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 작품 그 도시] 한여름 밤의 꿈 지나도… 나 뜨겁게 살아가리

해암도 2014. 11. 23. 04:37
  • 다큐멘터리 '서칭 포 슈가맨'―케이프타운
    질문 몇 개에 대답한 후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나라와 도시를 선택해주는 앱을 본 적이 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질문들 중에는 '당신은 어떤 기후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나?' '당신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들리는 소리들은 어떤 것인가?' 같은 목록이 있는데 꽤 긴 질문에 대답을 하고 보니, 나에게 가장 잘 맞는 나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다.

    미스터리에 싸인 가수 '슈가맨'을 찾아 떠나는 여정인 다큐멘터리 '서칭 포 슈가맨'을 얼마 전 시애틀의 시텍 공항에서 봤다. 영화의 전반부는 공항의 게이트 입구에서, 나머지 후반부는 사람들이 모두 잠든 컴컴한 비행기 안에서 본 셈이다. 비행기 갤리에서 물을 마시다가 승무원에게 문득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다. "혹시 케이프타운에 가본 적 있어요?" 인천에선 그곳까지 가는 직항 비행기는 아직 없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테이블마운틴에서 바라본 케이프타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테이블마운틴에서 바라본 케이프타운. 파란 하늘 아래 산과 바다, 시내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다큐멘터리 ‘서칭 포 슈가맨’은 미국에서는 흥행에 실패했으나 남아공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군 가수 시스토 로드리게스의 흔적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 블룸버그 제공
    1960년대 말, 디트로이트의 한 술집. 두 명의 유명한 프로듀서가 천재 싱어송라이터를 만나고 당장 그의 음반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는 영화 '비긴 어게인'의 '성공 스토리'와 어쩐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등 팝 역사상 최정상의 가수들을 발굴한 당대 최고의 프로듀서 데니스 코피와 마이크 시어도어는 '슈가맨'이라 불리던 '시스토 로드리게스'의 놀라운 음악성에도 참담할 정도의 실패를 겪는다. 슈가맨의 첫 번째 음반 '콜드 팩트(Cold Fact)'는 미국에서 고작 6장이 팔리는데, 이마저도 음반 기획자의 가족이 사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른다. 슈가맨의 앨범은 한 미국인 여행객에 의해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흘러들어 가고, 우연히 그의 노래 '난 궁금해(I Wonder)'는 라디오 전파를 타게 된다.

    "난 궁금해/ 넌 얼마나 많이 속아봤는지/ 난 궁금해/ 넌 얼마나 많은 계획을 망쳤는지/ 난 궁금해/ 넌 얼마나 많이 섹스를 해봤는지/ 난 궁금해/ 다음은 누구 차례인지/ 난 궁금해/ 정말 궁금해."

    밥 딜런을 연상시키는 그의 노래는 당시 보수적이고 인종차별이 심했던 남아공 젊은이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정부에선 이 위험한 노래를 금지하고 앨범에 일일이 스크래치 내는 방법으로 유통을 방해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슈가맨의 인기에 불을 질렀다. 앨범은 5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다. 그렇게 얼굴 없는 가수 슈가맨은 무대 위에서 분신자살을 한 요절한 가수로 남아공에서 '엘비스'보다 더 유명한 인사가 된다. 다큐멘터리는 그를 간절히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열망이 소문 속에서 이미 죽은 그를 찾아내 만나는 과정의 이야기다. 슈가맨은 분신자살한 게 아니라 디트로이트의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다큐멘터리' 특유의 장기가 발휘된다. 사람들이 각자 기억하는 '슈가맨'은 모두 달랐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인터뷰는 같이 청소를 했던 사람인데, 그는 "로드리게스는 오물 청소를 하고, 건물 벽을 허물던 사람이었는데 종종 믿을 수 없는 얘길 하곤 했어요. 그는 힘든 일을 하면서도 턱시도를 입는 예술가였습니다. 예술가란 일어나는 일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닐까요?" 같은 역시 청소업자답지 않은 말을 줄줄 내뱉는다. 다큐멘터리의 절반 이상이 훌쩍 지난 다음에야 실제 '슈가맨'의 인터뷰가 나온다.

    그동안 무슨 일을 했죠?

    몸을 쓰는 일을 했죠.

    만족했나요?

    네. 몸을 쓰니까요.

    혼자서도 음악을 했나요?

    기타를 쳤어요. 듣는 것도 좋아해서 공연도 봤고.

    슈가맨은 철학을 전공했지만 몸을 쓰는 자신의 일을 사랑했다. 그는 밥 딜런보다 더 성공한 뮤지션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앨범은 전부 불법 복제물이거나 불법 앨범이었다. 그는 뒤늦게 자신의 공연을 보고 싶어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무대 위에 섰지만 놀랍게도 초특급 호텔의 '침대'가 아닌 호텔 '소파'에서 잠들기를 고집했다. 침대를 험하게 쓰면 청소부가 청소하기 힘들다는 게 이유였다.

    수십 년 만에 이루어진 그의 남아프리카 공연은 전회 매진되었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그의 추종자들이 나타났다. 디트로이트의 청소부는 젊은 날 자신이 가졌던 열정을 그대로 쏟아내며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예전의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가끔 청소를 하는 동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꿈결처럼 들려준다. "내가 한때 가수였는데 말이야…"로 시작하는, 누구도 믿지 못할 그 기적 같은 이야기를 말이다.

    더 이상 기적을 믿기 힘든 시절에 이런 이야기가 존재하는 건 어른들이 읽고 싶은 동화 속 한 장면 같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양가적인 느낌에 사로잡혔다. 바로 이런 '마술 같은 이야기' 때문에 청춘을 저당 잡힌 젊은 예술가 지망생들과, 그들의 꿈을 착취하는 산업이 활황 중인 지금의 세태 말이다. 그러나 결국 얘기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는 꿈은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지켜지는 것이란 말이다. 음악을 하지 않던 그 시간에도 로드리게스는 노래를 부르고 공연을 봤다. 삶을 예술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청소를 하든 노래를 부르든, 지금 이 순간을 깊게 체험하며 살아내는 일뿐이다.

    
	서칭 포 슈가맨  포스터
    만약 이 이야기의 결말이 청소부였던 로드리게스가 일확천금을 얻어 부자가 되고 그의 삶이 180도 바뀌는 것이었다면 나는 그것을 '삶'이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에 가깝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때의 꿈은 그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심어주었을 뿐, 지금의 소박한 삶을 훼손하지 않는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가 결국 말하려는 건 '삶' 혹은 '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원고를 쓰다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 '말릭 벤젤룰'이 지난봄,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었다.
    '서칭 포 슈가맨'은 내가 아는 한 '기적'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보고 싶거나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 우리 앞에 놓인 진짜 삶일지 모른다.

    ●서칭 포 슈가맨 - 말릭 벤젤룰의 다큐멘터리

                                                                              백영옥·소설가   입력 : 2014.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