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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란의 집은 어디인가

해암도 2015. 9. 17. 08:31

빨간 티셔츠에 종아리가 살짝 보이는 파란 팔부 바지. 모래밭에 누워 있는 아이는 잠시 쉬거나 숨바꼭질을 하는 듯하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잔잔한 파도가 계속 귀여운 얼굴에 닿아도 아이는 움직이지 않으니 말이다.


 머나먼 시리아에서 아빠·엄마·형의 손을 잡고 터키까지 피난 온 세 살배기 아일란 쿠르디다. 그리스로 가던 작은 고무보트는 뒤집혔고, 엄마·형과 함께 아이는 아름다운 휴양지 보드룸 해변에서 차가운 시신으로 변해버렸다.

아이의 죽음은 그동안 냉정하기만 하던 유럽 국가들의 난민 정책을 수정하게 하는 듯하다. 독일·영국·프랑스가 모두 추가로 난민을 받아주겠다는 발표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잠깐, 우리 모두 잠시만 솔직해져 보자. 아이의 죽음이 우리 마음을 연 것이 아니다. 죽은 아이의 사진이 우리 마음을 연 것이다.

인간의 뇌는 물론 본인의 생존을 위해 진화한 기계일 것이다. 하지만 혼자로서는 나약하기만 한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기도 하다.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이타주의, 배려, 공감 그리고 연민.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에게 쉽지 않은 숙제이다.

풀기 어려운 숙제는 풀기 쉽게 재해석하면 된다. 이타주의가 어려운 우리에겐 '자기 집단 중심적 이타주의(parochial altruism)'라는 재해석이 존재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은 나와 비슷한 유전자를 가졌을 것이기에 나와 비슷한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나 자신을 돕는 것이다. 이기주의로 재해석할 수 있어야만 이타적 행동이 가능할 정도로 형편없는 우리지만 반대로 '공감'을 느끼는 순간 인간은 위대해질 수 있다.

아일란의 집은 어디인가? '내가 지금 있는 곳'이라는 이타적인 답이 나오려면 해변에 누워 있는 아일란이 우리의 자식·동생·조카이고, 우리의 조카·동생·자식 역시 언제든지 또 다른 해변에 떠내려올 수 있다는 공감을 형성해야 한다.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        입력 : 2015.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