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컴퓨터

종이책 420권이 8GB USB에 쏙… 200kg 무게 덜어내니 기분이 쑥

해암도 2013. 4. 30. 08:17
2011년 7월부터 책을 잘라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멀쩡한 책을 내다 버린 건 아닙니다. 작은 집에 책이 쌓이다 보니 처치하기 곤란할 지경이 돼 책을 낱장으로 분해한 뒤 스캐너에 넣고 디지털 변환해 전자책으로 만들기 시작했죠.

생각보다 쉬운 작업은 아니었습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지만 사실 책은 정교한 공산품입니다. 겨우 1만 원 남짓한 얇은 종이 모음일 뿐이지만 각 장이 매끈하게 분리돼 있으면서도 모든 페이지가 견고하게 책등에 달라붙어 있습니다. 이걸 분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결국 전문업체에 부탁해 단두대를 연상시키는 대형 재단기로 수백 권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자동으로 책장을 양면으로 스캔해 주는 스캐너에 넣은 뒤 디지털 변환을 했습니다. 스캔이 끝난 파일은 컴퓨터에서 광학인식프로그램을 돌려 인식 가능한 문자로 바꿨습니다. 이러면 단순히 검은 그림에 불과했던 책 속의 활자가 검색할 수 있는 디지털 문자로 변합니다.

주말마다 쉬엄쉬엄 했더니 21개월 동안 겨우 420권을 스캔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 작업 덕분에 베란다 바닥까지 쌓였던 책들이 아이패드 속 가상 책꽂이로 쏙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좀 허탈합니다. 책 420권의 책 등을 잘라내느라 재단소로 보내고 받아왔던 책 상자가 20개는 됩니다. 한 상자의 무게가 약 10kg이니까 모두 200kg 정도입니다. 이걸 검색 가능한 PDF 문서로 바꾸고 나니까 용량이 겨우 6GB에 불과합니다. 요즘 흔히 쓰는 8GB USB 메모리 속에 모두 담고도 150권 정도를 더 담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서가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바닥까지 넘쳐났던 그 엄청난 물리적인 존재가 이렇게 ‘휘리릭’ 사라지는 게 마치 마법 같기도 하고, 사기(詐欺) 같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과연 책이란 뭘까요?

2년 동안 종이책을 스캔해 전자책으로 바꾸면서 제 독서습관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젠 침대에서 스탠드를 켜야만 읽을 수 있는 종이책이 불편합니다. 또 종이책은 무거워서 싫습니다. 여행가방에 몇 권 챙겨 가면 부담스럽습니다. 좋은 글귀를 발견해서 적어 놓으려고 할 때 ‘복사하기-붙여넣기’가 안 되는 것도 짜증납니다. 결정적으로 답답한 건 책꽂이를 헤집어도 예전에 읽었던 부분을 쉽게 검색할 수 없다는 겁니다. 장점은 애매모호한 ‘종이 향기’와 ‘책장을 넘기는 손맛’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종이책은 과연 마음의 양식인가요? 아니면 커피나 초콜릿 같은 가공식품인가요?

물리적인 공산품으로서의 종이책이 사라진 뒤 제게 420권의 책은 무게가 하나도 나가지 않는 디지털 비트(bit)가 됐을 뿐입니다. 하지만 비트로서의 책들은 제게는 종이책보다 훨씬 유용하고 가치 있습니다. 당연하게 누려왔던 걸 하나 덜어내면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본질이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서가를 채우던 책들의 덩치를 덜어내니 그 책들의 내용이라는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상훈 기자 동아 2013-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