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베트남 하노이를 설계하다… 건축가 김원의 秘史]

해암도 2014. 8. 4. 06:52
  • "오래된 아름다움은 내게 충격을… 도시가 시멘트로 덮이는 걸 막고 싶어"



"현재 광화문 교보빌딩은 도쿄 美대사관과 똑같아…
미국 건축가 시저 펠리는 작품집에 교보빌딩 안 넣어"

"5共 시절 秘苑 안에 영빈관 건립 계획 세워
대통령 결재까지 났으나 全斗煥, 장관 건의에 번복"


"김원(71)씨와 함께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나흘간 여행했다.

애초 그에 관한 지식은 유명한 건축가이고, 족보로는 고(故) 김중업·김수근을 잇고, 같은 세대는 김석철, 후배는 승효상이라는 것뿐이었다.

낯선 동행을 하게 된 것은 그가 '하노이 도시 설계'의 총책임을 맡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한국인 건축가가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빠져든 걸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2년 전 하노이를 처음 여행했다. 베트남전 당시 북부 월맹(越盟)의 도시로만 알았지, 하노이가 1000년 넘게 된 수도(首都)라는 걸 몰랐다. 구도심의 '36거리'에 있는 낡은 호텔에 묵었다. 옛날 상인들에 의해 공예·의류·신발·종이가게 등 36개 구역으로 특화된 거리였다. 그 오래된 아름다움은 내게 충격을 줬다. 건축가로서 뭔가 해야 한다는 소명을 느꼈다."

김원씨는 “1984년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에 ‘전쟁기념관’을 짓기 위해 들어간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원씨는 “1984년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에 ‘전쟁기념관’을 짓기 위해 들어간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하노이=최보식 기자
똑같은 풍경 앞에서 여행객들은 저마다 자신의 직업과 경험으로 다른 것을 본다. 하노이는 인구 900만명의 거대도시가 됐다. 한때는 '김우중의 대우호텔'이 최고의 빌딩이었지만 이제 순위권 바깥으로 밀려났다. 시내 곳곳에 마천루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우리가 거쳐 왔던 발전의 속도보다 빠르다. 이 도시는 끝없는 개발과 팽창 압력에 놓여 있다. 아직 남아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석조 건물과 좁은 골목들은 곧 사라질 것이다. 서울과 베이징처럼 시멘트로 덮이는 것은 막아야겠다, 내 사비(私費)를 들여서라도 구도심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발상은 어떻게 나왔나?

"1990년대 후반 '미당(未堂) 시문학관'을 짓기 위해 전북 고창에 갔을 때, 논밭에 고인돌들이 방치돼 있었다. 아무도 그 가치를 알지 못했다. 당시 군수에게 조언해 고창 고인돌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킨(2000년) 경험이 있었다. 국내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처음이었다."

―여기는 하노이고, 선생은 외국인인데.

"베트남에 진출한 '파나시아'라는 국내 기업이 가락도매시장의 3배 규모인 '농수산물 복합센터'를 도시 외곽에 짓게 된다. 배후에 신도심이 생겨나면 하노이의 전체 도시 계획을 재조정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하노이 2030 마스터플랜' 국제공모에서 당선한 '진아(眞我)' 설계사무소가 참여하고 내가 총감독을 맡았다. 결국 한국인들이 하노이의 미래 모습을 설계하게 되는 것이다."

―건축가가 도시 개발 계획과 관련이 있나?

"세계적인 건축가 중에는 커피잔이나 가구 디자인도 한다. 인테리어와 주택, 빌딩, 주택단지의 설계는 규모가 다를 뿐 철학은 하나다. 건축 설계와 도시 설계는 개념에서는 거의 같다."

―실제 도시 설계의 경험이 있나?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한 뒤 '김수근 건축연구소'에 들어가 보니 울산공업도시를 설계하고 있었다. 아마 국내에서 도시 설계로는 울산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 뒤 여의도 설계(1967~69년)를 맡았다."

―여의도는 그때 모래밭이었을 텐데.

"여의도 비행장 활주로만 있었다. 먼저 둑을 쌓아 홍수 때도 강물이 넘어오지 않도록 했다. 여의도 설계는 서울의 팽창과 인구 포화의 압력을 빼주기 위한 것이었다. 정치적 간섭으로 애초 취지대로 되진 않았다."

―정치적인 간섭이라면?

"설계를 마쳤는데, 청와대에서 북한군의 사열식을 보고는 '우리도 광장을 만들자'고 해 5·16광장이 들어가게 됐다. 여의도의 스케일에 맞지 않는 광장이었다. 나중에 이를 공원으로 바꾼 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선생은 건축에서 무엇을 추구하나?

"건축은 예술이 아니라, 사람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활공간이다. 삶에 대한 이해에서 건축이 있다. 서양에서는 예술의 이름으로 과도하게 건축이 부풀려졌다. 우리 전통 건축의 가치관은 다르다."

―어떤 차이가 있나? 사람 사는 것은 같은데.

"서양의 건축은 자연에 대항하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비바람을 이겨내고 외적을 막는 단단한 보호막, 셸터(shelter)였다. 동양에서는 자연이 정복과 극복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람이 자연의 일부였다. 우리 전통 건축은 자연과의 조화와 순응에 중점을 뒀다."

―동양은 정신, 서양은 물질이라는 식의 이분법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를 강조하는 것은 간혹 거짓 위안처럼 들린다. 서양이 과연 물질일까? 실제 우리는 서양 건축물을 표준으로 삼고 따라가고 있지 않는가?

"1994년 미국의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삼성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삼성은 그에게 리움 미술관의 설계를 맡길 계획이었다. 당시 삼성의 요청으로 내가 게리를 안내했다. 그에게 종묘(宗廟)를 보여줬다. 가로로 길게 이어진 종묘 앞에서 그는 멍하니 서 있다가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느낌을 묻자 '잘 모르겠다'고 했다. 서양의 건축 기준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돼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의 눈에 이국적이었기에 그런 게 아니었을까?

"작년에 그가 다시 방한했을 때 '15년 전 종묘에 대한 감동을 잊지 못해 다시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여성을 둘째 며느리로 맞았고 본인과 가족이 여생을 함께 보낼 주택을 종묘의 콘셉트로 설계 중'이라고 했다."

최보식 선임기자와 김원의씨 사진
―선생은 400여 편의 건축 설계를 했고, 이 중 절반이 건물로 구현됐다고 들었다. 선생의 철학대로 구현된 건물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옥인동 집이 그런대로 반영됐다. 1980년대 후반에 남의 집을 사서 고친 것이다. 2층 화장실 변기에 앉으면 인왕산이 보인다."

―본인의 대표작으로 꼽는 것은?

"건물의 미학으로 따지면 명동성당 뒤편 성바오로수녀회 건물(1982년)을 친다. 일본 가지마(鹿島) 출판사가 '세계 100인의 건축가'에 김수근과 나를 뽑으며 이를 가장 아름다운 벽돌 건물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도심의 랜드마크가 되는 건물은 하지 못했다. 주로 문화·종교·교육 시설을 많이 했다."

―왜 그런가?

"상업적인 빌딩의 의뢰가 오면 잘 맞지 않았다."

―고객인 건축주의 요구가 우선 아닌가?

"그렇기는 하다. 광화문 교보빌딩을 짓기 전 신용호 당시 교보 회장은 한국 건축가 몇 명과 함께 마음에 드는 건물을 찾기 위해 세계 일주를 했다. 못 찾고 일본 도쿄에 와서야 주일 미국대사관 건물에 꽂혔다. 아르헨티나 출신 미국 건축가 시저 펠리의 작품이었다. 그를 불러 '미국대사관과 똑같이 지어달라'고 했다."

―교보빌딩이 주일 미국대사관 건물과 같다는 뜻인가?

"시저 펠리는 새 작품을 들고 신 회장을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지금 교보빌딩은 주일 미국대사관의 판박이다. 시저 펠리는 자신의 작품집에도 교보빌딩을 싣지 않았다."

―대기업 오너라면 건축물을 보는 눈도 있지 않을까?

"현 국세청 건물(종로타워)은 우루과이 출신 미국 건축가 라파엘 비뇰리의 작품이다. 원래는 건물을 받치는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지하의 선큰가든(지하 정원)에서 솟구쳐 올라오게 돼 있었다. 삼성건설이 지었는데, 이건희 회장의 한마디로 선큰가든이 없어졌다. 라파엘 비뇰리로서는 황당했을 것이다."

―독립기념관과 예술의전당 건립 때는 마스터플랜(종합계획)을 맡았다고 들었다.

"후보지 선정 작업, 타당성 조사, 건물 배치 등을 담당했다."

―마스터플랜대로 모두 지어졌나?

"애초 독립기념관에는 청소년 수련원과 부대 건물이 계획돼 있었다. 하지만 기념관만 짓고 말았다. 처음부터 정치적인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건축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추진위원회에서는 기념관 안에 '전두환 전시관'을 넣으려고 했다. 내가 '이렇게 할 경우 정권이 바뀌면 독립기념관이 지속될 수 없다'고 설득했다. 그런 정권에서도 합리적인 건의는 잘 받아들여졌다. 한번은 창덕궁 비원(秘苑)에 '영빈관'을 만들려고 했다."

―창덕궁 안에 '영빈관'을?

"외국 수반이 묵을 영빈관이 없는 나라는 사실 드물다. 총무처에서 이미 대통령의 결재까지 받아서 영빈관 건축을 문공부에 통보했다. 당시 내가 문화재위원이었다. 이진희 문공부 장관을 설득하자, 그는 '이건 문제 있지' 하면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러 들어갔다. 이미 자신이 결재한 사안을 뒤집는 대통령은 거의 없다. 하지만 전 대통령은 영빈관 계획을 없던 일로 했다."

그는 1984년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에 '전쟁기념관'을 짓기 위해 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우화(寓話) 같은 얘기다. 전혀 알지 못하는 안기부 직원이 찾아와 '전쟁기념관' 설계 제의를 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이란과 전쟁 중인 이라크행 비행기를 탔다. 가 보니 이라크군의 모든 군수품이 한국제였다. 모포·텐트·탄띠·군복·헬멧·수통·모기장 등…, 미국의 눈을 피해 장사한 것이다. 이런 이라크에 보답하기 위해 안기부에서 '전쟁기념관'을 지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때 이라크는 북한과 가까웠지 않았나?

"북한과 13년간 형제국이었다. 김일성 배지처럼 후세인 배지를 달고, 모든 가정에 후세인 초상화를 걸게 한 것도 북한 독재 시스템에서 배워온 것이다. 그런데 이란과 전쟁 중 붙잡힌 포로 중에서 북한 사람이 나왔다. 북한 용병이 이란을 위해 참전해온 게 드러난 것이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벌어진 틈으로 우리 안기부가 들어간 것이다."

―전쟁기념관은 지어졌나?

"형식은 이라크 국민 모금으로 하고, 실질적으로는 현대건설에서 마련해 지을 계획을 했다. 당시 현대는 이라크 건설사업을 독점했다. 한국인 노무자만 1000여 명이 근무했다. 그런 현대가 재원 기부에 난색을 표해 실행되지 못했다."

―아쉬운가?

"그때 이라크에서 내 구상은 '전쟁기념관'이 아니라 '평화기념관'이었다. 나는 하노이에 '평화기념관'을 지어주고 싶다. 베트남은 전쟁이 많았고 우리와 그런 인연도 있었다."

갑자기 뇌우(雷雨)가 퍼부었다. 차창 바깥 풍경이 어둑해졌다. 도로에는 흙탕물이 콸콸 흘렀다. 바퀴가 잠겼고, 차의 엔진이 금방 꺼질 것 같았다.
  • 최보식
    편집국
    E-mail : congchi@chosun.com
    선임기자
  • 입력 : 2014.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