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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퀸 오브 데저트' 실제 인물 거트루드 벨

해암도 2015. 3. 22. 07:04

20세기 초 이라크 독립 인도한 아라비아의 ‘여자 로렌스’

           

1 벨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전후 처리를 위해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후 참석자들과 함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1921년).
3 중동 여행 당시 레바논 쿠베트 두리스에서 말을 타고 여행하고 있는 벨(1900년).
2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인 이라크 바빌론에서 벨은 유적지 발굴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1909년).
“이라크는 역사의 희생양이다. 오스만제국의 지배와 1차 세계대전, 영국의 위임 통치, 건국 등의 과정에서 원치 않는 전쟁과 대립으로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특히 1차 세계대전과 그 전후 처리는 이라크 비극의 시작이었다.”

할릴 알모사위 주한 이라크 대사의 자국 현대사에 대한 평가다. 현재도 이라크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에 의해 영토의 3분의 1을 점령 당한 상태다. 그의 말처럼 이라크 현대사는 불행으로 점철돼 있다. 1차 세계대전 때 영국의 침공, 전후 영국의 위임통치, 1932년 왕정 건국, 58년 이라크 혁명으로 공화정 수립, 이후 지속된 군사 독재정권, 2003년 미국 침공과 2006년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의 교수형…. 전쟁, 종파ㆍ민족 분열, 독재정권으로 인한 갈등과 대립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단초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이라크 침공에서 비롯한다. 그 중심에는 당시 영국 정보원이었던 거트루드 벨(1868~1926)이 있다. 고고학자ㆍ작가ㆍ여행가 등으로 활동했던 벨은 이라크 독립과 건국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사막의 여왕’으로 불리는 이유다.

영화 ‘퀸 오브 데저트’에서 벨 역할을 맡은 니콜 키드먼.
최근엔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퀸 오브 데저트’가 제작돼 제6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였다. 니콜 키드먼이 주연을 맡아 벨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운명적인 사랑을 표현했다. 영화는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중동 정세와 맞물려 중동 현대사에 미친 벨의 영향에 대한 재조명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19세기 여성으론 드문 옥스포드 출신
벨은 20세기 초 영국의 중동정책에서 핵심 브레인이었다. 그는 영국 고위 정보국원으로 활약하면서 ‘아라비아의 로렌스’라고 불린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1888~1935)와 함께 중동을 활동 무대로 삼았다. 로렌스는 “벨은 너무 많은 재능을 갖고 태어난 여성이다. 그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열정적으로 남성들과 경쟁했다.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결국 남성을 압도했다”고 평가했다.

벨은 영국 잉글랜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세기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옥스퍼드대에서 현대사를 공부했다. 단 2년 만에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벨은 결혼을 위해 사교계에 데뷔했지만 주목을 받진 못했다. 사교계를 떠난 벨은 페르시아 테헤란 주재 영국 대사관에서 일했던 남성을 만났다. 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둘의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벨의 운명을 바꿔놨다. 페르시아에 대한 동경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그는 중동으로 건너가 현재의 이란ㆍ이라크ㆍ시리아 등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터키 등을 낙타로 여행했다.

벨의 거침없고 모험심 강한 성격은 여행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간이 욕조를 들고 다녔다. 실크 드레스 안에는 항상 권총이 들어 있었다. 현지 문화에 정통했던 그는 뛰어난 언변으로 부족장들의 환영을 받았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보국 최초의 여성 요원으로 특채됐다. 현지어에 능통했던 벨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중동을 무대로 활약했다. 1915년 영국군 정보국 카이로지부에서 만난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함께 중동 곳곳을 누비며 현지 부족장들과 영국의 동맹을 주선했다.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제국을 붕괴시키기 위한 공작이었다.

여성으로서 20세기 초 중동을 누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갖고 있는 남성성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가들의 평가다. 그는 남성 동료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를 시기한 것은 오히려 동료의 아내들이었다. 벨은 “악마는 뭐하나. 저런 멍청한 여자들을 잡아가지 않고”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곤 했다.

영국군은 벨을 ‘he’로 잘못 알아
벨이 이라크 독립에 관여하게 된 것은 1916년 남부 도시 바스라로 파견되면서다. 오랜 여행 경험으로 현지 사정에 밝았던 벨은 영국군의 바그다드 진격 작전에 참여했고, 1917년 바드다그를 점령한다.

당시 남성 중심의 영국 사회 분위기와 벨의 활약에 대한 신뢰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진격 작전 직전 영국군 사이엔 이런 대화가 오갔다.

“우리가 어떻게 바그다그까지 진격할 수 있을까.”
“벨이 만든 지도가 길을 안내해 줄거야.”
“그래, 그(he)의 판단을 믿고 따르자.”

일선 군인들은 정보요원이었던 벨의 이름만 들었을 뿐, 그가 누구인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여성인 벨을 ‘he’로 지칭하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제국이 붕괴한 후 벨은 로렌스 등과 함께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카이로로 향한다. 이때 벨은 이라크의 독립과 통치 방식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당시 이라크와 요르단, 걸프만 지역을 점령했던 영국은 시리아ㆍ레바논 등을 차지한 프랑스와는 다른 통치 방식을 택했다. 프랑스가 새로운 정치세력을 결집해 직접통치를 꾀한 반면, 영국은 현지 정파와 부족을 내세운 간접통치를 구사했다.

오스만제국이 물러난 이라크의 국경선을 설정하는 데도 벨은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당시에도 이라크 남부지역에선 시아파, 중부엔 수니파, 그리고 북부에는 쿠르드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벨은 세 지역을 하나로 묶는 국가를 건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정민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건국 이후 이라크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온 한 지붕 세 가족 동거는 벨의 작품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평가했다.

의문의 죽음, 자살 여부 아직도 논란
영국이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우선, 한 국가로 만들어 통치하는 것이 훨씬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또 막대한 석유자원에 대한 효율적 관리를 위해서도 세 지역을 통합하는 것이 유리했다.

벨은 이라크 건국 후 내정에도 관여했다. 위임통치 시절 각 정파와 종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았으며 정부 내 주요 인사들의 임명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벨은 1926년 바그다드에서 58세로 숨졌다. 사인은 수면제 과다복용. 시신 옆에서 약병이 발견돼 자살로 추정됐으나, 잠들기 전 하녀에게 “깨워달라”고 말했다는 점 때문에 자살 여부는 아직도 논란거리다. 그의 장례식에는 영국 고위관리와 이라크 왕을 비롯해 수많은 현지인들이 참석해 애도했다. 그는 평생 독신이었다.

벨이 보여준 국제정세에 대한 탁월한 식견과 도전 정신은 남성을 능가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반대로 그의 활약이 오히려 이라크에 불행의 씨앗을 뿌렸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중동에 관한 질문-거트루드 벨과 이라크 건국』을 쓴 역사학자 리오라 루키츠는 영국 정보국에서 일했던 리차드 마이너차겐 대령의 말을 인용해 “중동에서 벨의 신망이 두텁지 않았다면 중동의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나아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중앙선데이] 입력 2015.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