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어린 시절의 저도 그랬지만 요즘 아이들 역시 이 낯선 문장 앞에 고개를 갸웃거릴 것 같습니다. 낳으신 것도 기르신 것도 다 어머니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자녀 하나를 가르치는 데 드는 비용이 억 소리 나게 막대하다는 요즘,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의 임무는 점점 더 막중해지는데, 가정 내에서의 아버지의 존재감은 예전보다 더 희박해진 것 같네요. 아버지들이 스스로를 돈 버는
기계 신세로 느끼지 않으려면, 아내의 중간 역할이 절실하다는 오늘의 손님이십니다.
홍 여사
드림
결혼생활 25년째인 50대 남성입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남매를 두었는데, 큰애는 이번에 대학 졸업시켰고,
둘째는 재학 중입니다. 학교 졸업한 딸이 아직 제대로 된 직장을 잡지는 못하고 있지만, 요즘 젊은이들 취업이 워낙 어렵지 않습니까? 계약직
일이라도 6월부터 하기로 되어 있으니 그것도 장하다 생각합니다.
애들을 키운 건 물론 제가 아니라 아내지요. 하지만 저라고 놀고만
있었겠습니까? 애들 건사는 애들 엄마한테 맡겨놓고, 저는 돈 벌어대느라 허리가 휘었지요. 아버지가 능력이 있으면 애들도, 애들 엄마도 더 편한
길을 갈 텐데, 저는 그저 등록금과 학원비 대기도 바쁜 아버지였네요. 좀 자라서 얘기가 통할 만해졌을 때는, 애들이 공부하느라 정신없었고요.
대학 들어간 뒤로는 저희도 좀 여유가 있을 것 같아, 제가 일부러 다가가 한번씩 말을 붙여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대화가 잘 되지를 않더군요.
저는 애들하고 마주 앉아 있는 것만 해도 기분이 좋은데, 애들은 안 그런 모양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은, 제가 퇴직한 후로 더 자주
발생했습니다. 20년 이상 다니던 회사를 명예퇴직하고, 제가 1년간 집에서 쉰 적이 있었지요. 그 일년 동안 제 심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안
그러려고 해도, 식구들 들어오기만 기다리게 되고, 자꾸 말을 붙이게 되더군요. 그리고 그게 잔소리로 연결될 때가 잦았던 게 사실입니다. 애들
반응은 뜨악하고, 아내는 대놓고 신경질을 내더군요. 돈 안 벌어와도 좋으니 집에 있지 말고 매일 나가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다행히
지금은 다시 일을 하고 있고, 기본 생활비 정도는 벌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기엔, 가장의 대접이란 딱 버는 만큼인 것 같습니다. 씁쓸한
얘기지만, 지금 버는 것보다 세 배 정도 더 벌면 그런 대접 받을 수 있을 것도 같네요. 다들 그럴 거라, 가장의 비애가 원래 이런 거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묵묵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겪은 작은 사건이 제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했습니다. 얼어붙은 마음속에 불같은
화가 이글이글 타는 느낌입니다. 아내 말대로 제가 늙어서 속이 좁아진 건지, 묻고 싶네요.
저희 집에는 텔레비전이 두 대 있습니다.
거실의 큰 TV, 그리고 안방의 작은 TV.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저는 안방 TV를 혼자 보고 있을 때가 잦더군요. 프로그램 취향이 달라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희한하게 아내와 두 아이는 똑같은 프로그램들만 즐겨 봅니다. 저는 통 재미를 모르겠는 드라마나 예능을, 박장대소를 하며 보곤
하더군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TV를 나눠보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밤, 문득 제 신세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거실로 나가봤습니다.
그랬더니, 우연하게도 식구들이 저와 같은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있지 뭡니까. 이럴 거면 뭐하러 티비 두 대 켜고 전기 낭비하나? 저는 멋쩍은
혼잣말을 하면서 소파에 한자리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나이를 먹다 보니 초저녁잠이 좀 많아졌습니다. 그날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퍼뜩 정신 차리고 보니 저는 소파에 앉아서 졸고 있고 TV만 혼자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식구들이 하나도 안
보이더군요. 소리가 나는 쪽을 더듬어 가보니, 참 가관이었습니다. 세 식구가 모두 안방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똑같은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있더군요. 제가 거실로 나오니 식구들이 안방으로 피한 겁니다.
몇 년 만에, 제가 화를 불같이 냈습니다. 무슨 전염병 환자
취급이냐고요. 애들은 피식피식 웃거나 고개 숙이고 저희 방으로 들어가고, 마누라는 저보다 더 큰 소리로 말대꾸합니다. 보다가 조는 사람 곁에서
볼맛이 나겠느냐. 애들이 저하고 같이 TV 보면 재미가 없다고 한답니다. 이게 다 제 탓이라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식들보다 더
서운한 게 마누라입니다. 애들하고 남편 사이에 다리를 놔줄 생각이 전혀 없네요. 저는 그동안 가장 대접을 못 받고 사는 게 아니라, 식구로
인정을 못 받고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돈 벌어대느라 바빴던 내 인생, 돌아와 보니 가정에 내 자리가 없습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나옵니다.
조선 입력 : 2015.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