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신경숙을 위한 변명: ‘표절’을 부탁해

해암도 2015. 6. 23. 07:16


이런 상상을 했다.
처음부터 그럴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훌륭한 작품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적다 보면 그 에너지가, 그 아우라가 손끝을 거쳐 심장과 머릿속 끝까지 고스란히 전달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성스러운 기운이 내면의 화학작용을 통해 다시 머릿속 끝에서 심장을 거쳐 손끝을 통해 뭉게뭉게 배어나올 것이라 확신했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어 누군가 내 작품을 이렇게 필사하게 만들고야 말리라는 다짐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눈이 침침해지고 팔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파도, 더욱 야무지게 적고 또 적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마음에 쏙 드는 문장이 나타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표현은 언젠가 써먹으리라는 생각에 고급진 하드커버 양장 노트에 따로 적어두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 노트를 ‘내 마음의 보석상자’ 따위로 부르기도 했을 것이다. 페이지마다 형형색색 포스트잇을 색깔별로 붙여놓기도 했을 것이다. 포스트잇마다 ‘기쁨의 표현‘슬픔의 표현‘애정의 표현‘분노의 표현’으로 나누고 여러 작품에서 감명받은 대목을 분야별로 적어놓았을 것이다. 

이런 ‘영양가 있는 문장’들의 출처는 꼼꼼히 적어놓았겠지만, 미처 적어놓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생각만은 했을 것이다. 이 노트에 적혀있는 글들은 다른 데서 베껴온 것들이니 작품에 활용할 때는 반드시 고치고 다듬어서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말 것이라고, 빨간 마크를 노트 위에 해놓았을 것이다.

맨 처음 한 대목만 ‘활용’했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을 것이다. 혹시나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칭찬하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문장을 쓸 수 있느냐고 부러워했을 것이다. ‘활용’은 점점 늘어갔을 것이다. 많이 쓰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내면의 악마가 유혹했을 것이다. 나도 사실 이런 표현 정도는 원래 할 수 있었다고, 다만 누군가 먼저 썼던 것 뿐이라고 스스로 설득했을 것이다. 조미료는 몸에 나쁘지만 맛을 내기 위해서는 약간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점점 유명해졌을 것이다. 기대만큼 부담은 곱절로 커졌을 것이다. 이제는 ‘내 마음의 보석상자’ 따위 없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것이다. 아니면 더욱 은밀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걸려버렸을 것이다. 이것이 표절 아니냐고 정색하는 글이 온라인에서 일파만파 퍼졌을 것이다. 그동안 간혹 문제가 제기됐어도 흐지부지되던 책 동네와 달리 스마트폰에서는 빛의 속도로 전달됐을 것이다. 곧 도처에서 천둥번개가 쳤을 것이다.

큰 비만 피해가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계적인 작가가 된 만큼 한마디만 하면 이해해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오래전 금각사 외엔 읽어본 적 없는 작가로 해당 작품(우국)은 알지 못한다. 이런 소란을 겪게 해 내 독자분들께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풍파를 함께 해왔듯이 나를 믿어주시길 바랄 뿐이고,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겐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

해놓고 나서 보니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발뺌과 모르쇠 대신 진솔한 사과가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막급했을 것이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라는 말은 괜히 적었다 싶었을 것이다. 동조한 출판사도 ‘입장 표명’에서 “당부드린다“억측임을 밝힌다”고 독자를 힐난하는 투로 적은 것을 자책했을 것이다.

그래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옛 말이 생각났을 것이다. 그 구멍은 진정한 반성과 사과에 있다는 생각도 아마 하고 있을 것이다. ‘결자’가 ‘해지’해야 할 것이다. 베끼기는 문단의 관행이오. 나만 당하는 것은 억울하오” 대신 “관행은 잘못된 것이오. 무조건 내 탓이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적폐’는 다 함께 반성하고 이제부터는,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말자. 제가 앞장서겠다”고 머리를 조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2015년 6월 16일은 광복 7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스스로 고질적인 병폐 척결을 천명한 자랑스러운 표절 근절 기념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안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정형모 중앙 SUNDAY 문화 에디터
형(hyung)님네 만화(萬話)가게 http://blog.joins.com/hyung38


중앙 SUNDAY 문화 에디터
[J플러스] 입력 2015-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