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의사들에게 왜 'VIP 증후군'이 생기는 걸까?

해암도 2016. 5. 29. 06:14

'빨리빨리'와 VIP 증후군  

- '이름'보다 실전 경험 중요

의사는 주사도 잘 놓는다? 채혈 자주하는 간호사들이 혈관 더 잘 찾아…
환자 더 잘 봐주려다가 실수하는 의사들도

피로와 체중 감소를 호소하는 환자가 있어 혈액검사를 하기로 했다. 아는 사람 소개로 일부러 찾아온 환자라서 조금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검사 항목을 적은 종이를 환자에게 건네며 "간호사에게 가서 채혈하시라"고 했더니 환자는 "내 혈관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러는데 직접 채혈해 주면 안 되겠느냐"며 팔뚝을 걷었다. 정작 들여다보니 환자의 혈관은 피를 뽑는 데 문제가 될 만큼 희미하지는 않았다.

사실 채혈은 나보다도 간호사들이 훨씬 잘한다. 가끔 영양제를 맞거나 채혈을 하러 오시는 나의 부모님도 간호사가 나보다 주삿바늘을 아프지 않게 잘 찌른다고 하실 정도다. 나 역시 수련의(인턴)와 전공의(레지던트) 때는 남 부럽지 않을 만큼 채혈을 많이 했다. 한때는 주사기를 던지면 혈관에 가서 꽂힌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일 뿐 환자의 혈관에서 피를 뽑아 본 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했다.

'빨리빨리'와 VIP 증후군
환자는 으레 의사가 뭐든지 더 잘하지 않겠느냐고 짐작한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마침 대기 환자도 없기에 직접 채혈해 드리겠다며 환자를 주사실로 안내했다. 혈관이 더 잘 보이도록 고무줄을 팔뚝에 감고 손가락으로 혈관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데 슬슬 시작되는 노안(老眼) 때문에 초점이 잘 안 맞아 혈관이 겹쳐 보였다. 안경을 벗고 눈을 팔뚝에 가까이 대서 혈관을 확인했다.

이쯤 되자 환자도 뭔가 불안한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의사는 사자의 마음과 천사의 손을 가져야 한다"는 금언은 과감하게 실행하고 섬세하게 수술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감하게 찔렀다. 피가 잘 나오는 듯하더니 곧 혈관이 터져버렸다. 환자가 자기도 모르게 움직인 것이다. 나도 그렇고 환자도 황망해했다. 다른 쪽 팔뚝에서 채혈을 다시 하긴 했지만 환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채혈에 실패하면 몇 주간 팔뚝에 멍이 들게 된다.

이런 경우를 의사들은 'VIP 증후군'이라 말한다. 환자를 좀 더 잘 봐주려고 평소와 달리 진료하다가 예상치 못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급한 부탁을 받아 원래 스케줄 사이에 있는 자투리 시간에 CT를 찍으려고 환자를 바삐 옮기다가 낙상 사고가 난다거나, 내시경을 한 지 10년이 지난 교수가 환자를 대우한다고 직접 내시경을 하다가 사고를 낸다든가 하는 경우를 말한다. 아무리 어떤 분야의 대가라 할지라도 손 놓은 지 오래되면 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VIP 증후군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인 '빨리빨리' 때문에 일어난다. 검사도 빨리, 수술도 빨리, 결과도 빨리 봐야 대접받는다고 느끼는 환자들과 조금이라도 더 잘해주려는 의사의 합작품인 셈이다. 가끔 집 안 청소를 할 때 빨리 청소를 끝내고 쉬고 싶은 마음에 청소기를 빠른 속도로 밀고 다니면 아내가 보다 못해 한마디 한다.

 "청소기는 그렇게 빨리 밀면 먼지가 잘 안 들어오고 천천히 밀어야 한다"고 말이다. 홈쇼핑 청소기 광고도 가만 보면 아주 느린 속도로 해야 이물질이 남지 않고 깨끗하게 청소가 된다. 급해도 뜸 들이지 않고 밥이 되지 않고 바늘 허리에 실 매어서 쓸 수는 없다.

병원에서도 정해진 대로, 하던 대로 하는 것이 환자에게나 의사에게나 좋은 일이다.

 조선일보    송태호 송내과의원 원장·의학박사       입력 : 2016.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