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90년대를 주름잡았던 클론의 강원래.

해암도 2014. 9. 9. 05:11


강용석의 WHO ARE YOU? 경기고 동창 강원래와 25년 만의 재회

여성중앙90년대를 주름잡았던 클론의 강원래. 당시 최고의 댄스 가수였던 그는 나의 고교 동창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지만, 내 기억 속에 그는 최고의 춤꾼, 영원한 딴따라다.

술을 그만 마셔야 할 때가 된 건지 요즘 들어 부쩍 술로 인한 사고가 잦다. 술 마시고 계단에서 미끄러져 얼굴에 반창고(인조 피부 느낌 나는 좀 고급스러운 것이긴 하지만)를 붙이고 방송을 해야만 하더니, 술 마시고 신상 폰을 분실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날 저녁 고교 동창 강원래를 서울 삼성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휴대폰이 없으니 담당 기자 연락처도 모르고, 약속이 확정됐는지 확인도 불가능했다. 약속에 변동은 없으려니 싶어 시간 맞춰 카페로 갔더니 그 카페에선 여성중앙 예약이 당일 오후에 취소됐다고 한다. 갑자기 약속이 취소되어 강남에서 마포 집까지 돌아가 투덜대며 옷을 벗고 쉬려는 참에 집으로 전화가 왔다. 여러 다리를 건너 사무실 직원이 전하는 얘기는 약속이 취소된 것이 아니라 장소가 변경됐고, 강원래 씨와 담당 기자가 논현동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것. 토요일 저녁 강남과 강북을 두 번씩 오가며 어렵사리 강원래와 만났다.

Q : 휴대폰 분실 사고의 파장이 이렇게 클 줄이야. 연락할 방법이 없더라고. 아무튼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아직도 그런 구라를 치다니! 2시간 넘게 기다리게 했으니 20분 안에 끝내. 아무튼 반갑다. 이게 얼마 만이야.

Q : 25년 만인가? 경기고 주변도 다 변했더라. 근데 너랑 나랑 동창인 거 알고 있었어

너 방송 나오는 거 보고 어디서 많이 본 애다 싶었지. 우리 동기 중에 (구)준엽이랑 주영훈도 있잖아. 너랑 영훈이랑은 고2, 고3 때 같은 반이었고. 그러고 보면 한 학교에서 같은 학년 학생들이 방송 활동 하고 있는 것도 신기한 거 같아.

Q : 난 요즘 동창들 만나는 시기인가 봐. 지난달에는 유준상 만났어. 준상이랑은 초등학교랑 중학교 동창인데, 솔직히 그때 기억은 잘 안 나.

난 학창 시절에 논 기억밖에 없어. 예전에 중학교 동창회에 나간 적이 있는데, 내가 경기고 들어갔다니까 놀라더라. 원래 고등학교 갈 성적이 안 됐거든. 사실 시험 볼 때 앞에 있는 애 화장실로 불러서 답안지 보여달라고 해서 겨우 들어간 거야.

Q : 진짜? 하하. 그때 우리 연합고사 커트라인이 140점이었지 아마

체력장 포함해서 140점. 120점 정도는 맞아야 학교에 들어가는데 내 점수가 80~90점 정도? 공부를 아예 안 했으니까. 그나저나 너 상복이 알지! 걔가 전교 1등 아냐? 네가 전교 1등이라고 소문났더라고.

Q : 나도 전교 1등 한 번 했었어. 그걸 방송에서 말했더니 ‘강용석=경기고 전교 1등’으로 굳어진 거지. 의도한 건 아니었어

뭘 해명까지…. 상복이가 우리 반이어서 잘 알아서 그런 거야. 근데 나도 요즘 동기 동창, 선생님 만나는 시기인가 봐. 얼마 전에 담임이었던 양창수 선생님 만났어. 내가 찾았거든. 너도 양창수 선생님 아나?

Q : 모를 리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 유명했잖아

너 이과 아니었어?

Q : 문과야. 독어 반이었어. 문과니까 법대를 갔지

난 그런 거 잘 몰라. 공부 잘해서 이과인 줄 알았어. 너 수학 A반이었지? 난 C반이었어. 고등학교 동창들 만나면 어떤 반인지 먼저 물어봐. C반이라고 그러면 나를 알든 모르든 바로 친구 되는 거고, A반은 그냥 동창이야. 하하.

Q : 영훈이는 좀 알아? 같이 음악 하니까 알 것도 같고. 난 요즘도 가끔 만나

난 고등학교 때 영훈이 몰랐어. 나랑 처음 마주친 게 96년도 무렵이었을 거야. 영훈이가 터보 음악 맡으면서 그때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
클론의 강원래와 구준엽. 요즘 MBN ‘아궁이’라는 프로그램의 MC를 맡고 있는 주영훈, 그리고 나는 경기고 84회 동기다. 우린 1988년에 경기고를 졸업했는데, 90년대 초반부터 강원래, 구준엽이 뜨기 시작하더니 96년 클론을 결성해서는 초대박을 터뜨렸다. 주영훈은 90년대 중반부터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다가 MC로 더 유명해졌다. 내가 고등학교 후배들을 만나면 하는 얘기가 90년대엔 클론, 2000년대엔 주영훈, 2010년대엔 강용석이 제일 유명하단 거다. 대충 맞지 않나?

Q : 내가 고등학교 때 너랑 준엽이에 대해 기억하는 건 춤과 관련된 얘기들이었어. ‘쉬는 시간마다 책상 뒤로 밀어놓고 춤추는데 끝내준다’ ‘매일 밤 나이트클럽에 간다’ 등등

난 중2 때부터 나이트클럽 다녔어. 신 나는 음악이 좋고 춤이 좋았거든. 당시엔 부킹보다 정말 춤 좋아하는 애들이 나이트클럽 다녔으니까. 대학 진학하고 나서도 준엽이랑 클럽에 다녔어. 공부랑은 애초에 담 쌓았었고.

Q : 그런데도 대학은 용케 들어갔네

내가 공부는 꼴찌여도 다른 분야는 수재였어. 특히 그림을 좀 그렸지. 엄밀히 말하면 잘 그렸다기보다 좀 앞서갔다고 할까(웃음). 우리 형 강원도가 그림 그리고 춤추는 걸 좋아했는데, 형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 또 강남 애들 특유의 특징이, 놀면서도 대학 가서 나중에 뭐가 돼야겠다는 자존심이 있었잖아. 그땐 참 어렸던 것 같다.

Q : 너랑 준엽이가 춤 경연 대회 같은 데 나가면 상금 싹쓸이했다고 들었어

그땐 장난 아니었지. 한 번은 후배 추천으로 이태원의 한 클럽에서 개최된 디스코 경연 대회에 참가했었어. 그때 이주노ㆍ양현석과 대결했지. 이주노가 이끌던 팀은 대한민국 최고의 댄싱 팀인 박남정과 프렌즈에서 활동하던 팀인데, 이미 프로급 실력으로 정평이 나 있었어. 뭐 그땐 나랑 준엽이도 옷 잘 입고 춤 잘 추는 대학생으로 소문이 나 있었지만. 그래도 이주노ㆍ양현석의 명성에는 한참 못 미치던 시절이야. 하하. 근데 예상을 깨고 나랑 준엽이가 디스코 경연 대회에서 1등을 한 거야. 그때 현진영도 특별 게스트로 왔는데, 현진영 매니저가 우리한테 ‘댄스 가수 해보자’고 제안했었어. 수만이 형도 왔었지. 그다음 날 바로 SM에 들어갔어.

Q : 그때는 SM이 작은 회사였지

이름도 없었어. 당시에 송파구 석촌동에서 조그맣게 시작했거든. 수만이 형 그때 되게 멋있었어. 나한테 조언도 많이 해줬고. 예를 들면 ‘인생은 포카 하고 똑같다. 연예계 기획사도 포카 하고 똑같다. 첫 패를 잡았을 때 안 된다 싶으면 바로 덮고, 아니다 싶을 때 한 장 더 받아보고 엎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 그리고 패가 좋으면 연예 기획사에 투자하라고. 그리고 수만이형이 “내 인생 마흔에 변화하고 싶어서 기획사 한다. 가수 이제 안 할 거다” 했었어. 그때가 1993년도니까 지금은 60이 넘었겠네.

Q : 확실히 옛 친구를 만나니 추억이 돋는다. 준엽이는 완전 DJ 쪽으로 간 거지? DJKOO로 활동한 지 한참 된 거 같더라고

준엽이가 음악을 되게 좋아해. 난 좀 껄렁껄렁한 댄스 좋아했고, 준엽이는 전자 음악 등 마이너 음악 쪽으로 관심이 있었어. 하나 좋아하면 완전히 빠지는 스타일이야. 그래서 집에 미러볼, 블랙 라이트 같은 거 설치해놓고 DJ 연습하더라고. 준엽이가 DJ를 시작한 지 한 10년 됐는데, 음악을 워낙 많이 알고 좋아하고 잘하니까 앞으로 잘될 것 같아.

Q : 클론으로 데뷔한 건 언제야

1996년도. 데뷔곡은 ‘쿵따샤바라’. 5년간 앨범을 4장 냈는데, 1집 ‘쿵따리 샤바라’, 2집 ‘도시탈출’, 3집 ‘돌아와’, 4집 ‘초련’까지 활동했어. 전부 다 히트했는데 특히 앨범 2장이 대만에서 히트를 쳤어. 그때 콘셉트가 한류였지. 우리가 그 단어를 제일 먼저 썼어. 그래서 우리를 ‘한류의 원조’라고 하는 사람이 많아.

Q : 대만에서 히트한 곡은 뭐야

‘도시탈출’이라는 노래를 대만가수가 불러서 대박이 났어. 20주 연속 1위. 그래서 원곡 가수인 우릴 초청해서 대만에 가게 된 거지. 당시 한국은 규제가 심해서 문신, 선글라스, 귀고리도 못했어. 그래서 준엽이가 대만에서는 우리가 고등학생 때 대학로 다니면서 했던 거 해보자고 제안해서 옷 찢고, 침 뱉고, 마이크 던지고 난리를 부렸어. 그랬더니 사람들이 환호하는 거야. 거기서 우리가 50만 장을 팔았어. 타이타닉 OST가 8만 장밖에 안 팔렸는데 말이야.

클론은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노래는 한 옥타브 안이라 특별할 게 없었지만 댄스와 랩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노래 못하는 가수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가수랄까. 강원래는 ‘쿵따리 샤바라’로 한국은 물론 중화권까지 평정한,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가수였다. 멋진 춤 솜씨로 무대를 종횡무진 누비던 근육질의 그는 2000년 11월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Q : 세월 빠르다. 사고가 있은 지도 벌써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

처음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어. 욕도 많이 하고, 화도 많이 내고, 송이랑도 많이 싸우고…. 그 후에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안 건데 그게 정상이었더라고. 화내고 짜증내고 집어던지고 하는 게 정상인 거지. 재활 교과서에 나오는 게 딱 네 가지야. 부정, 분노, 좌절, 수용. 처음엔 다 부정을 한대. “아니야. 다 나을 거야. 괜찮아질거야.” 다음은 분노. “아. 이게 정말인가?” 욕하고 화나고, 미쳐버리는 거지. 그다음은 좌절. “죽어버릴까?” 마지막으로 수용. 여기까지가 빠르면 1~2년, 오래 걸리면 20년까지도 걸린다고 하더라. 난 부정이 아직까지도 있어. 나랑 같이 입원했는데 아직도 병원에 있는 사람이 있어. 자긴 다 나아서 나오겠다는 거지. 못 낫는 건데 말이야. 그나저나 너도 요즘 맘고생 좀 하지 않았어?

Q : 난 뭐 얼마 전에 부정, 분노, 좌절, 수용 단계를 거친 거 같아. 몇 년 전에 있었던 구설 때문에

이게 심리 단계인데, 이걸 알고 상황이 닥치면 ‘아, 내가 감정 조절을 못했구나.’ 미안하단 얘기를 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을 모르고 그냥 ‘내가 미쳤구나’라는 생각을 한다든지, 내가 정당하다는 생각을 자꾸 하다 보면 더 미치는 거지. 그래서 난 정신과 치료가 효과적인 것 같아. 난 4개월 정도 했어.

Q : 가장 힘들었던 건 뭐야

예전에는 ‘언제 걸어요?’라는 질문에 힘들었는데 이젠 그런 질문에도 익숙해졌어. 언제 걸어요?’ 하면 ‘다음 달쯤 걸을 것 같아요’라고 답해. 이제는 길을 가다가 1000원짜리를 주더라도 받고. 예전 같으면 ‘내가 거지야?’ 했을 텐데 지금은 그냥 받아들여. 뭐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니까 마음이 편해.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장애를 수용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바람이라면 시원하게 대소변을 보는 거! 소변은 호스를 통해 4시간마다 한 번씩 빼고, 대변은 항문에서 처리하거든. 그런데 내 몸은 배설의 느낌조차 없어. 성욕도 없고. 욕망조차 없다는 게 가끔 화로 분출되기도 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순간, 나락을 경험한 강원래의 멘탈은 어떨까. 나도 분명히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강원래의 얘기를 들으니 숙연해졌다. 내 경험은 별거 아니라는 생각뿐이다. 김건모씨가 ‘핑계’로 절정의 인기를 누릴 때 무대에서 함께 춤을 추었던 ‘핑계 걸’이 바로 김송씨. 그녀는 3인조 혼성 그룹 ‘콜라’의 멤버로도 활동했다. 춤이라면 그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던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역시나 나이트클럽이었다.

Q : 송이 씨는 언제 만났어

내가 고3, 송이 중3 때 나이트클럽에서 만났어. 그때는 사귀는 건 아니었고, 송이는 춤 잘 추는 애, 나는 날라리놈, 이 정도로만 알았지. 내가 1991년 1월에 군대를 갔는데 그때 송이한테서 편지가 왔어. 그때 송이가 20살 때지. ‘오빠 짝사랑했어요’라고 써 있는데 ‘이게 웬떡이냐’ 이랬지. 동시에 6명 정도 사귀고 있었어. 그땐 삐삐도 없을 때고. 그런데 군대 가니까 정말 다 깨끗하게 정리되는 거야. 그런 와중에 송이한테 편지가 딱 와서 나도 편지를 썼지. 한 550통 썼어. 송이가 나한테 쓴 게 150통, 합쳐서 700통이야.

Q : 그거 엮어서 책으로 내도 되겠다

안 그래도 다음 달에 나와(웃음). 아기한테 쓰는 편지야. 어디에서 처음 담배를 피웠는지, 어디에서 여자를 처음 만났는지, 어디서 무슨 사고를 쳤는지, 언제 제일 많이 울었는지, 언제 제일 힘들었는지 등을 적어서 아들한테 주는 거지. 대략 이런 편지야. “아들아, 나는 너를 어떻게 키웠으면 좋겠다. 담배는 피우지 마라. 너를 예뻐해줄 준엽이를 소개해줄게’ 이런 식으로. 족보식이랄까? 아빠와 엄마의 만남부터 다 알려주는 거지.

Q : 군대 편지를 기초로 만들었어

그 편지도 들어가. 내가 썼던 글씨체 하고 유치한 내용도 다. 가장 많이 들어가는 내용이 사고 이후 5년 동안 집에 있으면서 쓴 글이야. 휠체어에 대한 느낌이랑 ‘너 때문에 내가 사랑을 하게 되었고, 너 때문에 다시 밖에 나가게 되었어’라는 식의 글이지. 제목이 항상 ‘내 사랑 송이’였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여러 가지 써놨던 것들을 이제 모아서 아들한테 쓰는 편지 형식이 된 거야.

Q : 대단하다. 송이씨랑 올해 결혼 13년 차인데, 살아보니 어때

송이 성격이 단순해. 그래서 화낼 때 엄청 화내고 웃을 때 엄청 웃어. 늘 송이한테 고맙다는 생각을 하는데, 요즘은 고맙다는 생각은 물론이고 결혼하기 참 잘했다 싶더라고. 요즘 매사에 감사하고, 되게 순해지고 있는 거 같아. 선이 효과 같아. 하하.

자식들 속 썩일 때 부모들의 단골 멘트가 “너도 자식 낳아 키워봐라”다. 결혼을 했더라도 자식을 낳기 전까지는 아직 완벽한 가족이 됐다고 하기엔 부족하단 느낌을 갖는 건 나뿐일까. 강원래도 2002년 결혼한 후 우여곡절 끝에 올해 아들을 낳았다.

Q : 아들 이름이 ‘선’이지? 이름이 어감도 좋고 되게 선하게 느껴져

기분 좋네. 선이라는 이름은 내가 직접 지었어. 임신 6개월쯤 됐을 때 송이랑 태교 여행가서 태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무척 마음에 들더라고. 그래서 배 속 아이 이름을 태양이라고 하면 좋겠다 싶어서 이름에 ‘선’을 넣었지. 그래서 태명인 ‘선물’의 선, 영어로 아들을 뜻하는 ‘son’의 선, 태양을 뜻하는 ‘sun’의 선, 그리고 살면서 많이 베풀길 바라는 마음에서 ‘베풀 선’을 써서 이름이 ‘강선’이 됐어.

Q : 몇 년 고생 끝에 낳은 거야

햇수로 13년. 시험관 시술은 8번 했어. 5번을 한 다음에 또 한 몇 년 쉬고 하는 식으로 했거든. 기적이라고 생각해.

Q : 그동안 맘고생이 컸겠다. 갈등도 많았을 것 같고

일일이 말하기 힘들지 뭐. 시험관 아기 준비 중에 장모님도 돌아가셨어. 세 번째 시험관 시술 실패 후에 너무 힘들어서 3년 동안 쉬는데, 그때 장모님이 암 말기 판정을 받으신 거야. 장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손주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는데, 3년 동안 시험관 시술 안 한 게 너무 후회되더라고. 그래서 다시 도전했어.

Q : 근데 그 후에도 결과가 좋지 않았나 보다

응. 그날 송이가 어머니 임종을 보기 위해서 병원을 가느냐, 시험관 아기 시술을 위한 주사를 맞으러 가느냐 선택해야만 했어. 그 주사는 정확한 주기로 맞아야만 하거든. 당시 송이는 엄마도 아이를 원할 거라면서 시험관 아기 주사를 맞으러 갔어. 주사를 맞자마자 바로 장례식장으로 달려갔고. 근데 그때 시험관 아기도 실패했지.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게 너무 후회돼. 그때 힘든 게 참 오래가더라.

Q : 시험관 시술이라는 게 특히 여성들에겐 육체적으로 정말 힘든 과정이라고 하던데. 단 한 번 시술하는 것도 아이 낳는 고통보다 더 힘들다고 하더라고

실제로 한두 번 시도하고 포기하는 여성이 많다고 하더라. 그래서 송이한테 더 미안하고 고맙고 대견하고 그래. 특히 과정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기대하는 마음이었던 거 같아. 성공할 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배로 많이 힘들었어. 그때 송이랑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갈등도 심했어. 그런 과정들을 겪다 보니 어느 순간 다 내려놓게 되더라. 그러다가 우리 결혼 10주년 되는 날, ‘피 검사 성공’이라는 통보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정말 가슴이 뜨거워지더라고.

Q : 송이씨 건강은 좀 어때

출산 전날 병원으로 이동하다가 음주 운전 차량과 충돌했는데 다행히 괜찮아. 이제 산후 조리에 신경 써야지. 임신했을 때 체중이 20kg이나 늘었는데, 정말 애 몸무게(3.75kg)만큼만 빠지더라. 보통 6~8개월 지나면 서서히 빠진다는데, 솔직히 난 송이가 살 안 빼도 상관없어. 만삭 때 임신성 당뇨가 와서 식단 조절하느라 엄청 고생했거든. 그런 모습 보니까 맘이 안 좋더라고.

Q : 모유 수유하지

응. 하루에 네번. 매운 음식 조심하고, 인스턴트 식품은 절대 입에도 안 대. 송이가 임신했을 때 삼시 세끼 다 먹고 라면에 달걀 2개씩 풀어서 간식으로 먹었는데, 애 낳으니까 딱 끊더라. 역시 여자들의 모성애는 대단해.

시험관 시술과 모유 수유… 우리 집사람은 아들 셋을 낳아 키우며 모유 수유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모유를 짜는 기계를 통해 생후 보름 정도 모유의 맛은 보여줬지만 막상 모유 수유는 엄두도 못냈다. 그런데 강원래는 첫아들에게 모유수유를 하고 있었다. 좋은 아빠, 좋은 엄마다.

Q : 선이의 외모가 너 판박이라며. 뿌듯하겠다

눈은 송이 닮고, 눈 밑으로는 다 나 닮았어. 그래서 입이 좀 튀어나왔지. 그래도 나름 엄마 아빠 얼굴에 섞여서 조합이 괜찮아. 송이랑 내가 둘 다 보조개가 있어서 선이도 보조개가 있는데, 웃을 때 정말 예뻐. 왜 그렇게 다들 아들바보, 딸바보 하는지 알 거 같더라.

Q : 너도 선이가 웃는 모습 한 번 보려고 재롱부리고 그러니

나도 이런 내 자신이 믿기지 않아. 선이 앞에선 나도 모르게 아기가 되더라고. 온갖 동물 소리에 표정에 동작까지 하면서 동화책을 읽어줘. 태교할 때부터 계속 하고 있어.

Q : 아이한테 동화책 읽어주는 건 네 담당이야

나보다 송이가 많이 해주긴 하지. 그래도 내가 선이한테 해줄 수 있는 건 가급적 내가 하려고 해. 육아 쪽으로 선이에게 직접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서, 요즘은 송이 심부름을 잘하고 있어. 기저귀 갖다 달라거나 물 달라고 할 때 내가 후다닥 대령하지. 하하.
내가 아는 강원래는 어떤 틀이나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일 하는 사람이다. 오늘도 시간을 쪼개 본인이 안무를 맡고 있는 GPBASIC이라는 신예 걸그룹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어찌나 어린 청춘들인지. 곧 성공하겠지….

Q : 선이 낳고 변한 거야

순한 양이 됐지. 내가 원래 좀 까칠하잖아. 그런데 요즘은 송이가 그렇게 무섭더라고. 남들 하는 말이 와이프가 제일 무섭다는데, 나도 요즘 그런 거 같아. 송이는 24시간이 다 아기 위주로 바뀌었어. 선이가 깨면 어르고 달래고 모유 수유하고 트림 시키고 다시 재우고. 이걸 네 번 정도해. 보통 일이 아닌373거지. 엄마는 정말 위대한 거 같아.

Q : 선이와 이런 걸 해보고 싶다, 하는 게 있을 것 같아

보통 아빠들은 아들이랑 목욕탕 가서 등 때 밀어주거나 같이 축구하는 환상이 있던데, 나는 선이가 빨리 자라서 휠체어를 밀어줬으면 좋겠어. 그 기분이 어떨지 요즘 매일 상상하는데 아직 감이 안 와. 그냥 무지 좋을 것 같다는 상상만 하고 있어.

Q : 부부가 둘 다 춤꾼이라 선이의 끼도 뭔가 남다를 거 같아. 좀 더 커봐야 알겠지만 뭔가 기대가 된다.

하하 선이라는 이름처럼 많이 베풀고 겸손한 아이가 됐으면 좋겠어. 그리고 만약 선이가 춤을 춘다면 댄스 가수보다 댄서가 됐으면 해. 나도 항상 가수를 위해, 어떤 메인을 위해 일했거든. 내가 빛나는 것보다 남을 빛나게 한 거지. 우리 아들도 그런 사람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야.

Q : 아빠가 되고 나니 어때. 어깨가 무겁지

엄청. 요즘 물가를 기저귀 값과 분유 값으로 체감하는 중이지. 하하. 그래서 절약도 하고 더 열심히 살려고 해. 그동안 친구들한테 못 받은 돈도 좀 받고(웃음).

Q : 강릉에 있는 클론댄스학원은 요즘도 해

근데 자주 못 가. 처음엔 원생이 400명 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한 100명 정도 있어. 춤추고 싶은 애들은 다 와. 강릉 애들 위주. 강릉터미널에서 택시 기사한테 클론댄스 가자고 하면 다 알 정도로 나름 명소야. 아이돌 중에서 우리 학원 애들도 꽤 있고. ‘왓썹’이랑 ‘예아’라는 팀. ‘댄스 위드 더 스타’에 나오는 애들도 우리 애들이야. 내가 가르친 건 아니지만 뿌듯해.

Q : 강릉은 무슨 연고가 있어

대학을 강릉에서 다녔어. 산업공예학과 88학번. 고등학교 때 전교에서 거의 꼴찌였거든. 너 1등 했을 때 내가 꼴찌 했을걸. 하여튼 고등학교 때 공부는 못했고, 대학은 가야겠고. 전기로 건대를 시험 쳤는데 떨어졌어. 그리고 후기로 강릉대 시험을 봤는데 붙은 거지. 지방대라 마지못해 갔는데 막상 정이 많이 들었어. 나이트클럽 가려고 연탄 배달하고 신문 배달도 했고. 그땐 음악 듣고 춤추러 가는 거였으니까.

Q : 서울에서 강릉 왔다 갔다 할 때 차 운전은 어떻게 해

내가 직접 차에 휠체어 싣고 혼자 올라타서 운전해. 차에 장애인 보조 장치 하나만 설치하면 되거든. 사고 후 혼자서 뭘 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안 게 밥 먹을 때, 그다음이 운전할 때였던 것 같아. 그때 강변북로를 달리면서 대프트 펑크의 ‘Something About Us’를 틀어놓고 펑펑 울었어. ‘아, 내가 운전을 하는구나’ 그래서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그때 생각이 나. 그때가 2001년이었어. 한동안 옛날 기억 떠올리고 회상하고 추억하는 거 구질구질해 보여서 일부러 안 했는데, 이젠 일부러라도 그 시절을 떠올리려고 해. 불의의 사고로 이렇게 됐지만 선이에게 당당한 아빠도 되고 싶고, 한때 최고였던 그 시절 그때 추억도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거든. 언젠가 강원도에서 살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 하하.


‘귀거래사’라고 해야 할까. 성공하면 누구나 자신이 어렵고 힘들 때 자신의 버팀목이 돼주었던 사람이나 장소에 보은하고 싶어진다. 강원래는 강릉에 그렇게 빚을 갚고 있는 듯하다. 조만간 강릉에 들러 클론댄스학원에 가봐야겠다. 그곳 댄서들이 강원래 친구인 강용석을 모른 척 하진 않겠지. 가능하다면 원래와 준엽이, 그리고 영훈이와 함께 가보고 싶다. 새삼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동시에 나의 가장 뜨거웠던 때는 언제였는지 떠올려본다. 잠시 주춤했더랬다. 강원래는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다.

기획=정은혜 기자, 글=강용석, 사진=김지원(10visual studio)   [ 중앙일보] 입력 2014.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