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15년째 파킨슨병 앓는 정신분석 전문醫 김혜남

해암도 2015. 3. 21. 08:38
  • "내 몸은 달팽이처럼 느려졌지만… 다른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가족들은 괜찮다고 하지… 난 유쾌한 짐이 되고 싶다”

투병 중에 쓴 '서른살이…'
방황하는 청춘 위한 조언, 60만부 넘게 팔리며 20·30대 '멘토'로 떠올라

15년 만에 처음 病 알려   환자들에게 버텨보라며 늘 얘기하던 '한발짝…'
나도 그렇게 해보니 어느새 목적지 와 있더라

고통스러운 파킨슨병    병 심할 때 藥 먹으면 3시간 버틸 수 있고
나머지 시간은 ‘off 상태’ 깨어있을 때 뭔가 해야했다

내 병이 내 스승이었다    아픈 다리 끌고 산책하며 남들 건강 부러워할 때
저 뒤에서 오는 휠체어… 그 순간 너무 미안했다
   
"파킨슨병입니다."

2001년 2월 42세의 정신분석 전문의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이었지만 그날 오후 예정된 강의는 그대로 했다. 사랑의전화 복지재단 상담원들을 상대로 상담 기법 등을 강의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지금 내가 뭐 하는 짓이지? 내가 파킨슨병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지금 뭐라고 하고 있는 거야?'

2시간 강의를 끝내고 택시를 탔을 때 비로소 눈물이 쏟아졌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난 정말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데….'

지난 17일 오후 서울 역삼동 김혜남 자택 거실 창가에 봄빛이 완연했다. 15년째 파킨슨병으로 투병 중인 김혜남은 “이미 내게 온 병을 물리칠 수 없다면, ‘왜 병에 걸렸을까’를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이겨낼까’를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며 “내 이야기가 고난에 봉착한 사람들에게 그 고난과 함께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으로 읽혔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역삼동 김혜남 자택 거실 창가에 봄빛이 완연했다. 15년째 파킨슨병으로 투병 중인 김혜남은 “이미 내게 온 병을 물리칠 수 없다면, ‘왜 병에 걸렸을까’를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이겨낼까’를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며 “내 이야기가 고난에 봉착한 사람들에게 그 고난과 함께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으로 읽혔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그는 의사였다. 그 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미래가 빤히 그려졌다. 대한 파킨슨병 및 이상운동질환 학회는 국내 파킨슨병 환자를 4만~6만명 정도로 추산한다. 파킨슨병은 도파민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을 생산하는 뇌 조직 손상에 따른 신경퇴행성 질환이다. 보통 65세 이후 발병하는 노인성 질환으로, 손발이 떨리고, 몸이 굳고, 행동이 느려지는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아직은 이렇다 할 치료법이 없어 약으로 병의 진행을 더디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우울증이나 치매를 동반하기도 한다. 발병 후 15~17년 정도가 지나면 사망이나 심각한 장애가 나타나기도 한다는 사실까지 떠오르자 그는 '내 인생이 60세 전에 끝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후 그는 절망감에 빠져 더 이상 환자를 볼 수가 없었다. 병원 문을 닫고 집 안에 틀어박혀 침대에 누워 지내기를 한 달,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나는 그대로인데, 단지 달라진 게 있다면 내 미래가 불확실하고 현재가 조금 불편해진 것밖에 없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내가 왜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망치고 있는 거지?'

그는 다시 병원에 나가 환자를 돌봤다. 강의도 열심히 했다. 이전처럼 시부모와 남편,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7년 후인 2008년 2월 그는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라는 책을 냈다.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조언을 담은 책은 지금까지 모두 60만부 넘게 팔렸다. 이듬해 출간된 후속작 '심리학이 서른 살에게 답하다'도 20만부 가까이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김혜남은 순식간에 청춘의 '멘토'로 떠올랐다. 그러나 수많은 젊음을 어루만지고 위로했던 베스트셀러 작가가 사실은 파킨슨병으로 투병 중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조금은 덜 아픈 시간이 있다

지난 17일 서울 역삼동의 한 단독주택. 김혜남(56)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는데 계단을 디디는 그의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관절이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않아 다리가 뻣뻣한 채로 끌려가는 듯했다.

팔도 불편해 보였다. 그는 뻣뻣한 팔을 뻗어 찻잔을 꺼내고, 불편한 손으로 유리병 마개를 열더니 자몽차를 끓여 내놓았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손발이 쉴 새 없이 흔들거렸다. 약 부작용이라고 했다. 김혜남은 농담처럼 말했다.

"이제 방송 출연은 다 했다 했어요. 손발이 이렇게 제멋대로 움직이니까."

―파킨슨병 투병 중에 많은 책을 썼다는 사실이 놀랍다.

"몰두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 책 쓰는 게 힘들지 않았다. 작년에 병세가 악화돼 요양차 제주도에 가서 지냈다. 이 병의 특징 중 하나가 소변이 자주 마렵다는 거다. 어느 날 밤 잠에서 깨 화장실을 가려는데,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화장실이 코앞인데 걷지 못하고 자꾸 넘어졌다. '이러다가 옷에 실수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비참하고 막막했다. 그러다 내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한 발짝 천천히 발을 떼었더니 신기하게도 움직였다.

그렇게 한 발짝씩 가다 보니 어느새 화장실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한 발짝이구나.' 내가 내 환자들에게 조금만 버텨보라며 늘 얘기하던 그 '한 발짝'이 바로 이거구나 싶었다. 먼 곳 바라보지 말고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내 발을 내려다보며 한 발짝씩 떼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 나의 투병 과정을 담은 책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를 쓰게 됐다."

―지난 15년간 힘들게 투병하면서도 굳이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나.

"내가 의사로서 치료자 역할을 해 왔기 때문에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재작년 가을부터 병이 심해지면서 의사로서 상담을 지속하는 게 내게도, 환자들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상담을 하다가 의사가 아파서 중지하게 되면 환자들은 어릴 때 엄마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지난해 1월 병원 문을 닫았다. 그렇다면 이제 투병 사실을 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 이야길 들은 다른 파킨슨병 환자들이 희망을 가질 수도 있을 테니까."

―처음 파킨슨병 증세가 시작된 건 언제인가.

“진단을 받기 3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글을 쓰다 보면 글씨가 갑자기 작아졌다. 원래 밥을 많이 먹는 편이었는데 먹는 양도 줄었다. 사람들이랑 수다도 떨지 않게 되고 말이 없어졌다. 처음엔 갱년기 우울증인 줄 알았다. 점점 세수도, 양치질도 하기 어려워지고 다리를 질질 끄게 되더라. ‘운동 부족이야, 무리해서 그래’ 하면서 병원에 안 갔다. 의사인 남편도 눈치 채지 못했다. 내가 의사니까, 잘 알아서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1년 반 동안 다리를 끌고 다녔더니 그제야 남편이 병원에 가자고 하더라.”

―파킨슨병이라고 짐작했나.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처음엔 루게릭병이라고 생각했다. 운동 신경세포가 사멸하는 루게릭병은 파킨슨병보다 예후가 더 나쁘다. 병원에 가보니 루게릭은 아니었다. 파킨슨병은 약으로 조절하면 발병 후 상당 기간 생활이 가능하다.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고통이 심하다고 하던데….

“파킨슨병을 앓는 내 환자가 그랬다. ‘선생님, 뼈와 살이 잠자리 날개처럼 떨리는데, 너무 아파요.’ 정말 그랬다. 고통을 참다못해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아픔을 견디다 보면 아픔이 수그러드는 때가 반드시 온다. 고통과 고통 사이에 조금은 덜 아픈 시간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을 기다렸다. 고통이 잦아드는 시간을 기다리고, 약을 먹어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되길 기다렸다. 기다림이 언젠가부터 희망이 됐다. 아픔이 덜해 움직일 수 있을 때 밥을 먹고, 운동하고, 산책하고, 친구와 수다도 떨었다.”

파킨슨병 증세가 심하게 악화됐을 때는 한 발짝을 떼는 것도 힘든 ‘오프(off)’ 상태가 되곤 했다. 그래도 약을 먹으면 3시간 정도는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하루 세 번 약을 먹으니, 하루 9시간은 몸을 움직여 뭔가 할 수 있었다.

“약을 먹으면 그때부터 몇 시간가량은 괜찮으니 그때 뭔가 해야지 생각하면서 시계를 보며 누워 있었다. 친구들이 날 ‘스리 아워 우먼(3 hour woman)’이라 부르면서 ‘얘, 네 3시간은 다른 사람 6시간에 맞먹어’라고 한다.”

지난해 제주에 머물며 식이요법과 운동을 병행한 게 효과가 있었다. 요즘은 오프 상태가 약하게 오거나 거의 오지 않는다. 그는 “그나마 사람 꼴이 됐어요. 기적 같은 일이죠”라고 했다.

김혜남은 파킨슨병 투병 중에 쓴 책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가 60만부 넘게 팔리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그는 “이 병을 앓으면서 책을 다섯 권 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병이 천천히 진행된 덕에 나는 선물을 받은 거다”라고 했다.
김혜남은 파킨슨병 투병 중에 쓴 책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가 60만부 넘게 팔리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그는 “이 병을 앓으면서 책을 다섯 권 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병이 천천히 진행된 덕에 나는 선물을 받은 거다”라고 했다. /이태경 기자

고통은 은혜요, 축복이다

김혜남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언니가 교통사고로 숨졌다. 슬퍼하는 부모님을 보면서 그는 언니 몫까지 두 사람 몫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니한테 의사가 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의자에 몸을 묶어놓고 앉아 공부해 고려대 의대에 입학했다. 인턴 때 첫아이를 가졌는데 위급한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다 몸에 무리가 가 유산했다. 이후 무사히 아들을 낳았지만, 이번엔 딸이 태어나자마자 심장병 판정을 받았다.

남편은 가난한 집 장남이었다. 부부가 모두 의사였는데도 한동안 25평 주공아파트에서 시부모님과 시동생까지 일곱 식구가 복닥거리며 살았다. 그리고 이제 살 만하다 싶으니 파킨슨병이 찾아왔다. 김혜남은 “세상 다 버티는 거 아닌가요? 잘 버티는 게 중요한 거겠죠”라고 했다.

―버티는 거라니?

“나 같은 경우는 지금 병을 버티는 거고, 정신과 의사 일도 내게 자신의 분노를 쏟아내는 환자들을 버텨내는 거였다. 버틴다고 하면 사람들은 굴욕적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런데 버틴다는 건 말없이 순종만 하는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다. 내면에서는 끓어오르는 분노나 모멸감, 부당함 등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고, 외부에서 주어진 기대에 날 맞추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참아내는 거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다. 만약 버티지 않고 포기해 버렸다면 삶이 쉬웠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참 많이 후회했을 것이다.”

―‘잘 버티는 게 중요하다’는 건 무슨 뜻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내게 선택권이 있다는 뜻이다. 무기력하게 누워서 천장만 보고 살 수도 있고, 방 안에서 ‘마이크로 월드(아주 작은 세계)’를 발견할 수도 있다. 아프고 나서 내가 달팽이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질질 끌려 다니는 내 몸이 달팽이 같다고. 그런데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고, 누워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그전엔 보이지 않던 세세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원에 어제와 다른 새싹이 난 거, 꽃이 핀 거…. 자연의 변화가 매번 느껴지니 아름답고 경이롭다. 난 사람들에게 ‘어차피 살 거면 어떻게든 살아야지. 그럼 누워 살 거야?’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한탄만 하고 울면서 살 순 없다. 나가서 밖이 어떤지 보기라도 해야 한다. ‘가다가 그만두면 아니 감만 못하다’는 옛말은 틀렸다. 가 본 만큼 더 낫다.”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을 것 같다.

“누가? 하느님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신과 의사로서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많이 만나면서 살아왔다. 그 사람들이 그걸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 내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낭비하기엔 내 시간이 너무나 짧다고 생각한다.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랬던가. ‘고통은 은혜요, 축복이다’고. 고통을 겪으니 사람이 감사를 배우게 되더라.”

―어떤 때 감사를 배우게 되던가.

“작년 제주도에서 지낼 때 어느 날 다리를 질질 끌며 산책하러 가다가 답사를 온 사람들과 마주쳤다. 강사의 설명에 귀 기울이는 그들이 부러웠다. ‘나도 저런 젊음, 활기, 건강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열 맨 끝에 휠체어가 있었다. 뇌성마비 환자가 타고 있었는데 그 순간 너무 미안했다. 저 사람은 내 다리를 보며 부러워할 텐데, 나는 혼자 걸을 수 있다는 걸 감사하지 못하고 저들을 부러워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들이 아파 보면 환자를 대하는 마음이 달라진다고 하던데.

“처음엔 ‘의사랍시고 환자들에게 이런저런 위로의 말을 건네던 나도 참 별수 없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여태껏 남에게 도움을 주는 처지였지 남에게 보살핌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알량한 자존심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환자들이 나더러 달라졌다고 그랬다. 한결 편안해 보이고 표정도 부드러워졌다면서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말한다. ‘제 병이 제 스승이지요.’”

―병을 앓으면서 제일 달라진 게 뭔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힘이 조금은 커진 것 같다. 예전 같으면 내가 옳기 때문에 환자를 설득하려 애썼을 텐데 지금은 기다린다. 내 한계를 알게 돼서 겸손해진 것 같다. 실수도 쉽게 인정하게 됐다. ‘당신은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내가 너무 서둘러서 당신이 상처를 받은 것 같다’고 말하게 됐다.”

유쾌한 환자가 되고 싶다

김혜남은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가장 유명해졌다.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다음 해인 2002년 첫 책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하는 걸까’를 냈다. 투병하며 쓴 책 다섯 권이 모두 합쳐 120만부 가까이 팔렸다. 그는 “의사로서 한 사람의 무의식을 깊게 파고드는 정신분석을 못 하게 되면서, 대중에게 말을 걸고 그들의 말을 듣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네 번째 책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가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내가 아픔을 겪으면서 쓴 책이라 진심이 통했던 것 같다. 그전 책들은 일단 공부해서 논문 한 편 발표하고 그걸 바탕으로 썼는데, 이 책에선 아프면서 깨닫게 된 인생의 정말 중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20~40대를 ‘초기 성인기’로 분류하는 정신분석학에서는 사실 20대 초반만 연구하고 30대는 후루룩 넘어가 버린다. 나는 의대에 들어가면서 진로가 결정됐기 때문에 ‘서른 살의 고민’을 건너뛰었다. 그런데 환자들을 보니 30대가 되도록 정체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경우가 많더라. 그들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했다.”

―그 책은 소위 ‘힐링 도서’로 분류되지만, ‘서른 살 안팎 세대의 가장 큰 문제는 야단맞는 것을 잘 견디지 못하는 것’이라며 젊은이들을 꾸짖는 책이었다. ‘조언을 주는 건 멘토지만, 최종 판단은 자기 몫’이라며 멘토 열풍을 경계하기도 했다.

“‘힐링 도서’의 원조 저자로서 책임감을 갖고 말하는 건데, 나는 그 ‘힐링, 힐링’ 하는 말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사소한 일까지 ‘상처’라고 말하면 삶이 문제 덩어리가 돼 버린다. 일상이란 게 갈등도 있고, 기분 나쁜 일도 있고, 내 뜻대로 안 되는 것도 있는 거다. 모든 걸 정신병리로 만들어버리면 안 된다. 모든 일에 ‘증후군’을 갖다 붙이면 일상이 치료받아야 할 일이 된다. 스스로 극복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도와줘야 하는 일이 돼 버리는 거다. 내 환자들을 보면, 예후가 좋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보통 경과가 더 좋아진다. 의지할 곳이 없어지면 자아는 자기를 살리게끔 돼 있다.”

Who is… 김혜남

김혜남은 열 가지 ‘버킷 리스트(bucket list·죽기 전 꼭 해보고 싶은 일 목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림 그리기, 우리나라 바다 한 바퀴 돌기, 다른 나라 언어 배우기,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기, 나에게 상처 준 사람들에게 욕 실컷 하기, 세상의 모든 책 읽어 보기, 사람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책 한 권 쓰기, 남편과 무인도에 들어가 일주일 지내기, 가족과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기…. 그 ‘버킷 리스트’의 맨 마지막에 ‘조용히 온 데로 다시 가기’가 있었다.

―‘조용히 온 데로 다시 가기’라니?

“때가 되면 가는 건데, 남에게 짐 안 되고 조용히 갔으면 좋겠다.”

―가장 두려운 건 뭔가.

“무용지물이 되어가는 듯한 기분이 제일 무섭다. 움직이지 못할 때 특히 그런 기분이 든다. 그래서 가족한테 물어본다. ‘내가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지?’ 가족은 ‘다 괜찮다’고 말로는 그런다. 아마 나중엔 잊힌 존재가 될 테지만. 방구석에 있는 가구처럼 잊어버린 존재…. 그렇게 안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유쾌한 짐이 되자’고 결심했다. 아파도 농담으로, 웃음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하자고, 이 모든 걸 웃음으로 껴안고 웃음으로 이겨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환자가 되고 싶다.”

곽아람 기자   입력 : 2015.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