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의 詩 13편 발견… 前 NHK PD 다고 기치로
1945년 광복이 된 후에도 덕혜옹주는 귀국하지 못했다. 조선 황실의 존재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승만 정부가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1962년 마침내 조국 땅을 밟았지만, 덕혜옹주는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열아홉 살 때인 1931년, 일제에 의해 대마도 백작과 정략결혼을 할 때쯤부터 앓아온 조현병(정신분열증)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한때 고종의 집무실로 쓰였던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에서 지내다 1989년 숨을 거뒀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삐뚤빼뚤 쓴 짧은 낙서가 그가 유일하게 남긴 글로 알려졌었다. 일본인 다고 기치로(多胡吉郎·60)씨가 덕혜옹주의 동시를 찾아내기 전까지는.
일본 공영방송 NHK PD 출신으로, 현재 한국과 일본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인 다고씨는 지난 2010년 덕혜옹주가 10대 초반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어 동시 4편을 발굴했다. 수년간 홀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찾아낸 성과다. 그는 이를 논문으로 써서 2011년 한국의 한 월간 문예지를 통해 발표했다. 제목은 ‘비극적 공주의 혼의 외침’이었다.
“덕혜옹주 시는 한국의 보물”
韓日 오가며 시 발굴
옹주는 말이 없던 사람
박물관의 초록색 당의
옷이 대신 말하려는 듯해
한국인은 잘 몰라 안타까워
日 근대 유명 작곡가가
옹주가 열살 무렵 쓴 동시
‘비’·‘벌’에 곡을 붙일 정도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익선동 한 찻집에서 만난 다고씨는 “모든 게 덕혜옹주의 옷을 본 이후 시작됐다”고 했다.
“1980년대 중반쯤 도쿄 한 박물관에 전시된 덕혜옹주의 초록색 당의(唐衣)와 붉은색 치마를 봤어요. 그날 아침에 누가 입었던 것처럼 색깔이 선명했어요. 보자마자 뭔가에 홀린 듯했어요. 덕혜옹주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잖아요? 옷이 대신 뭔가 말하고 싶다, 그렇게 전하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 찻집은 다고씨가 한국에 올 때마다 들르는 단골집이라고 했다. 찻집 주인은 “이분(다고 기치로) 좀 이상해. 일본 사람이 아닌 것 같아”라고 했다. 다고씨는 못 들은 척 유창한 한국어로 “여기 복분자 빙수 맛있어요”라고 했다. 그러더니 새로 쓴 논문을 쑥 내밀었다. 제목은 ‘천재 시인으로 불린 덕혜옹주, 그 시 작품으로 더듬는 삶의 궤적’이었다.
“동시 4편 외에 추가로 덕혜옹주의 와카(和歌·일본의 정형시) 9편을 발굴해 쓴 논문이에요. 전에 찾은 4편이 덕혜옹주가 한국에서 쓴 시라면, 9편은 일본에 유학 간 후에 쓴 시입니다. 이 논문은 사실 3년 전에 썼어요. 이걸 들고 전에 제 논문을 발표했던 문예지를 찾아갔더니 실어 줄 자리가 없대요. 한국 사람들은 덕혜옹주 시를 알아야 해요. 이게 외국인인 제 마음속에만 있다면 너무너무 안타까운 일이에요. 덕혜옹주는 천재 시인이었어요. 한국의 보물이에요.”
그중에는 이런 동시들이 있었다.
“노란 옷 입은/ 작은 벌은/ 엉덩이에 칼/ 군인 흉내내며/ 뽐내고 있네”(벌·1922~1923년)
“모락모락 모락모락/ 검은 연기가/ 하늘 궁전에 올라가면/ 하늘의 하나님 연기가 매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어”(비·1922~1923년)
―덕혜옹주가 천재 시인이었습니까.
“시에서 영상적인 이미지가 도드라져요. 마음속에 있는 깊은 무언가를 드러내고 있어요. 시 ‘벌’에서 벌을 군인에 비유하고 있는데, 칼을 차고 뽐내는 군인은 조선을 힘으로 제압한 일본 군인을 나타내요. 시 ‘비’에선 옹주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이 새겨져 있어요. 이 시에서 ‘하나님’은 그의 부친(고종)과 관계가 있다고 봐요. 동시라고 하지만 어린이가 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당시 일본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근대 일본 음악계의 큰 별로 평가받는 미야기 미치오가 덕혜옹주의 시 ‘벌’과 ‘비’에 곡을 붙일 정도였어요. 미야기 미치오는 덕혜옹주를 ‘조선의 스미노미야 전하라고 불릴 만한 분’이라고 했는데, 스미노미야는 쇼와(히로히토) 일왕의 동생 미카사노미야를 뜻합니다. 미카사노미야는 동요에 특출해서 ‘동요의 왕자님’이라고 불렸는데, 덕혜옹주가 그와 견줄 정도로 재능이 있다고 했어요.”
“시는 덕혜옹주가 남긴 영혼의 기록”
덕혜옹주가 1929년 쓴 다음의 시 3수는 모두 제목이 따로 없다.
“해뜨는 나라의 천세의 광영을 진하게 잎마다 다짐하는 배움터의 소나무”
“친구들과 히노데의 뜰에서 함께 노닐던 어린 때가 그립구나”
“스승님께 이끌려 헤쳐 들어간 글숲이 너무나 흥미로웠구나”
―새로 발굴된 덕혜옹주 시 중에는 친일(親日)이라고 비판받을 만한 작품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좋은 예로 덕혜옹주의 시를 이용하려고 했을 수 있어요. 이런 시는 덕혜옹주가 너무 어려운 시절을 살아야 했다는 숙명을 보여주고 있어요. 북한에 있는 작가들이 김정은에 대해 ‘만세’라고 해야 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어요.”
―덕혜옹주는 불운한 삶을 살았죠.
“물론 비극의 인생을 살았지만 저는 단순히 역사의 피해자로만 보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살려고 했던 게 나타나요. 아주 적극적인 의지가 있었던 사람이에요. 당시 신문을 봐도 일본 도쿄여자학습원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승급했고, 와카에 천부적 재질이 있다고 나와요.”
―어두운 시가 많은데요.
“ ‘해뜨는 나라’라고 시작하는 와카 3수를 보면 안타까워요. 1929년 그가 다녔던 히노데 공립 심상소학교의 창립 40주년 기념 동창회지에 실린 시인데, 당시 덕혜옹주는 열일곱 살이었어요. 3수 중 첫 번째 수가 그 시대의 인사말 같은 거라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수에서 내면을 토로하는데, 말할 수 없는 고독이 나타나요. ‘글숲’에서 망국의 옹주를 넘어 시인으로 눈을 떴지만, 이것은 모두 과거이고 현재는 없어요. 참고 참고 또 참을 수밖에 없었던 일본에서 결국 인생을 포기한 것처럼 느껴져요.”
최근 개봉한 영화 ‘덕혜옹주’에서 덕혜옹주가 쓴 동시‘쥐’와 관련된 장면이 나온다. 이 시도 다고씨가 발굴한 작품이다.
―덕혜옹주를 소재로 한 영화가 나왔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덕혜옹주 시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워요. 그가 유일하게 스스로 남긴 영혼의 기록이 시니까요. 그래도 영화가 나와서 한국 사람들이 덕혜옹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 다행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덕혜옹주의 시는 무엇입니까.
“‘전단’이라는 작품이에요. 신문명을 상징하는 비행기에 대립하는 것으로 솔개가 나와요. 비행기와 솔개는 일본과 조선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봅니다. 특히 솔개의 존재감이 심상치 않아요. 신기한 생명력이 가득 차 있어요.”
“덕혜옹주 책 내는 게 나한테 주어진 길”
나한테 주어진 길
윤동주의 시에 반해
일본에 알려야겠다 생각
韓日 공동 다큐 제작도
한국이 왜 좋으냐고?
존경하는 분들이 있기에…
그러니까 나라 사랑보다
사람 사랑이 먼저
다고씨는 도쿄대에서 일본 문학을 전공한 후 1980년 NHK에 입사했다. 이후 4년간 기타큐슈에서 근무했는데, 불고깃집을 하는 재일교포 할머니와 친해지면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다고씨는 독학으로 한국어를 공부했다.
“그때 일본에 한국어 학원이 많지 않았어요. 조총련 계통의 학원에 가면 ‘김일성 만세’ 같은 것을 많이 가르쳤는데, 그런 곳을 다닐 순 없잖아요?”
광복 50주년이었던 1995년, KBS와 공동으로 제작한 윤동주 다큐멘터리가 KBS와 NHK에서 방영됐다. 근대사를 다룬 한·일 공동 제작 프로그램이 양국에서 동시에 방영된 건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다고씨는 “1984년 일본에 윤동주 전작이 소개됐는데 작품들을 읽고 나서 윤동주 시를 일본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부터 우리나라의 한 문학 계간지에 7회에 걸쳐 윤동주 평론을 연재하기도 했다.
―윤동주 시를 왜 좋아합니까.
“젊었을 때는 윤동주 시인을 통해서 일본의 이웃인 한국 사람들의 고뇌와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이제는 윤동주 시인과 그 시가 저 자신의 정신적인 지주가 된 것 같습니다. 제가 런던 주재원으로 나갔다가 2002년 PD를 그만두고 작가로 전업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때 고민을 많이 했지만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생각한 거지요. ‘서시’가 항상 미숙한 저를 지도해 주는 것 같습니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고층 빌딩에서 떨어진 것 같아요(웃음). 하지만 저는 이 길을 계속 가겠습니다. 덕혜옹주가 잃어버린 ‘말’을 더 찾아서 꼭 책으로 쓰고 싶습니다.”
찻집에는 그가 2008년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출간한 책 ‘또 하나의 가족―어느 일본 작가의 특별한 한국 사랑’이 비치돼 있었다. 그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한국 도예가 조성주씨 가족과 맺은 인연을 엮은 책이다.‘한국이 왜 좋습니까’라고 물었다.
다고씨는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들이 한국에 살고 계시니까 한국을 좋아한다”며 “그러니까 나라 사랑보다 사람 사랑이 먼저”라고 했다.
- 부산서 불과 2시간, 광복후 이승만이 그토록 되찾으려 했던 이곳
- 조선일보 전현석 기자 편집=이소정 입력 : 201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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