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처음 만난 스물 세 살 때부터 지금까지 20여년을 되돌아보면
저는 오직 한 가지 목표만 바라보며 묵묵히 걸어온 것 같네요.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줌마가 되자! 라는.....
대학 졸업하고는 당연한 듯 취직을 했고, 그 뒤로 딴 생각 없이 직장생활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내게 남편이 적극적으로 다가왔고, 저는 이십대엔 원래 연애해야 되는 줄 알고 남편을 만났습니다.
사귀었으니 결혼해야 되는 줄 알았고, 결혼했으니 애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네요. 그 뒤로는......
남들처럼 집과 차를 소유하고, 아이에게 필요한 교육이나 여러 가지를 넉넉하게 제공할 수 있는 부모가 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지금까지 맞벌이로 일하면서, 집안 살림하고, 애도 나 혼자 애면글면 키운 거나 마찬가지지만
억울하다든지, 힘들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시부모님 때문에 힘들었던 부분도, 원래 자식 노릇이 이런 거라 생각하고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누가 뭐래도 일 열심히 하고, 아껴 쓰며, 이렇게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온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좋은 날’이 과연 어떤 날이었을까요?
2013년 말에, 남편이 제게 이혼을 요구하더군요.
집과 애를 다 줄 테니 이혼만 해달랍니다.
이유는 서로 안 맞아서 못 살겠다는, 더 이상 같이 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뭐가, 어떤 부분이 그렇게 안 맞느냐고 하니, 그건 그냥 느낌이래요. 갑갑하고 지친답니다.
여자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이래서 너하고는 안 된다네요.
내 얘기 하지말고 니 얘기 하라고 했어요. 여자 있느냐고요.
그러자 더 이상 대화가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 박차고 일어서더군요.
결론은 이렇습니다.
남편은 이혼 얘기 꺼내고 석 달 만에 짐을 싸들고 나갔습니다.
당분간 떨어져서 생각해보자지만, 결국 이혼 못 해주겠다고 하니까 집나간 겁니다.
저는 아이와 함께 원래 살던 대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출근하고 아이는 등교하고,
저녁 때 집에 돌아와서 저는 집안일을 전보다 더 반들반들하게 하고 있고, 아이는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남편이라는 인간은 워낙 밤 늦게 들어와 잠만 자고 나가던 존재인지라, 일상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었어요.
지가 여자 때문에 저러든, 다른 정신병이 들었든, 나는 내 집 내 아이 지키며 이 자리에서 버티겠다 생각했지요.
그런데 한 석 달 미친 여자처럼 일만 하다가 제가 병이 났습니다.
열흘 몹시 아프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더군요.
거울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단어가 ‘무뇌충’이었습니다.
제가 살아온 삶은, 착한 무뇌충의 삶이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고, 남들 가는 길만 **아가면 저절로 살아지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위해 생각하고 투자한 건 하나도 없고,
속으로 딴 생각중인 남편과, 피 한 방울 안 섞인 시집식구들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제일 한심한 건, 그 동안 제가 나름 행복했다는 겁니다.
남들은 맛있는 음식 먹고, 좋은 옷 입고, 해외여행 다닐 때 행복하다던데, 저는 바보처럼 이런 게 행복했어요.
나도 자식 있다. 나도 남편이 있다. 나도 어지간한 시어머니가 있다. 나도 집이 있어서 세금을 낸다. 나도 차가 있어서 딱지를 뗀다....
남편도 나와 같은 무뇌충 바보였다면 우리는 행복한 벌레들로 인생을 마쳤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남편은 저보다 똑똑한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제 눈에 고운 거, 제 입에 달콤한 거, 제 마음에 흡족한 것들을 찾아 떠나버렸습니다.
그게 여자인지, 자유인지, 혹은 내가 없는 세상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버리고 떠날 수 있는 것만 봐도 대단해보이네요.
거울을 들여다보며 생각했습니다.
어디가 비뚤어지고 못나서 사람을 떠나가게 했을까? 나보다 더 못난 여자도 사랑 받고 살던데...
대답 없이 저를 노려보는 우중충한 얼굴이 갑자기 너무 낯설더군요.
원래의 모습은 다 지워지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지하창고 같이 되어 있는 얼굴이요.
그 날 이후 저는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었습니다.
저를 가꾸고, 꾸미는 일이 이렇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줄 몰랐어요.
처음엔 에스테틱부터 찾아갔습니다.
제 또래 여자들 다 받는다던 마사지나 받으며 기분전환이라도 해보려고요.
그런데 그 마사지라는 게, 희한하더군요. 피부를 좋게 해주거나 고쳐주는 게 아니었어요.
죽어있던 몸의 느낌을 살려주는 거였지요.
누워서 눈 감고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나 자신이 한없이 귀중한 존재처럼 느껴지더군요.
그냥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이렇게 대접을 해주는구나. 저한테는 신세계의 문이 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느낌이 달라지자 다른 사람들도 자세히 보게 되더군요.
다른 여자들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표정으로 다니나....
그들을 흉내내며 저도 옷을 사 입고, 미용실을 드나들고, 성형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쪽 세계엔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넘쳐나던지.
그 동안 나 모르게 이 많은 여자들이 자기 몸단장에 시간과 돈을 쏟아붓고 있었다는 게, 신기하고 억울할 정도더군요.
그들이 보기에는 예전의 제가 얼마나 초라하고 한심해 보였을까요?
늘어진 티셔츠에 무릎 나온 청바지, 실밥이 나달거리는 짝퉁 가방 메고도 뭐가 좋아서 웃으며 돌아다니던 제가 말입니다.
급기야 저는 피부 스케일링에 성형까지 감행했습니다.
오직 코의 모양과 피부의 모공 크기만 생각하며 살다보니 괴로운 시간이 잘도 흘러가더군요.
어쩌면 저는 남편에 대한 고민을 잊기 위해 일부러 그런 쪽으로 몰두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어쨌거나 일단 그 세계에 맛을 들이고 나니, 상처가 아무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자신감이 생긴다고 할까, 복수를 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나도 여자고, 여자는 다 이런 거구나 싶더군요.
속 모르는 주위 사람들은 저보고 요즘 예뻐졌다고 야단입니다.
요새 무슨 일 있느냐고 넌지시 묻는 사람도 있고요.
이런 사람이 지금까지 왜 그러고 살았느냐고 농담도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더 친절하고, 조심스럽게 대해주더군요.
주위 남자들 시선이 3초쯤 더 머무는 걸 몸으로 느껴요.
그런 남자들이 한심하면서도 은근히 즐기게 되더군요.
예전에는 순진한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결혼한 남녀는 자기 배우자밖에 모르고 사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제가 모르는 세상에서는 이렇게 불순한 시선들이 오고가고, 불장난들을 치며 살았던 겁니다.
외모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믿었는데, 천만의 말입니다.
그런 교과서 속의 말에 속아서 산 게 억울할 지경이네요.
남편이 갑갑하다고 한 말이, 나의 이런 성격을 두고 한 말인가도 싶더군요.
그렇다고 남편이 이해가 된다는 건 아닙니다.
언제부터인가, 듣기 괴로운 소문이 제 귀에도 들려오더군요.
결국은 여자였습니다. 여자에 미쳐서 집을 나간 인간이 남의 이목 생각할까요? 둘이 대놓고 바람질인 모양이더군요.
남편에 대한 제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번씩 바뀝니다.
쿨하게 이혼을 해주고 새출발을 하자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남편이 진실을 말하고 용서와 이해를 구할 때 가능하지 않겠어요?
어떨 때는 이를 악물며 다짐합니다. 누구좋으라고 이혼해주냐? 평생 그러고 살아봐라.
하지만 요즘은 법이 다 바뀌었다면서요. 간통죄는 없어졌고, 이미 파탄 난 부부는 법이 갈라놓는다고 하더군요.
답이 안 보이는 상황에, 가능하면 골치 썩히지 말고 내 자리에서 시간을 보내려는데, 남편이 먼저 연락을 취해왔습니다.
거의 일곱 달 만에 통화를 한 셈입니다.
남편은 만나서 얘기를 하자고 하더군요. 할 말이 있다고요.
일곱 달 전에도 전화를 해서 할 말이 있다고 했지만, 그때는 제가 만남을 끝내 거절했습니다.
이혼 소리 할 거면 만날 이유도 없다고 하고 전화를 받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번엔 만나기로 했습니다.
뭐라고 하면서 이혼 요구하는지 다시 한번 들어나 보고 싶었습니다.
온갖 억지와 자기 정당화에 대해 저도 이젠 가만 있지 않고 할 말 다 해주고 싶었어요.
까짓 거, 진심으로 나오면 이혼해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일년여만에 만난 남편...
놀랍게도 제가 성형한 걸 알지 못하더군요. 십년 만에 만난 동창도 알아보던데, 일 년 헤어져 있던 남편은 신기하게도 모르네요.
그 새 사람이 너무 마른 것 같다고만 합니다. 어찌됐든 애 생각해서라도 건강은 챙기라나요?
고양이 쥐 생각한다고 고깝게 생각 말고, 새겨들으라네요.
그러더니, 저자세로 저에게 애걸하기 시작하더군요.
당신이 지난 세월동안 얼마나 고생많이 했는지 알고 있다.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부족한 점 하나 없었다.
다 내 탓이고 내 욕심이 문제다....
그러고는 말합니다. 이제 그만 놔달라고요. 남녀 관계는 억지로는 안 된답니다. 여자가 있고, 많이 사랑한대요.
눈물이 맺히더군요. 슬픈 것도 아니고, 분한 것도 아니고...
허탈해서 울었습니다.
남편을 만나 이십년을 한길로만 걸어왔고, 어느 날 문득 그 길 가운데에 혼자 남겨졌습니다.
날 배신하고 상처준 남편 때문에 정신을 퍼뜩 차렸지요.
이젠 나를 사랑하며, 가꾸며 살자고 마음먹었지만
이미 남편은 거기 없네요.
세상 사람들이 다 나에게 웃어주고, 친절하게 변해도, 남편의 마음은 내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꾸미고 차려입어도, 남편이 보는 나는 등신 같이 말 잘 듣던 애엄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양입니다.
남편은 내 모습이 보기 싫어서 떠나간 게 아니었습니다.
마음 속에 내가 없었고, 나를 쳐다보지 않게 되어서 떠난 거죠.
제 마음에도 이미 사랑은 식었지만, 남편 말고 다른 남자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까짓 거 이혼해주려고 마음먹고 나간 자리인데도, 막상 놔달라고 애원하는 남편을 보니 마음이 무너지네요.
나를 가꿔봐도, 모습을 바꿔봐도 달라진 건 없었어요.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홀로 서지 않는 한.......
이혼 아니라 그보다 더한 진짜 마음의 결별을 생각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착한 벌레에게 그게 가능할까요?
버리니까 버려지는, 그런 이혼이 아닌, 다른 이혼도 가능할까요?
조선 201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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