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민족의 자부심 담긴 '국가대표' 그림들

해암도 2016. 11. 6. 05:35
지폐 속 명화

터너의 대표작 '전함 테메레르'
과거 영국이 누렸던 영광 표현… 새 20파운드 지폐 뒷면 그림 선정

우리나라 1000원 지폐 뒷면에는 실제 풍경 그려낸 '계상정거도'
한국식 산수화의 대표작이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지폐를 유심히 살펴본 적 있나요? 각 나라의 지폐에는 다채로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은 대체로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나 문화유산, 관광 명소와 풍경을 담고 있어요. 또 유명 화가의 그림이기도 하죠. 지폐 속 그림만 보더라도 그 나라 미술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사진1은 오는 2020년부터 영국에서 통용될 예정인 새로운 20파운드 지폐 뒷면입니다. 여기에는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 윌리엄 터너의 자화상과 그의 대표작 '전함 테메레르'가 담겨 있어요. 영국 중앙은행은 이번에 처음으로 영국 국민 추천을 받아 새로운 20파운드 지폐에 들어갈 인물로 터너를 뽑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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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 새롭게 발행될 영국 20파운드 지폐 뒷면에 새겨진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자화상과 그의 명작 ‘전함 테메레르’. /영국은행·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터너는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 셰익스피어와 견줄 만큼 명성이 높아요. '영국이 소장하고 있는 가장 위대한 그림'을 뽑는 설문 조사에서도 터너의 명작 '전함 테메레르'가 1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전함 테메레르는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와 에스파냐 연합함대를 물리치고 영국에 승리를 안겨준 영광스러운 전함입니다.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리로 영국 해군은 유럽 대륙을 정복한 나폴레옹의 침략을 막아내고 바다를 장악하게 되었어요.

이 작품에서는 작은 증기선이 전함 테메레르를 앞에서 끌고 가고 있는데, 이미 낡아 쓸모가 없어진 테메레르를 해체하려고 조선소로 끌고 가는 거예요.

터너는 영국민의 영광과 자부심을 보여주기 위해 이 장면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릴 당시 돛을 달아 바람의 힘으로 나아가는 전함 테메레르는 비록 수명이 다해 해체될 운명에 처했지만, 영국이 바다를 지배했음을 상징하는 배라는 건 변하지 않지요.

동시에 테메레르를 끌고 가는 증기선은 영국이 산업혁명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것임을 암시합니다. 증기기관을 통해 무거운 화물을 더 많이, 더 빨리 실어 나를 수 있는 증기선은 산업혁명 그 자체를 상징하죠. 이 작품이 20파운드 지폐에 담기게 된 것도 영국이 과거에 누렸던 영광을 현재와 미래에도 이어갈 거라는 믿음을 영국민에게 심어주기 때문이에요.

이제 사진2에서 우리나라 1000원짜리 지폐 뒷면을 한번 볼까요?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네요. 바로 조선 후기 최고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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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 1000원권 뒷면에는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의 ‘계상정거도’가 새겨져 있지요.

계상정거란 '물가에서 조용히 지낸다'는 뜻으로 이 그림은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 퇴계 이황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제자를 가르쳤던 계상서당(현 도산서원)과 그 주변 풍경을 그린 산수화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살피면 서당 안에 흰옷을 입은 선비가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책 읽는 모습이 보입니다. 학문과 인격 수련에 힘썼던 조선의 선비 정신을 느낄 수 있어요.

이 그림은 실제 풍경을 그린 진경산수화예요. 그전까지 조선의 화가들은 중국식 화풍을 본떠 상상 속 풍경을 그렸어요. 하지만 정선은 존재하지 않은 이상적 풍경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풍경을 그렸어요. 중국식 화풍을 벗어난 정선의 색다른 시도는 당시 보수적이던 조선 화가들에게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답니다. 이 그림이 지폐에 실린 것도 한국형 산수화를 창안한 정선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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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 과거 체코슬로바키아 100코루나 지폐에는 알폰스 무하의 디자인과 그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어요. /국립미국사박물관·소장처 불명

과거 체코슬로바키아의 100코루나 지폐〈사진3〉에 실렸던 그림은 체코 출신의 '아르누보' 거장 알폰스 무하가 그렸어요.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인 아르누보는 1890 ~1910년 무렵 유럽과 미국 등에서 유행했던 미술 양식입니다. 덩굴손이나 담쟁이와 같은 식물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길고 부드러운 선과 다양한 문양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에요.

지폐 속 그림에는 무하의 아르누보 화풍이 잘 드러나 있어요. 꽃잎, 넝쿨, 화려한 문양이 그림 속 여성을 여신처럼 아름답게 장식해줍니다. 무하의 그림은 체코인의 민족성과 자부심을 의미해요.

실제로 무하는 애국심이 무척 강한 화가였어요.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의 첫 국가 상징물과 지폐, 우표 도안을 재능 기부 형식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독일 나치군이 무하를 체포해 고문한 것도 무하의 예술이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에게 큰 영향을 준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무하는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애국심은 지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답니다.

이제 지폐 속 그림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그림이라는 점, 확실히 알게 되었나요? 우리나라 지폐와 외국의 지폐에는 어떤 그림이 등장하는지 잘 살펴보세요.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 | 입력 : 2016.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