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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아이돌 스타도, 소설가 황석영도 이곳에선 예외 없이 줄을 서야
했다. 뉴욕에 도착한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 긴 비행으로 까칠해진 입을 달래려는 사람들이 365일 24시간 줄을 서는 곳, 미국
뉴욕 맨해튼 32번가 코리아타운 초입에 있는 설렁탕 전문점 감미옥에 대한 설명이다. 이런 풍경은 지난 1월로 막을 내렸다. 1990년 문을 열고
25년 동안 한자리를 지켰던 감미옥의 폐점 소식은 현지는 물론 한국에서도 화제였다.
감미옥의 폐점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가게 임대료 때문이다. 코리아타운이 뉴욕의 핫플레이스로 뜨면서 부동산 값이 폭등했다. 25년 동안 감미옥의 설렁탕 값은 6달러에서 12달러로 2배가 올랐지만, 임대료는 월 4000달러에서 월 6만달러까지 하루가 다르게 뛰었다. 감미옥의 추억을 그리워하던 한인들에게 지난 8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옛 감미옥과 같은 블록에 있는 건물 2층에 감미옥이 재오픈을 한 것이다.
한식의 시대가 왔다
지난 11월 9일 서울 광화문의 한 커피숍에서 한국에 다니러온 감미옥의 최형기(61) 사장을 만났다. 최 사장은 “코리아타운은 지금 과도기를 겪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코리아타운의 한식당은 30여개. 10분 단위로 이층버스가 중국인 등 관광객을 실어 나르면서 사람들을 쏟아 내지만 먹고살기는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임대료는 치솟는 반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가격을 올릴 수도 없고 주방 일손은 구하기 어렵다. 감미옥에 앞서 우촌식당, 뉴욕곰탕 등 코리아타운의 대표식당들이 줄줄이 폐점을 알린 이유이다. 그는 “코리아타운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면서 “한식의 시대는 지금부터”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의 상황을 “한식 세계화와 맞물려 굉장히 익사이팅하다”고 표현했다.
“1세대의 종말이 오고 1.5세대, 2세대들이 나왔다. 그들이 1세대와 다른 점은 미국인과의 자유로운 소통이다. 1세대가 실력으로 승부했다면 다음 세대는 매니지먼트가 가능하다. 굳이 비싼 코리아타운에 있을 필요가 없다. 뛰쳐나와 첼시 같은 곳으로 들어가 제대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젊은 세대들이 기마병이 돼서 골목골목에 한식을 심어야 한다.”
“한식이 뜨면 식재료시장이 뜬다. 식당을 키우는 문제가 아니라 음식산업을 키우는 일이다. 맨해튼, 보스턴, 워싱턴 등 동부 3곳을 접수하면 그 다음은 문제가 없다.”
“한식의 시대가 왔지만 문제는 사람이다. 미국에 음식을 배우러 오는 한국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프렌치요리만 배워 간다. 경력 쌓는다면서 유명 레스토랑만 간다. 한국 식당에는 일할 사람이 없다. 뉴욕에 한국 요리학교를 만들어서 요리사도 키우고 한식도 전파해야 한다.”
미국인에게 먹히는 한식은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도 답이 줄줄이 나왔다.
“일식 대표가 스시라면 한식 대표로 순두부를 내세워야 할 만큼 인기가 많다. 건강식이라는 명분이 확실하니까. 뜨끈한 돌솥에 비벼먹는 비빔밥도 대중적으로 나갈 수 있다. 재료에 로메인 등 그들이 좋아하는 재료를 섞어도 좋다. 무엇보다 제대로 먹힐 수 있는 것은 고기다. 고기가 주식인 만큼 한국식 고깃집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 생고기도 의외로 좋아한다.”
30년 음식 장사로 내공을 쌓은 만큼 그의 입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한식 세계화에 대한 조언은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할 내용이 많았다. 그는 “한식 세계화의 길도 보이고 돈도 보인다”고 했다. ‘한식 세계화’를 내걸고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현지에 대한 이해 없이 덤비는 걸 보면 안타까울 때도 많단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라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코리아타운을 떠나라면서 감미옥은 왜 다시 코리아타운이냐”는 물음에 그가 말했다.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다. 누군가는 코리아타운을 지켜야 한다. 역사는 끌고 가야 한다. 돈보다는 외로운 영혼들이 쉬었다 갈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노점상에서 맨해튼 정복까지
그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82년. 미국에 가기 전에는 싱가포르에서 2년여 선물백화점을 했다. 관광객이 밀려오던 시절이었다. 사업은 잘됐지만 값을 깎으려는 관광객과 실랑이 벌이는 일이 생리에 영 안 맞았다. 무작정 미국 LA로 건너갔다. 새벽시장에서 미친 듯이 일했지만 돈은 안 됐다. 지인이 “동부로 가라”면서 비행기 티켓을 사줬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노점상이 2달러짜리 배터리를 계속 파는 것을 보니 ‘여기선 뭘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액세서리 노점상을 시작했다. 브로드웨이 도매상 30곳을 돌며 물건을 떼 와 1개에 2달러, 3개에 5달러를 받고 팔았는데 사람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단다.
그러다 한 식당을 인수했다. 문 닫을 지경까지 실패를 맛보기도 하고 신문에 낸 만화광고로 벌떡 일어서기도 하고 권총강도를 당하기도 하면서 5년을 버텼다. 감미옥을 위해 공부를 한 셈이었다. 막걸리 팔고 빈대떡 부치고 메뉴가 많다 보니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았다. 이러다 죽겠다 싶었다. 햄버거 같은 ‘코리아 패스트푸드’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진한 곰탕 국물에 양지머리 넣고 김치 하나 제대로 만들어 맥도날드 같은 프랜차이즈에 도전해 보자, 미국서 성공하면 서울 명동, 제주도에도 진출해 보자. 아이디어는 새로웠지만 현실성은 없었다. 더구나 맨해튼에서 먹히기는 힘들었다. 대신 제대로 된 설렁탕으로 승부를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한국에 나와 설렁탕 맛집을 찾아다녔다. 50여곳을 거쳐 찾은 곳이 부천에 있는 감미옥이었다. 주인 소맷자락을 붙잡고 레서피를 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설렁탕으로 미국을 정복하자’는 설득에 결국 넘어간 주인 내외가 맨해튼까지 와서 감미옥의 맛을 전수해줬다. 부천의 감미옥은 그후 ‘한촌설렁탕’으로 이름을 바꿔 중국 베이징에까지 진출했다.
“손님 없어도 좋다. 3년은 눈 돌리지 말고 설렁탕만 생각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감미옥은 오픈하자마자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하루 평균 설렁탕만 1200여그릇이 팔렸다. 그는 “한때 코리아타운에서 제일 돈을 많이 벌었을 거다. 빌딩을 샀어야 했는데 그땐 빌딩이 그냥 성냥갑으로 보였다”면서 웃었다.
음식 맛도 있었지만 성공 뒤에는 번뜩이는 그의 아이디어도 한몫했다. 한 번은 계산을 잘못해 재료가 떨어졌다. 문 앞에 “탕이 떨어졌습니다. 저녁 7시에 만납시다”는 안내문을 붙이고 문을 닫았다. 입소문을 타고 손님이 몰려왔다. 광고의 힘도 컸다. 귀 잘린 반 고흐가 설렁탕을 들고 있는 광고, 삿갓 쓴 선비가 “코리아타운 여기 어디쯤인데”라고 말하는 광고는 그가 꼽은 히트작이다. 감미옥은 설렁탕 못지않게 김치 맛이 좋다. 김치 때문에 감미옥을 간다는 사람도 있다. 그는 맛의 비결은 좋은 재료라고 했다. 고춧가루는 지금도 한국에서 구입해간다. 값이 미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중국산의 5배로 1년치가 3000만원어치에 달한다고 한다.
설렁탕에 예술을 녹이다
뉴욕의 한인들에게 감미옥의 진한 국물은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는 약이었다. 백남준, 정크아티스트 정찬승, 신영옥, 조숙진 등 숱한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허기진 마음을 채웠다. “백남준은 한번 오면 설렁탕도 시키고 순대도 시키고 여러 가지를 시켜 뉴욕타임스지 펼쳐놓고 두 세 시간씩 앉아서 먹다 갔다. 밥을 한 번에 몰아서 먹는 것 같더라. 1990년대 전후를 생각하면 르네상스였다. 한국 예술가들이 넘쳐났다. 그들이 예술쟁이라면 나는 설렁탕쟁이라고 생각했다.”
예술가들을 돕는 데도 앞장섰다. 유학 온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졸업전시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안타까워 감미옥을 갤러리로 만들었다. 그는 “24시간 재즈음악 틀어놓고 피 흘리는 소 작품 등 전위적인 작품을 걸었지만 정작 손님들은 설렁탕 먹느라 바쁘더라”면서 웃었다. 2009년 뉴욕의 한인타운 플러싱에 ‘감미옥탕’을 만들 때는 아예 식당 옆에 갤러리를 따로 만들었다. ‘감미옥탕’은 지난해 정리했다. 그는 뉴저지주에서도 ‘감미옥’과 ‘최가냉면’을 운영하고 있다. 손님으로 만나 친구가 된 예술가들도 많다. 그중 세계적인 설치작가로 평가받는 강익중씨는 새 감미옥의 인테리어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한대수씨와도 30년 인연이다. 한때 음반기획사를 만들어 앨범을 딱 두 장 냈는데 그중 하나가 한대수 앨범이다. 인터뷰 중간에 꼭 할 말이 있다는 한대수씨와 전화 연결이 됐다. 한씨는 “최 사장이 32번가를 부흥시킨 사람이다. 재벌도 아니면서 동포 예술가들을 엄청 도와줬다. 존경스럽다. 감미옥에 예술작품을 걸면서 코리아타운 수준도 높아졌다. 그전엔 식당 입구에 아리랑 써놓고 색동옷 인형 세워 놓은 게 전부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감미옥 사장이 아닌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자유인의 DNA에 충실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새 감미옥은 아들에게 맡기고 본격적으로 놀아볼 계획이다. 자신의 음반도 내고 싶고 춤도 배우고 싶고 중국 역사 공부도 하고 싶다고 했다. 실컷 놀 계획을 늘어놓던 그가 “서촌에서 명인이 만드는 한국 술집을 발견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것을 뉴욕에 갖다 놔야 한다. 일본 사케바에 가면 브랜드만 봐도 술병을 들고 오고 싶은 게 많다. 우리는 겨우 소주가 전부다. 한식 세계화의 접근법이 틀렸다. 맨날 밥만 이야기하는데 술을 먼저 내놓고 안주를 이야기하면 훨씬 쉽게 먹힌다. 최근에 코리아타운에도 종로상회, 백정 등 술 마시는 고깃집이 들어왔다. 이제는 그곳에서 미국인들이 건배하고 폭탄주를 마신다.” 놀아 본 사람이 잘 노는 법이다. 그의 머리는 아직도 뉴욕의 한식 걱정을 하고 있었다.
감미옥의 폐점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가게 임대료 때문이다. 코리아타운이 뉴욕의 핫플레이스로 뜨면서 부동산 값이 폭등했다. 25년 동안 감미옥의 설렁탕 값은 6달러에서 12달러로 2배가 올랐지만, 임대료는 월 4000달러에서 월 6만달러까지 하루가 다르게 뛰었다. 감미옥의 추억을 그리워하던 한인들에게 지난 8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옛 감미옥과 같은 블록에 있는 건물 2층에 감미옥이 재오픈을 한 것이다.
한식의 시대가 왔다
지난 11월 9일 서울 광화문의 한 커피숍에서 한국에 다니러온 감미옥의 최형기(61) 사장을 만났다. 최 사장은 “코리아타운은 지금 과도기를 겪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코리아타운의 한식당은 30여개. 10분 단위로 이층버스가 중국인 등 관광객을 실어 나르면서 사람들을 쏟아 내지만 먹고살기는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임대료는 치솟는 반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가격을 올릴 수도 없고 주방 일손은 구하기 어렵다. 감미옥에 앞서 우촌식당, 뉴욕곰탕 등 코리아타운의 대표식당들이 줄줄이 폐점을 알린 이유이다. 그는 “코리아타운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면서 “한식의 시대는 지금부터”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의 상황을 “한식 세계화와 맞물려 굉장히 익사이팅하다”고 표현했다.
“1세대의 종말이 오고 1.5세대, 2세대들이 나왔다. 그들이 1세대와 다른 점은 미국인과의 자유로운 소통이다. 1세대가 실력으로 승부했다면 다음 세대는 매니지먼트가 가능하다. 굳이 비싼 코리아타운에 있을 필요가 없다. 뛰쳐나와 첼시 같은 곳으로 들어가 제대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젊은 세대들이 기마병이 돼서 골목골목에 한식을 심어야 한다.”
“한식이 뜨면 식재료시장이 뜬다. 식당을 키우는 문제가 아니라 음식산업을 키우는 일이다. 맨해튼, 보스턴, 워싱턴 등 동부 3곳을 접수하면 그 다음은 문제가 없다.”
“한식의 시대가 왔지만 문제는 사람이다. 미국에 음식을 배우러 오는 한국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프렌치요리만 배워 간다. 경력 쌓는다면서 유명 레스토랑만 간다. 한국 식당에는 일할 사람이 없다. 뉴욕에 한국 요리학교를 만들어서 요리사도 키우고 한식도 전파해야 한다.”
미국인에게 먹히는 한식은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도 답이 줄줄이 나왔다.
“일식 대표가 스시라면 한식 대표로 순두부를 내세워야 할 만큼 인기가 많다. 건강식이라는 명분이 확실하니까. 뜨끈한 돌솥에 비벼먹는 비빔밥도 대중적으로 나갈 수 있다. 재료에 로메인 등 그들이 좋아하는 재료를 섞어도 좋다. 무엇보다 제대로 먹힐 수 있는 것은 고기다. 고기가 주식인 만큼 한국식 고깃집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 생고기도 의외로 좋아한다.”
30년 음식 장사로 내공을 쌓은 만큼 그의 입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한식 세계화에 대한 조언은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할 내용이 많았다. 그는 “한식 세계화의 길도 보이고 돈도 보인다”고 했다. ‘한식 세계화’를 내걸고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현지에 대한 이해 없이 덤비는 걸 보면 안타까울 때도 많단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라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코리아타운을 떠나라면서 감미옥은 왜 다시 코리아타운이냐”는 물음에 그가 말했다.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다. 누군가는 코리아타운을 지켜야 한다. 역사는 끌고 가야 한다. 돈보다는 외로운 영혼들이 쉬었다 갈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노점상에서 맨해튼 정복까지
그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82년. 미국에 가기 전에는 싱가포르에서 2년여 선물백화점을 했다. 관광객이 밀려오던 시절이었다. 사업은 잘됐지만 값을 깎으려는 관광객과 실랑이 벌이는 일이 생리에 영 안 맞았다. 무작정 미국 LA로 건너갔다. 새벽시장에서 미친 듯이 일했지만 돈은 안 됐다. 지인이 “동부로 가라”면서 비행기 티켓을 사줬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노점상이 2달러짜리 배터리를 계속 파는 것을 보니 ‘여기선 뭘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액세서리 노점상을 시작했다. 브로드웨이 도매상 30곳을 돌며 물건을 떼 와 1개에 2달러, 3개에 5달러를 받고 팔았는데 사람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단다.
그러다 한 식당을 인수했다. 문 닫을 지경까지 실패를 맛보기도 하고 신문에 낸 만화광고로 벌떡 일어서기도 하고 권총강도를 당하기도 하면서 5년을 버텼다. 감미옥을 위해 공부를 한 셈이었다. 막걸리 팔고 빈대떡 부치고 메뉴가 많다 보니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았다. 이러다 죽겠다 싶었다. 햄버거 같은 ‘코리아 패스트푸드’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진한 곰탕 국물에 양지머리 넣고 김치 하나 제대로 만들어 맥도날드 같은 프랜차이즈에 도전해 보자, 미국서 성공하면 서울 명동, 제주도에도 진출해 보자. 아이디어는 새로웠지만 현실성은 없었다. 더구나 맨해튼에서 먹히기는 힘들었다. 대신 제대로 된 설렁탕으로 승부를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한국에 나와 설렁탕 맛집을 찾아다녔다. 50여곳을 거쳐 찾은 곳이 부천에 있는 감미옥이었다. 주인 소맷자락을 붙잡고 레서피를 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설렁탕으로 미국을 정복하자’는 설득에 결국 넘어간 주인 내외가 맨해튼까지 와서 감미옥의 맛을 전수해줬다. 부천의 감미옥은 그후 ‘한촌설렁탕’으로 이름을 바꿔 중국 베이징에까지 진출했다.
“손님 없어도 좋다. 3년은 눈 돌리지 말고 설렁탕만 생각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감미옥은 오픈하자마자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하루 평균 설렁탕만 1200여그릇이 팔렸다. 그는 “한때 코리아타운에서 제일 돈을 많이 벌었을 거다. 빌딩을 샀어야 했는데 그땐 빌딩이 그냥 성냥갑으로 보였다”면서 웃었다.
음식 맛도 있었지만 성공 뒤에는 번뜩이는 그의 아이디어도 한몫했다. 한 번은 계산을 잘못해 재료가 떨어졌다. 문 앞에 “탕이 떨어졌습니다. 저녁 7시에 만납시다”는 안내문을 붙이고 문을 닫았다. 입소문을 타고 손님이 몰려왔다. 광고의 힘도 컸다. 귀 잘린 반 고흐가 설렁탕을 들고 있는 광고, 삿갓 쓴 선비가 “코리아타운 여기 어디쯤인데”라고 말하는 광고는 그가 꼽은 히트작이다. 감미옥은 설렁탕 못지않게 김치 맛이 좋다. 김치 때문에 감미옥을 간다는 사람도 있다. 그는 맛의 비결은 좋은 재료라고 했다. 고춧가루는 지금도 한국에서 구입해간다. 값이 미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중국산의 5배로 1년치가 3000만원어치에 달한다고 한다.
설렁탕에 예술을 녹이다
뉴욕의 한인들에게 감미옥의 진한 국물은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는 약이었다. 백남준, 정크아티스트 정찬승, 신영옥, 조숙진 등 숱한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허기진 마음을 채웠다. “백남준은 한번 오면 설렁탕도 시키고 순대도 시키고 여러 가지를 시켜 뉴욕타임스지 펼쳐놓고 두 세 시간씩 앉아서 먹다 갔다. 밥을 한 번에 몰아서 먹는 것 같더라. 1990년대 전후를 생각하면 르네상스였다. 한국 예술가들이 넘쳐났다. 그들이 예술쟁이라면 나는 설렁탕쟁이라고 생각했다.”
예술가들을 돕는 데도 앞장섰다. 유학 온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졸업전시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안타까워 감미옥을 갤러리로 만들었다. 그는 “24시간 재즈음악 틀어놓고 피 흘리는 소 작품 등 전위적인 작품을 걸었지만 정작 손님들은 설렁탕 먹느라 바쁘더라”면서 웃었다. 2009년 뉴욕의 한인타운 플러싱에 ‘감미옥탕’을 만들 때는 아예 식당 옆에 갤러리를 따로 만들었다. ‘감미옥탕’은 지난해 정리했다. 그는 뉴저지주에서도 ‘감미옥’과 ‘최가냉면’을 운영하고 있다. 손님으로 만나 친구가 된 예술가들도 많다. 그중 세계적인 설치작가로 평가받는 강익중씨는 새 감미옥의 인테리어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한대수씨와도 30년 인연이다. 한때 음반기획사를 만들어 앨범을 딱 두 장 냈는데 그중 하나가 한대수 앨범이다. 인터뷰 중간에 꼭 할 말이 있다는 한대수씨와 전화 연결이 됐다. 한씨는 “최 사장이 32번가를 부흥시킨 사람이다. 재벌도 아니면서 동포 예술가들을 엄청 도와줬다. 존경스럽다. 감미옥에 예술작품을 걸면서 코리아타운 수준도 높아졌다. 그전엔 식당 입구에 아리랑 써놓고 색동옷 인형 세워 놓은 게 전부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감미옥 사장이 아닌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자유인의 DNA에 충실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새 감미옥은 아들에게 맡기고 본격적으로 놀아볼 계획이다. 자신의 음반도 내고 싶고 춤도 배우고 싶고 중국 역사 공부도 하고 싶다고 했다. 실컷 놀 계획을 늘어놓던 그가 “서촌에서 명인이 만드는 한국 술집을 발견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것을 뉴욕에 갖다 놔야 한다. 일본 사케바에 가면 브랜드만 봐도 술병을 들고 오고 싶은 게 많다. 우리는 겨우 소주가 전부다. 한식 세계화의 접근법이 틀렸다. 맨날 밥만 이야기하는데 술을 먼저 내놓고 안주를 이야기하면 훨씬 쉽게 먹힌다. 최근에 코리아타운에도 종로상회, 백정 등 술 마시는 고깃집이 들어왔다. 이제는 그곳에서 미국인들이 건배하고 폭탄주를 마신다.” 놀아 본 사람이 잘 노는 법이다. 그의 머리는 아직도 뉴욕의 한식 걱정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