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신주쿠의 한 호텔. 짧은 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다나카 히로시(田中宏·78) 선생은 허름한 가방을 메고 나타났다. 그는 얼마 전까지 히토쓰바시대학(一橋·도쿄상과대 후신) 명예교수로 재직했다.
그를 만나러 간 데는 한 '일본통(通)' 지인의 권유가 있었다.
"다나카 선생은 재일(在日) 한국인의 법적 지위와 권익 향상, 지문날인 반대, 한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보상, 조선인학교 지원 등을 위해 평생 활동해왔다. 그런데 한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정부도 감사 한번 표시한 적이 없다."
인사차 이 말을 전하니, 답변이 이러했다.
"나는 일본을 위해서 활동했으니 한국에 안 알려졌다고 해서 유감은 없다."
그를 만나러 간 데는 한 '일본통(通)' 지인의 권유가 있었다.
"다나카 선생은 재일(在日) 한국인의 법적 지위와 권익 향상, 지문날인 반대, 한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보상, 조선인학교 지원 등을 위해 평생 활동해왔다. 그런데 한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정부도 감사 한번 표시한 적이 없다."
인사차 이 말을 전하니, 답변이 이러했다.
"나는 일본을 위해서 활동했으니 한국에 안 알려졌다고 해서 유감은 없다."
- 다나카 히로시 선생은“일본이 점점 더 이상해지면서 나는 더욱‘마이너’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최보식 기자
"과거를 정확히 사죄하고 책임지는 것이 국제적으로 일본의 명예와 국익에 도움이 된다. 나는 진정한 '일본 민족주의자'다. 아베 총리야말로 일본의 국익에 반하는 것이다."
―선생이 해온 활동 중에서 결실을 본 게 있나?
"거의 없지만, 조금씩 변하고는 있다. 2000년 초반에 지문 날인 제도는 없어졌다. 그전까지 3년마다 외국인 등록증을 갱신할 때면 시청에 가서 지문 날인을 했다. 1980년 한 재일 한국인이 지문 날인을 거부해 사회 이슈가 됐다. 일본 정부는 '지문 날인 거부 운동'을 벌여온 우리와는 만나지 않았다. 내부적으로 바로잡은 것이 아니라, 한·일 양국 정부의 외교적 교섭으로 이 제도가 폐지됐다."
―재일 한국인의 선거권과 참정권은?
"일본 언론도 이런 사안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한국은 2005년 노무현 정권 시절 외국인 참정권이 법으로 통과됐다. 일본 미디어에 한국의 지방선거 때 투표한 외국인들을 인터뷰해보라고 말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서울 주재 일본인 기자가 마치 없는 것과 같다. 한국에 대해서는 '세월호 사고' 같은 것만 내보낸다."
―일본 국민들로서는 '선생은 왜 재일 외국인들의 입장에만 서는가?' 하는 불만이 없지 않나?
"OECD 가입국 중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더욱이 재일 한국인은 일본의 침략 역사와 관계된 것이다. 일본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자국민밖에 생각 안 하는 사회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그는 '허망(虛妄)의 국제국가 일본'이란 책을 출간했다)."
― 이런 입장을 갖게 된 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
"1963년 도쿄의 '아시아문화회관(외국인 유학생 기숙사)'에서 근무하던 때였다. 당시는 한국·중국 유학생이 없었다. 어느 날 한 싱가포르 학생이 1000엔짜리 지폐를 내밀며 '전후(戰後)에 민주주의 국가가 된 일본에서 어떻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지폐 인물로 나올 수가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는 지갑에서 "바로 이 지폐다. 잊지 않기 위해 늘 갖고 다닌다"며 1000엔짜리 구(舊) 지폐를 꺼냈다(현재 지폐 인물은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
"그 학생은 '일상에서 재일 한국인들이 이 지폐를 쓸 텐데 이들 기분을 생각해 봤나. 일본인은 역사관 같은 거라곤 없는가'라고 했다. 그때까지 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는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게 1963년 11월 1일이다.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의 쇼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까."
―일본인들은 평균적으로 과거 역사에 대해 둔감하다고 들었다.
"엘리트들도 그렇다. 개인 경험을 하나 더 말하면, 1973년 당시 도쿄대로 유학 온 베트남 학생이 있었다. 일본어를 잘 못하는 그가 어떻게 프랑스어는 잘하는지 이상하게 여겼다. 천하의 도쿄대생들도 식민지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었다. 나의 역사 인식은 이런 아시아 유학생들로부터 형성됐다."
"내가 소학교 3학년 때 전쟁이 끝났다. 새로운 시대가 왔지만, 새 교과서를 당장 만들 수 없었다. 선생님이 그전까지 쓰던 교과서에서 고쳐야 할 부분이 나오면 '검은색으로 여길 지워라'고 했다. 엉망진창이었다. 우리들 의식에는 기본적으로 '미국에 전쟁을 져서 이렇게 됐다'는 것만 있었다."
―선생은 '양심(良心) 있는 일본'을 주장해온 것으로 들었다.
"마치 국제적으로 고립된 것처럼, 일본만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지금 심각한 현상인 한국인이나 중국인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에 대해서도 무감각하다. 작년에 UN 인권협약기구에서 적극 해결을 주문했는데도 말이다."
―일본의 우경화는 시대적 추세로 봐야 하나?
"20년 전 '무라야마 담화(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를 낸 사민당 연립정권이 1년 만에 무너지면서 점점 반동화됐다. 지금의 아베 정권이 들어서고는 우경화가 노골화됐다. 전반적으로 몹시 이상한 상태다. 세계를 향해 '강한 일본'을 주장하는 것에 국민들이 현혹되고 있다. 어쨌든 이런 흐름은 계속될 것으로 본다."
―선생은 재작년에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발전시키는 모임'을 결성했다. 이는 아베 정권에서 얼마나 억제력을 갖고 있나?
"별 영향력이 없다. 첫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일본 언론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교도통신만 왔나. 참석 기자들은 중국과 한국, 홍콩 매체뿐이었다. 일본에서는 무라야마 총리를 그저 '과거의 사람'으로 치부해버리고 만다."
―선생은 '역사 청산에는 시효가 없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분란만 일으키는 과거는 덮어놓고 미래로 나가자는 의견도 있는데.
"그거 이상하다. 현재라는 것은 과거와 미래의 통로다. 과거를 제대로 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길을 만들어 준다.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는 과거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다. 반대로 과거에 이런 짓을 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 '이건 앞으로 하면 안 돼'라고 경각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일본은 과거에 대한 책임을 언제까지 져야 한다고 보나?
"동서독이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국들이 '게르만 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분단 상태가 좋은데'라고 말하지 않았다. 일본도 이웃 나라들과 진정한 화해를 이룰 때까지 계속 노력해야 한다. 아베 총리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과거 책임과 보상 문제에서 벗어났다는 입장인데.
"형식적으로는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협정은 정치적인 타협의 산물일 뿐이다. 그 이후부터 일본 정부는 협정에서 빠진 내용 중에서 할 일을 해야 한다. 주한 일본 대사와 외무성 사무차관을 역임했던 스노베 료조(須之部量三)씨는 생전에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정치적인 해결은 끝났다지만, 석연치 않은 것들이 남아 있으니 확실히 해결하지 않으면 국가의 도덕을 갖는 게 어려워진다'고 했다. 인간에게 인덕(人德)이 있듯이 국가에는 국도(國道)가 있는 법이다."
―일본이 위안부 할머니와 관련해 정부 차원에서 보상을 해야 한다고 보는가?
"지금 양국의 외교적 쟁점이 되고 있는 만큼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일본 정부는 '보상이 끝났다, 끝났다' 말만 반복하고 있다. 이를 풀지 않고는 한·일관계의 복원이 쉽지 않다."
―한국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한테 경제적 보상을 해주고, 일본 정부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과하는 방식은 어떤가?
"한·일협정 당시 받은 일괄 보상금이 당사자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생존 위안부 할머니들이 무엇을 원하느냐다."
―한국 정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과를 요구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언제까지 사과해야 하느냐"며 일본의 피로도(疲勞度)가 한계를 넘어섰다는 말도 들린다.
"한국이 어떻다는 걸 떠나, 일본 입장에서는 더 충분한 사과의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사죄라는 게 말로만 되지 않는다. 무엇을 실천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지금은 반대로 일본이 전쟁 시절로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느낄 때가 있다. 중·일전쟁 당시 '폭지응징(暴支膺懲·날뛰는 중국을 응징하자)' 슬로건이 유행했는데, 지금 일본이 한국과 중국을 대하는 걸 보면 그런 기분이 든다."
―한국을 이해하는 '친한파(親韓派)' 정치인과 지식인들조차 지금은 돌아서고 있다는데, 사실 그러한가?
"정치인들도 세대교체가 됐다. 소위 '친한파'들은 전쟁 시절 일본의 잘못을 기억하거나 감각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이웃 나라에 도 넘는 짓은 안 했다. 지금 정치인들은 그런 과거 역사와 떨어져 있다."
―단지 과거를 경험하고 안 한 세대의 문제라고 보는가?
"솔직히 과거의 '친한파'라는 것도 일본 우위의 입장에서 가능했다. 한국과 중국을 한 수 아래로 봤기에 관대할 수 있었다. 지도하는 입장이랄까. 이제 한국과 중국이 경제적인 경쟁관계로 부상하고, 또한 두 나라끼리 서로 가까워졌다. 상대적으로 일본의 비중이 줄어들자 반감도 생긴 것이다."
―이런 마당에 한·일 간 이익을 위해 더 이상 과거를 언급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자신의 나라가 지도상에서 완전히 지워지는 경험을 했는데, '그 이야기는 그만하겠다'는 게 가능할까 싶다."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해다. 앞으로 한·일 관계가 어떨까?
"곧바로 개선되는 것은 역시 무리일 것이다. 일본에 아베 정권이 나오고 한국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출범할 때, 둘 다 보수정권이니까 '이제 서로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와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의 관계도 있고…. 이런 진행은 좀 의외였다. '역사 문제가 이렇게 크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선생과 같은 분은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비주류가 아닌가?
"일본이 점점 더 이상해지면서 나는 더욱 '마이너'가 되고 있다."
다음 날 비를 맞으며 '야스쿠니 신사'에 가보니, 한 우익단체 차량에 박근혜 대통령의 영정 사진을 붙여놓고 '일·한단교(斷交)'라고 써놓았다. 한·일 양국이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않으면 이런 극단적인 풍경만 펼쳐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