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날

해암도 2016. 12. 31. 06:59

섣달 그믐날

뒤숭숭하게 밤 지새우며 앉아 있다가
멍하게 졸린 눈으로 아침 맞았네.
제멋대로 육신은 늙고 병들고
세월은 겨울에서 봄으로 흘러가누나.

도부(桃符) 붙여 축원할 일 뭐가 있겠나.
새로 담근 잣잎술도 탐내지 말자.
오로지 바라나니 가슴에 담긴
본연의 참모습을 빨리 깨달아야지.

除日

忽忽坐終夕(홀홀좌종석) 昏昏睡到晨(혼혼수도신)
形骸從老病(형해종노병) 曆紀任冬春(역기임동춘)

不用桃符祝(불용도부축) 休耽柏葉新(휴탐백엽신)
惟須方寸內(유수방촌내) 早認本來眞(조인본래진)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섣달 그믐날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이 쉰한 살을 앞둔 1633년 섣달 그믐날의 심경을 썼다.

풍속에 따라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우고 있다. 한 해를 보내려니 뒤숭숭하고, 밤을 새우려니 멍하기만 하다. 나이 오십 줄에 들고 보니 몸은 늙고 병들고, 계절은 바뀌어 벌써 겨울이다. 또 바로 봄이 될 것이다. 그 모든 변화가 내 의지나 소망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다.

새해가 되면 도부(새해에 악귀를 쫓는 부적)도 붙이고 잣잎술도 마시면서 운수가 잘 풀리기를 기원한다. 세상 풍습이니 남들처럼 나도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일까?

정작 필요한 것은 외형이나 물질이 아니라 사방 한 치의 가슴이다. 올해는 마음이 본래 가진 진정성을 인정하고 양심이나 상식에 따라 살기를 바란다. 더 배울 것도 얻으려 애쓸 것도 없다. 누구나의 마음속에 이미 다 가진 것을 확인만 하면 된다.

조선일보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입력 : 2016.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