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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病'

해암도 2015. 6. 12. 06:04

젊은 재미 한국인 변호사가 한국에 와 몇 년 국제변호사로 일했다. 공부 잘해 입신한 청년이라고들 부러워했지만 그는 자랑스러운 게 따로 있었다. 미국 여러 마라톤대회 아마추어 부문에 나가 완주한 기록을 이력서에 빠뜨리지 않았다. 그가 어느 마라톤 애호가에게 말했다. "마라톤 얘기를 꺼내면 미국 사람들은 '대단하다. 왜 먼 길을 뛰느냐'고 묻는다. 한국 사람은 '몇 등 했느냐' 묻고는 등수가 없다고 하면 '그걸 왜 뛰느냐'고 한다."

▶미국 고교·대학엔 수석·일등이라는 말이 없다. 졸업식 고별사를 하는 졸업생 대표(Valedictorian)를 제일 우수한 학생으로 친다. 그나마 한 명에게 명예가 집중되는 게 부담스러워 여럿 선정하는 고교가 늘고 있다. 몇 초씩 나눠 연설하게 하거나 추첨으로 연설자를 뽑기도 한다. 대학에선 우등생에게 주는 라틴어 학위 이름이 세 단계로 나뉜다. '숨마 쿰 라우데' '마그나 쿰 라우데' '쿰 라우데'다. 하버드의 경우 각기 상위 10·20·30%에 해당한다.

[만물상] '일등病'
▶세 호칭을 가르는 성적 분포 비율도 대학마다 다르다. 학교에 따라 '우등'을 뜻하는 'Honour' 또는 'Distinction'으로 뭉뚱그려 부른다. 한국인 졸업생이 받은 '숨마 쿰 라우데'나 '마그나 쿰 라우데'가 국내에 '수석 졸업'으로 부풀려 알려지곤 했다. '수석'과 '일등'에 익숙한 한국 사회에서 생긴 오해와 와전(訛傳)이다. 여러 해외 명문대에 합격한 학생도 한국에선 유독 화제가 된다.

▶하버드와 스탠퍼드대가 한 학생을 동시에 입학시켜 학점을 서로 인정한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미국 명문고에 유학 간 한국 여고생이 얼마나 빼어나기에 그런가 하고 놀랐다. 진기(珍奇)한 사연은 곧 아귀가 어긋났다. 그가 받았다는 합격통지서를 두 대학은 발행한 적이 없다고 했다. 두 학교에서 공부하는 프로그램도 없다고 한다. 미국 학생·학부모는 명문대라 해서 무턱대고 가지 않는다. 전공할 분야가 우수한지, 분위기와 장학 제도는 어떤지 두루 살펴 고른다.

▶어느 입학 컨설턴트는 "한국인 기준은 단 하나"라고 말한다. '그 학교 문패에 대한 한국 내 평판'이다. 유대인은 일류병(病)이 거의 없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패배 교육'을 받는다.

유대 명절 유월절을 되새기는 기도문도 '우리는 이집트의 종이었다'로 시작한다. 그들에겐 패배나 실패가 좌절일 수 없다. 우리는 '일등'만 쳐다보고 가다 황폐해진 삶을 수없이 본다. 언론부터 눈에 일등병(病)이 씐 게 아닌지 되돌아본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   입력 : 2015.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