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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산문 '라면을 끓이며'

해암도 2015. 11. 25. 19:37

지옥을 헤매는 보통 사람 심금 울리는 김훈 산문의 정수

먼저 물 500㎖와 분말수프, 면을 준비한다. 비등점에 닿은 수증기가 냄비 뚜껑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시끌시끌해진다. 펄펄 끓는 물에 먼저 수프를 넣고 면을 투하한다. 식성에 따라 김치ㆍ파ㆍ계란 등을 곁들여도 좋다. 칼로리 섭취를 줄이고 싶다면 면을 따로 끓여서 합치면 된다.

작가 김훈이 쓴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문학동네)가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2위에 올라 있다. 오래전에 절판된 ‘밥벌이의 지겨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바다의 기별’에서 기억할 만한 산문을 가려 뽑고 새로 쓴 원고를 보탠 책이다. 가족 이야기부터 기자 시절 거리에서 쓴 글, 도시를 견디지 못하고 동해와 서해의 섬에 들어가 길어올린 글도 있다. 출판사는 “먹고 살기의 지옥을 헤매는 보통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김훈 산문의 정수”라는 홍보 카피를 뽑았다.

김훈은 식재료의 개별성이 한 개씩 씹히는 음식을 좋아한다. 무더운 여름날, 몸과 마음이 지쳐서 흐느적거릴 때, 밥을 물에 말고 밥숟가락 위에 통통한 새우젓을 한 마리씩 얹어서 점심을 먹으면 뱃속이 편안해지고 질퍽거리던 마음이 뽀송뽀송해진다고 그는 썼다. 무짠지가 우러난 국물에 찬밥을 말아먹기도 한다. “그 맛은 단순하고 선명해서 음식의 맛이라기보다는 모든 맛이 발생하기 이전의 새벽의 맛이고,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시원적인 맛이다.”

김훈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김훈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김밥은 끼니를 감당할 수 있는 음식이지만 끼니를 해결하는 밥 먹기의 엄숙성에서 벗어나 있다. 김훈은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김밥은 끼니이면서도 끼니가 아닌 것처럼 가벼운 밥 먹기로 끼니를 때울 수도 있다. 김밥으로 끼니를 때울 때, 나는 삶의 하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뚱뚱한 김밥 옆구리가 터져서, 토막 난 내용물이 쏟아져 나올 때 나는 먹고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비애를 느낀다.”

이문열은 소설 ‘변경’에서 라면의 맛에 경의를 표했다. 1960년대 초였다. “노랗고 자잘한 기름기로 덮인 국물에 곱슬곱슬한 면발이 담겨 있었는데, 그 가운데 깨어 넣은 생계란이 또 예사 아닌 영양과 품위를 보증하였다. (…) 철은 갑작스레 살아나는 식욕으로, 그러나 아주 공손하게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의 주관적인 느낌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맛난 음식을 먹는 듯했다.”

농심이 만든 짜장 라면 ‘짜왕’이 최근 롯데마트를 비롯해 몇몇 매장에서 ‘신라면’보다 많이 팔린 것으로 보도되었다. 25년 라면 판매 1위의 아성을 부분적으로 허물어뜨린 것이다. “'짜왕'의 인기가 앞으로 계속될지 단정할 순 없지만 예상보다 많이 판매되고 있다”고 농심 측은 밝혔다. 한 달 동안 90억원어치가 팔렸다고 한다.

김훈이 썼듯이 라면 앞에서는 우리 모두 평등하다. 남녀노소가 없고 갑부도 이 B급 먹거리를 먹지 않곤 못 배긴다. 아이들은 라면을 끓이면서 불과 물, 음식의 상호관계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라면은 간편한 식품 이전에 하나의 음식 혁명이었고 우리 삶이라는 드라마에 꼭 필요한 조역”(음식 칼럼니스트 박찬일)이다.

한국인의 1인당 라면 소비량이 연간 73봉지다. 원산지 일본(1인당 43봉지)을 따돌리고 세계 1위. 50년 라면사(史)에 헌정하는 책 ‘라면이 없었더라면’(로도스)도 함께 읽기를 권한다. 속이 괴로운 날에 당기는 식사일 수도 있다. 알게 모르게 삶을 지탱해준 음식에 대한 이야기다.


  • 박돈규 블로그
    문화부 기자
    E-mail : coeur@chosun.com
    대학에서 미생물학과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연극학을 공부했다. &..
  • 입력 : 2015.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