바둑을 계속 끌어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신체적 피로와 괴로움만 가중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돌을 던지는 상황은 의외로 많이 나온다. 실제로 프로기사들은 끝까지 두어 계가를 하는 것보다 중도에 돌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한 예로 [바둑 연감]에 수록된 하이원리조트배 명인전의 경우 본선대국을 포함한 42판의 시합 중 34판(80%)이 불계승이다. 8판만이 끝까지 두어 계가를 한 것이다.
기업이나 다른 영역에서도 이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희망이 없는 돌은 미련을 버려라’라는 바둑격언이 있는데, 도저히 가망이 없는 기업을 끌고 가는 것은 오히려 부담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깨끗하게 정리하고 새 출발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자본과 에너지 그리고 열정을 쏟아 부은 기업을 정리할 때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하지만 냉정하게 보아 정리하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다. 특이하게도 바둑에서는 희망이 없을 때는 버리는 쪽을 강력하게 권장한다. 바둑 십계명 중에 ‘위기에 처하면 버려라’라는 말도 있다. 중간에 돌을 던져 패배를 선언하는 시합제도도 그런 맥락의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을 던지는 효과: 기사들이 끝까지 두지 않고 중도에 돌을 던지는 것은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길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바둑팬을 고려한다는 뜻도 있다. 이미 승부가 거의 결정된 판을 질질 끌고 가는 것은 관중을 짜증나게 한다. 이런 판은 깨끗이 포기해 승부를 끝내는 것이 일종으로 미덕으로 간주된다.
15집 정도 뒤져 있는 판을 돌을 던지지 않고 두어가면 관중은 물론 바둑을 두는 상대방도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런 판은 상대방이 큰 실수를 하지 않는 한 이기기 어렵다. 따라서 계속 두어간다는 것은 상대방의 실수를 기대하며 두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바둑 자체가 상대방이 잘못 두기 때문에 이기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실수를 기대하는 것은 약간 지저분하다고 본다.
바둑계의 최고봉이었던 조훈현 9단이나 사카다 9단이 크게 불리한 바둑을 끝까지 둔 적이 있다. 이런 판은 바둑 내용 자체보다도 고수가 돌을 던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서특필된다. 던져야 할 바둑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 것이 매너상 바람직한가 하는 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바둑규칙에 불리하면 중도에 던지라는 룰은 없지만 프로기사들은 희망이 없는 판은 던지는 것을 올바른 승부 자세로 간주한다.
가끔 크게 불리한 바둑에서 상대가 돌을 던지지 않는 것에 속으로 분개해 하다가 대역전을 당하는 일도 있다. “이런 바둑을 왜 안 던지지?”라고 두다가 실착을 두는 것이다. 감정이 앞서면 냉정·침착함을 잃고 실수가 나오기 쉬운 법이다. 아마추어의 바둑에서는 크게 불리한 바둑이라도 역전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형세가 유리해도 무조건 싸우는 전략을 택하다가 어지러운 국세를 초래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방이 던지지 않는다고 화를 내서는 안 된다.
글 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정수현 - 1973년 프로기사에 입단한 후 1997년 프로 9단에 올랐다. 제 1기 프로신왕전에서 우승했다. 한국프로기사회장, KBS일요바둑·바둑왕전의 해설자를 역임했다.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둑 읽는 CEO』 『반상의 파노라마』 『 인생과 바둑』 등 30여 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