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배우자의 바람을 덮고 살아간다는 것

해암도 2015. 9. 16. 06:16

바람 핀 남편과 못 헤어지고 그냥 살고 있는 바보같은 여자입니다.

본인이 그 여자 좋아했다고 인정했고, 그 여자도 같은 마음으로

불장난을 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깊은 관계는 없었다고 주장하네요.

그 말 같지도 않은 주장을 믿는 건 아니지만,

더 이상의 증거는 찾을 수 없는 상태예요.

일이 터졌던 그 당시에는, 도저히 한 공간에서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믿었던 사람이기에, 또 제 자신이 그런 쪽으로 전혀 딴 마음이 없는 사람이기에

더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애들 생각해서 이혼은 안 하기로 마음 먹었고,

함께 사는 한 가능하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자고 노력해왔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달라진 건 없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언제나 망망대해 위를 혼자 떠도는 기분입니다.

그 일 이후 남편과 100퍼센트 진심으로 대화를 한 적이 없습니다.

예전과 달리 자꾸 마음 속의 혼잣말이 생겨납니다.

남편이 무슨 말을 해도, 대답 대신 혼잣말을 하게 됩니다.

내가 그런 말을 믿을 것 같아? 나를 등신으로 보는 거군.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그럴 때 남편은 채근합니다.

왜 대답을 안 해? 무슨 생각해?

 

물론 어떨 때는 지난 일 다 잊고 진심 행복하고 좋을 때도 있습니다.

주로 애들 일로 같이 웃을 때는, 진심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다행히 아이들이 건강하고 반듯하게 자라주어서 그런 순간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사실에...

 

그러나 갑자기 무슨 계기로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면

저는 순식간에 분노에 휩싸입니다.

창문 열고 뛰어내리든지, 내 살림살이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입니다.

그런 순간이 잦지는 않지만, 그 분노의 깊이는 조금도 얕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도, 남편의 어떤 단어나 표현이 저를 그 때 그 사건으로

단박에 되돌려놓아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남편은 새삼스럽고 억울하다고 느끼는지 모르지만,

저는 제 안에 이렇게 큰 분노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제 자신이 너무 처참하게 느껴집니다.

 

그런 감정의 롤러 코스터를 타고 있는 저.

물론 남편도 힘들겠지만, 그게 다 누구 때문인가요?

제가 원해서 이런 성격파탄의 길을 걷고 있는 건가요?

 

그러나 남편은 그 때의 그 사건을 까맣게 잊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 유명 변호사가 연루된 스캔들을 보며 남편은 혀를 차더군요.

인간이 한심하다고요. 가족들이 안 됐다고요.

본인이 저지른 일을 기억한다면 제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요?

차이점이 대체 뭘까요?

같이 잤느냐 안 잤느냐의 차이?

안 잤다고 주장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요?

 

유명인인 그 사람은 많은 걸 잃고 전국적인 망신을 당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유명하지 않은 우리 남편은 별로 잃은 게 없어 보입니다.

잃은 게 있다면 제 마음을 잃었겠지요.

하지만 그 따위 마음이 대수일까요?

아내의 마음이 소중했던 사람이었다면 허튼 짓도 하지 않았겠지요.

 

남편은 오늘 제게 이런 불만도 호소하더군요.

요즘 들어 남편 대접이 소홀한 것 같다고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럴 거라고 했잖아.

평생 소홀할 거라고 했고, 당신은 감수하겠다고 했잖아.

 

맞습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남편한테 잘해주기가 싫습니다.

한 가지 더 해주려다가도 흠칫 움츠리게 됩니다.

돈 벌어다 주고, 애들에겐 좋은 아버지니까 그에 걸맞는 대접을 해야겠지요.

하지만 예전처럼 진심에서 우러나는 그 무엇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남편을 나의 보호자로 생각하고,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한 사람으로 알던 그 마음이

깨어졌는데

남편을 향한 제 눈길, 손길이 어떻게 그대로일까요?

 

저는 남편한테 애초에 경고를 했었습니다.

앞으로 당신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라고요.

그러나 남편은 그런 말에 귀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냥 대충 수습해서 넘어가면, 세월이 약이 되려니 하더군요.

물론 세월이 약이 되었더라면, 서로 좋았겠지요.

하지만 여자 마음은 안 그렇더군요.

정말 저 하나, 제 마음 하나만 생각한다면

남편을 억지로 용서한 척 하고 살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릇이 작아서 용서가 안 되는데, 이것저것 생각해서 용서한 척 하고 살자니

마음이 터질 것 같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잊는 것일 텐데, 저는 조금도 잊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남편이 모든 걸 잊고, 저에게 왜 잊지를 못하느냐고 화를 냅니다.

우리 가정의 유일한 문제는 제 성격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본인이라면, 마누라가 바람피우다 걸려도 이 정도 시간 지나면 잊을 것 같답니다.

 

남편이 가장 원망스러운 건, 나 아닌 여자를 마음에 두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게 고통스러웠던 때는 그래도 남편에 대한 사랑이랄까, 그런 게 남아 있을 때였습니다.

지금은, 제 성격, 제 일상을 망쳐놓은 게 제일 원망스럽습니다.

밝고 명랑하다 소리 듣던 사람인데,

환하게 웃는 게 잘 안 되는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네요.

아이들한테도 화 잘 내는 엄마가 되어가고 있고요.

 

제 앞에 펼쳐진 남은 결혼 생활은 어떤 것일까요?

저는 남편에게 냉랭하고, 남편은 부당하다고 느끼겠지요.

남편이 조금만 제 신경을 건드려도 저는 분노가 폭발합니다.

제 분노 앞에 남편이 어떠한 항변도 하지 말 것을 저는 요구할 테고

남편은 저를 성격 파탄자로 몰아붙이겠지요.

 

남편은 그 모든 파탄이 제 성격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저는 배우자의 외도 이후 모든 부부가 가는 길을 가는 것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가는 내리막길을 우리는 안 가기 위해서는

제가 마음을 다잡고 변해야겠지만

저는 평범한 여자일 뿐이네요.


2015, 09, 16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