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진실을 원한다면 기본에 집중하라, 우직하게…

해암도 2016. 2. 27. 08:50

'스포트라이트'의 특종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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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라이트’(원제 Spotlight, 2월 24일 개봉, 토마스 맥카시 감독)는 진실을 찾아 힘겨운 걸음을 내디딘 기자들의 실화를 다룬 이야기다.

'스포트라이트'의 결말엔 허세가 없다
주인공들은 대단한 일을 해냈지만
영화는 이들을 영웅화하지 않는다
그 점이 더 큰 울림을 준다

2002년 미국 유력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 팀 기자 네 명은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해 온 교회를 고발해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28일(현지 시각) 열리는 제88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작품상 등 주요 부문을 비롯한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어마어마한 흡인력으로 관객을 쥐고 흔드는 이 영화, 대체 무엇이 특별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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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글로브’에 새로운 편집국장이 온다. 새 수장이 오는 데서 오는 적당한 설렘과 긴장이 신문사 전체로 퍼져 나간다. 이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신임 국장 마티 배런(리브 슈라이버)은 부임한 첫날, 가톨릭 사제의 아동 성추행 건을 깊이 취재하란 지시를 내린다. 기자 네 명으로 꾸려진 심층 취재 전문 스포트라이트 팀이 가동되는 순간이다.

이제 이야기는 여러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피해자 한 명의 아픔을 도드라지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고, 충격을 줄 요량으로 성추행 장면을 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토마스 맥카시 감독은 다른 길을 택한다.

선정적일 수 있거나 지나치게 감정을 자극하는 장면은 넣지 않았다. 대신 팀장 로비(마이클 키튼)와 기자 마이크(마크 러팔로)·샤샤(레이첼 맥애덤스)·매트(브라이언 다아시 제임스)가 집요하게 진실을 좇는 과정에만 집중한다. 기자들이 우직한 만큼 카메라도 우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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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라이트 팀이 진실을 찾는 방법이 우직하다는 건, 으레 붙이는 수사가 아니다. 이들은 엄청난 목격자나 증거 혹은 불법적인 방법에 기대지 않는다. 대신 취재의 ‘기본’에 집중한다. 요약하면 이렇다. 손 안에 있는 자료를 우습게 여기지 않기, 귀 기울여 듣기, 발로 뛰기.

사실 이들이 보도해 미국을 뒤흔든 사건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따금 기사화됐지만 단발성 폭로였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할 뿐이었다.

스포트라이트 팀은 그간 보도된 기사와 공개된 자료를 빠짐없이 읽는 일로 진실을 향한 첫걸음을 뗀다. 30년에 걸쳐 발생한 모든 사건을 순서대로 정리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마이크와 샤샤는 누구도 귀 기울여 듣지 않던 제보자의 말을 상세히 들음으로써 사건의 실체를 파악할 실마리를 얻는다.

그리고 수개월에 걸쳐 피해자·가해자·변호사 등 사건 관련자 수십 명을 직접 만나고 또 만난다. 교회는 조직적으로 취재에 훼방을 놓았고, 당시 일을 떠올리기 싫어하는 피해자들은 문전박대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이 집념의 기자들이 2002년 한 해 동안 내놓은 관련 기사는 600여 건으로, 사제 개인이 아닌 조직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었다. 놀랍도록 기본에 충실한 이들의 태도. 이것이 주는 감동과 울림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매력을 지니면서도 따로 놀지 않는다. 마이크는 저돌적이고 샤샤는 사려 깊다. 하지만 이들 기자 한 명 한 명의 태도와 대사를 한데 모으면 ‘진실에 다가가는 가장 올바른 방법’의 교과서로도 보인다.

실제 스포트라이트 팀은 최고의 팀워크를 자랑했고, 배우들은 훌륭한 연기 앙상블로 이를 재연한다. 덕분에 긴박한 이야기 중간중간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장면도 여럿 된다. 물론 ‘스테이션 에이전트’(2003) ‘비지터’(2007) 등 따뜻하고 유쾌한 드라마를 연출해 온 맥카시 감독과 드라마 ‘웨스트 윙’(1999~2006, NBC) 집필에 참여한 각본가 조쉬 싱어의 ‘케미’가 가장 큰 역할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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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 편집국장 마티를 눈여겨보자. 그는 마이애미에서 왔다. ‘보스턴 글로브’ 최초의 유대인 편집국장으로 결혼하지 않았으며 야구를 싫어한다. 한마디로 외부인이다.

초반부를 유심히 보면, 그가 『밤비노의 저주』란 책을 보는 장면이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보스턴 레드삭스가 1920년 홈런왕 베이브 루스(밤비노란 애칭으로 불렸다)를 뉴욕 양키스로 보낸 후 월드시리즈에서 연거푸 우승하지 못해 생겨난 말로, 보스턴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다.

야구엔 일말의 관심도 없는 그가 이 책을 집어든 건 보스턴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었을 터다. 혼자 교회와 맞서왔고, 이 팀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변호사 미첼(스탠리 투치) 또한 보스턴 출신이 아니다.

외부인에서 출발한 문제는 팀장인 로비로 대표되는 보스턴의 기자들 손에서 끝난다. 이 신문 구독자의 53%는 가톨릭 신자이고, 보스턴은 교회의 영향력이 막강한 곳이지만 이들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니 어쩌면 ‘스포트라이트’는 바로 옆에서 곪을 대로 곪아 있던 문제를 오래도록 직시하지 못했던 내부인들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늦게나마 정의를 향해 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 성찰 덕분일까. 이 작품에는 결말에서 한번쯤 부릴 법한 허세가 없다. 그 점이 더 큰 울림을 준다. 주인공들은 분명 대단한 일을 해냈지만 영화는 이들을 영웅화하지 않는다.

심지어 ‘퓰리처상을 받았다’는 자막조차 없다. 대신 이후의 상황을 간략히 자막으로 전한다. 전 세계 200여 도시에서 추가로 관련 사실이 폭로됐다는 것. 그러니까 아직, 스포트라이트 팀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2011년의 '보스턴 글로브' 편집국, 그대로 재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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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맥카시 감독은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스포트라이트 팀 기자들이 “내겐 영웅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이런 저널리즘이 이 시대에 얼마나 필요한지 경각심을 일깨우고 싶었다”는 그는, 이 영화가 “솔직하고 정확해야 했고, 무엇도 덧붙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촬영이나 시각적 연출의 모든 부분에서 그 점에 집중”한 이유다.

2001년의 ‘보스턴 글로브’ 편집국을 그대로 재현한 것도 그래서다. 미술감독 스테판 H 카터는 직접 이 신문사를 찾아가 내부 구조를 관찰했다. 그리고 토론토 외곽에 버려져 있던 백화점 건물 한 층에 칸막이로 분류된 좁은 업무 공간 120개를 똑같이 만들어 냈다. 인쇄 기계와 도서관 등은 보스턴 글로브 편집국에서 직접 촬영했다. 제작진에게 가장 어려웠던 일은 15년 전의 컴퓨터와 전자 제품을 준비하는 것이었다고. “요즘 쓰는 물건들이 실수로라도 보이지 않도록 온갖 소품을 꼼꼼히 준비했다”는 것이 카터의 설명이다.

스포트라이트 팀 기자들이 모두 실존 인물인 만큼 배우들의 노력도 엄청났다. “마이클 키튼이 내 모습을 완벽히 연기하는 모습에 놀라서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팀장 로비) “마크 러팔로는 내가 말하고 걷는 모습까지도 너무나 잘 포착해 냈다”(기자 마이크)는 것이 실제 인물들의 평이다. 인형 같은 외모의 레이첼 맥애덤스가 머리를 질끈 묶고, 패션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모습은 아마 처음일 것이다. 그럼에도 아름답다. 보면 알 수 있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