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선 악착같이 살면 희망이 생겨… 물도 아껴 먹었어요”
인터뷰
말미, 기자는 김은향(가명·47) 씨에게 “어릴 적 꿈은 뭐였어요? 한국에 와서 그 꿈이 좀 가까워진 것 같나요?”라고
물었다.
“솔직히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북한에서는 어린아이에게 ‘꿈이 뭔지’ 묻지 않아요. 그냥 되는 대로 살아야 하는 곳이거든요. 한국에 와서 제일 좋은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지’ 꿈꿀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 탈북 북송 재탈북… 우여곡절 끝에 밟은 한국땅
김은향 씨의 고향은 함경북도 무산. 김 씨가 처음 탈북한 것은 2000년 9월이었다. ‘중국에 가서 석 달만 일하면 큰돈 벌 수 있다’는 말에 두만강을 건넜다. 8세 아들에게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하지만 큰돈을 만질 거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중국 이곳저곳을 떠돌다 2003년 11월 결국 북송됐다. 북송되기 전 머물렀던 옌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팬티도 남한 것이라면 좋다’며 한국행을 꿈꿨다. 지금껏 알던 남한의 모습은 진실이 아니었다. 북송 후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4개월 만에 다시 북한을 탈출했다. 아들에게는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김 씨는 중국에 나와 있는 한국 기업의 식당에서 일하며 정보를 얻었다. 몽골 국경을 넘어 14시간 넘게 사막을 걸었다. 2006년 5월 2년여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5개월 후 하나원을 나왔지만 막막했다. 정착금 300만 원이 전부였다. 집앞에는 브로커가 돈을 받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돈은 1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처음 한 일은 막노동이었다. 겨울 내내 공사판에서 못질을 했다. 의류 공장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텃세를 못 이겨 나왔다. 그나마 안정적 일자리를 얻은 것이 2007년 8월. 서울 어린이대공원 근처의 편의점 씨유(당시 패밀리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솔직히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북한에서는 어린아이에게 ‘꿈이 뭔지’ 묻지 않아요. 그냥 되는 대로 살아야 하는 곳이거든요. 한국에 와서 제일 좋은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지’ 꿈꿀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 탈북 북송 재탈북… 우여곡절 끝에 밟은 한국땅
김은향 씨의 고향은 함경북도 무산. 김 씨가 처음 탈북한 것은 2000년 9월이었다. ‘중국에 가서 석 달만 일하면 큰돈 벌 수 있다’는 말에 두만강을 건넜다. 8세 아들에게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하지만 큰돈을 만질 거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중국 이곳저곳을 떠돌다 2003년 11월 결국 북송됐다. 북송되기 전 머물렀던 옌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팬티도 남한 것이라면 좋다’며 한국행을 꿈꿨다. 지금껏 알던 남한의 모습은 진실이 아니었다. 북송 후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4개월 만에 다시 북한을 탈출했다. 아들에게는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김 씨는 중국에 나와 있는 한국 기업의 식당에서 일하며 정보를 얻었다. 몽골 국경을 넘어 14시간 넘게 사막을 걸었다. 2006년 5월 2년여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5개월 후 하나원을 나왔지만 막막했다. 정착금 300만 원이 전부였다. 집앞에는 브로커가 돈을 받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돈은 1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처음 한 일은 막노동이었다. 겨울 내내 공사판에서 못질을 했다. 의류 공장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텃세를 못 이겨 나왔다. 그나마 안정적 일자리를 얻은 것이 2007년 8월. 서울 어린이대공원 근처의 편의점 씨유(당시 패밀리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부터다.
○ 편의점 알바에서 사장까지…다시 재회한 아들
“클렌징 폼 어딨어요? 근데 아줌마 말투가 왜 그래요?”
편의점 일은 막노동보다 몸은 덜 힘들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외래어가 김 씨에게는 외계어였다. 더 견디기 힘든 건 무시와 편견이었다. 매일 밤마다 ‘북한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받는 건 고욕이었다. 그래도 악착같이 견뎠다. 마실 물 살 돈을 아끼려고 편의점에 있는 끓인 물을 비닐봉지에 담아 집에 가져갔다. 한 번은 지하철을 탔다가 그 봉지를 놓쳐 물바다를 만들었다. 바닥에 흐른 물에는 김 씨의 눈물이 절반이었다.
2년 9개월 동안 편의점에서 일한 김 씨는 편의점을 직접 운영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북한에서도 장사를 해봤던 김 씨는 도전했다. 사장 직함을 달고 일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김 씨는 현재 서울 중랑구 공릉로의 ‘씨유 묵동도깨비점’을 비롯한 점포 2곳을 갖고 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아들을 데려왔다. 2012년 12월, 스무 살이 된 아들과 6년여 만에 재회했다. 한국에 와서 만난 새 남편과 함께 지금은 새 가족을 꾸렸다.
“어떤 한국 사람들은 ‘살기 너무 힘들다’고 얘기하더라고요. 하지만 ‘열심히 살려야 살 수 없는 곳’도 있는데 한국은 훨씬 낫죠. 탈북자들도 죽을 고비를 넘겨 한국에 와놓고 정작 여기에서는 보조금에 의지한 채 하루하루 버티는 거 보면 안타까워요. ‘꿈꿀 수 있는 자유’를 그토록 원했던 사람들인데 말이죠. 저는 앞으로 더 열심히 꿈꾸며 살 거예요. 남을 돕는 것도 꿈 중 하나죠. 남북한 모두에 작은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입력 201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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