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남문우(80) 전 검사가 쓴 자서전 ‘나의 삶 이야기’

해암도 2014. 9. 5. 06:05


  • 시할머니·시어머니 모시고 8년간 독수공방하면서도 웃음 잃지 않았던 아내…"지금의 나를 있게 한 버팀목

결혼 후 육십리 길 걸어 처가에 가면서 아내에게 했던 약속
"나중에 꼭 성공해 고급승용차 타고 가게 해주겠소"


이 글은 남문우(80) 전 검사가 쓴 자서전 ‘나의 삶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는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자식들만은 내가 많은 은인들 도움으로 인생을 살았다는 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책을 썼다”고 했다. 비매품으로 1000부를 찍었는데, “가난에도 좌절하지 않은 인생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혼자 보기 아깝다”는 지인들의 권유에 최근 두 차례에 걸쳐 각각 500부씩을 더 찍었다. 그의 동의를 받아 앞으로 책 내용을 발췌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52년 11월 26일,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만 18세의 어린 나이에 지금의 처(장주정)와 결혼했다. 주변에선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일찍 장가간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젊은이들에겐 이해가 안 될 일이고, 또 아내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지만, 당시 집안 형편상 안살림을 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장남인 내가 일찍 장가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몸이 약하셔서 자주 아파 몸져 누우셨다. 어머니는 며칠씩 못 일어나시는 날이 많아 그럴 때마다 할머니께서 부엌에 나가 아침밥을 지어 자식과 손자들을 먹이곤 하였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부터 어머니는 아버지 몫까지 신경을 쓰시다 보니 몸과 마음이 더욱 약해져 누워 앓으시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서 일흔을 넘긴 할머니께서 부엌에 드나드는 날이 많아졌는데, 할머니께서도 천식으로 겨울철이 되면 기침 때문에 고생하면서 어렵게 부엌살림을 하셨다. 나는 두 분이 고생하는 것을 옆에서 보기가 너무 딱했고 괴로웠다.

그러던 중 한 마을에 사는 집안 아주머니(처의 이모)로부터 “참한 색시가 있는데 네가 장가가서 어머니와 할머니를 도와드리는 것이 어떠냐?”는 말씀을 들었다. 며칠 밤을 지새며 고민을 하다가 장가가면 공부하는데 지장은 있겠지만 그것은 내가 하기에 따라 극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또 내가 장남이니 일찍 장가가서 고생하시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도와 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아주머니는 이질녀를 소개할 때 “학교 공부는 못했지만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하여 집안에서 큰일을 도맡아 하는 아이이니 아마 너의 집에 꼭 맞는 훌륭한 맏며느리가 될 것이다”고 했다. 선도 볼 필요 없다는 것을 그래도 우겨 온양온천에 있는 자장면 집에서 맞선을 보았다. 우리는 처음 만나자마자 천생연분이었는지 서로 끌렸다. 밝고 깨끗한 얼굴에 명랑한 성격을 갖고 있는 여자였다.

양가 어른들과 당사자 간에 합의가 이루어져 장가를 가게 되었는데 장가갈 돈이 없어 걱정이었다. 그 당시 장가가려면 요새 같이 예식장에서 예식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신부집 앞마당에서 초례청을 차려 놓고 예식을 올리던 때라 예식장 비용은 필요 없었으나 적어도 신랑이 입을 바지저고리, 마고자, 두루마기 등 옷과 구두를 새로 사 신어야 하고 서로 교환할 예물도 장만해야만 했다.

일러스트 김성규 기자
일러스트 김성규 기자

나는 없는 돈을 쪼개어 가장 값싼 인조원단을 사다가 집에서 바지저고리 한 벌만 달랑 해 입고 구두는 신던 군화를 그대로 신었다. 그리고 신부에게 줄 예물도 준비하지 못한 채 장가를 갔다.

처가는 공주군 유구면 문금리에 있는 아주 깊은 산골 마을이었다. 처가에서 혼례를 치르고 하룻밤을 더 잔 후 우리 부부는 집으로 바로 돌아와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신혼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 때부터 나의 아내는 고생길에 접어 들었다.

신랑이란 사람은 신부를 집에 데려다 놓고 학교에 다니면서 집에는 일주일 또는 이주일에 한 번씩 와서 자고 갈 뿐이었다. 집안 일을 돌보거나 생활비를 대지도 못했다. 아내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아래로 여섯명이나 되는 시동생과 시누이를 거느리고 없는 살림살이를 꾸려나가느라 큰 고생을 했다.

아내의 독수공방 생활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여 서울에서 살 때와 군대생활을 하고 제대 후 복학하여 공부할 때까지 장장 8년간 계속되었다. 우리 부부는 1961년 4월 내가 처음 직장을 잡고 서울에 단칸방을 얻고서야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새 살림을 차린 후에도 단칸방에 동생들과 두 딸이 같이 살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부부생활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나는 공부방이 없어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자며 사법시험 공부를 했기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서도 아내의 독수공방의 생활은 몇 년간 더 계속 되었다.

아내는 8년간 남편 없이 시어머니와 시할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보통 사람 같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아내는 오직 남편의 성공을 위해 불평 한 마디 없이 가족들을 위하여 열심히 살아 주었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결혼 후 5년이 지나면 온다는 권태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항상 신혼생활 기분으로 부부생활을 했고, 그것은 최근 몇 년전까지 계속 되었다.

나의 아내는 비록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배운 사람 이상으로 넓은 도량과 이해심으로 가정을 이끌고 밝은 인상으로 항상 사람을 편하게 해 주었다. 만일 아내의 희생적인 내조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나는 물론 우리 가정의 행복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내 아내를 사랑하고 소중히 생각하며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내는 시집와서 네 명의 시동생과 두 명의 시누이를 키워 결혼시켰다. 또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식들도 반듯하게 키웠다. 큰 딸과 둘째 딸은 내가 한참 공부하고 고생할 때 낳아 돌보지 못했고, 그 아래 아들은 내가 검사로 재직하면서 여기저기 전근을 다니느라 아버지로서의 따뜻한 정 한 번 표시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아내의 가정 교육 덕분에 자식들이 반듯하게 자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식들도 모두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으니 이 또한 우리 부부의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부부는 2003년 11월 26일 ‘금혼식’에 잔치를 생략하고 자식들과 같이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자식들의 주선으로 기념사진첩도 만들었다. 이제는 곧 다가올 회혼식도 조촐하게 치러 아내를 기쁘게 해줄 생각이다.

나는 60여년간 아내와 같이 살면서 처음 장가갔을 때 아내에게 했던 약속 중 한 가지는 지켜주었다고 생각한다. 결혼 후 얼마 안되어 아내와 같이 육십리 길을 걸어 처가에 가면서 했던 약속이다. “지금은 당신과 걸어서 처가에 가지만 내가 꼭 성공해 고급 승용차를 타고 친정에 가게 해 주겠소.” 결혼 후 사십년이 지나서 에쿠스 승용차를 타고 처가에 가게 되어 늦게나마 아내와의 약속을 지켰다. 나는 죽어 다시 태어나도 나를 항상 편안하게 내조해주던 아내에게 다시 장가를 갈 것이다. <계속>
  • 남문우
    前 검사
    E-mail : nmw7373@naver.com
    1934년생. 예산농고, 서울대 법대를 나와 1966년부터 서울..
  • 입력 : 2014.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