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부천시 상동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작업실에서 이종범 작가가 자신의 책을 들고 웃고 있다.
[사진작가 김도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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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나는 그 두 가지 사이에서 남다른 해법을 제시하는 한 사람을 찾아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 웹툰 작가 이종범(32)이다. 말 그대로 그는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다. 요즘에야 웹툰 작가가 인기직업으로 떠올랐지만 여전히 아버지들이 보기에는 ‘밥 굶기 딱 좋은’ 일이다. 특히나 작가 지망생과 백수는 우리 사회에서 ‘동의어’로 통한다. 그도 데뷔하기 전까지 꼬박 2년간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연재를 하기 위해 수많은 매체의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곤 했다.
“물이 발목까지 차오르는 반지하 작업실에서 마감을 하고, 미숫가루로 연명하다 삼각김밥으로 곡기를 채우곤 했어요. 애초에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 것은 ‘옵션’에 없었죠.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했거든요. 덕분에 일찌감치 제 한계를 테스트할 기회는 많이 얻은 셈이죠. 만약 제가 부잣집 아들이었다면 지금보다 운이 훨씬 더 좋아야 했을 거예요.”
아버지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었고 그는 삼 남매의 둘째였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가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그 꿈을 지원해줄 환경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일로 생존하려면 재능을 키울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 돈 걱정 없이 오롯이 좋아하는 일에만 몰입할 시간. 그도 전업 작가로 데뷔하려고 보니 스스로를 키우는 데 최소 3년 이상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더구나 데뷔는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빈약한 실력과 더 빈약한 통장 잔액. 이런 차디찬 현실과 뜨거운 꿈의 무간지옥에 빠질 때 많은 이가 자아분열을 거듭하며 길을 잃는다.
여자 친구에게 밥 한 끼 사고 싶은 내가, 맨날 얻어먹기만 하는 나를 부끄러워한다. 멋진 스토리를 열망하는 내가, 천재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나를 조롱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착한 아들’인 내가 작가 지망생인 나를 무릎 꿇리고 야단치는 일이다. 그도 데뷔하기 전 명절 때마다 그의 직업을 묻는 친척들에게 난감한 표정을 짓는 부모님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내 안의 나를 괴롭히는 대신 끊임없는 화해를 모색했다. 예를 들면 추석 때 갈비 한 짝을 집에 들고 가기 위해 보험설계사 시험을 치기도 했다. 어떤 보험회사가 시험에 합격하면 갈비 한 세트를 준다는 광고를 보고 일주일 강의 듣고 공부해서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다시 가서 만화를 그렸다. 주말엔 재즈밴드 드러머로 결혼식 공연을 해 돈을 벌었다. 밤에는 영어 학원에서 영문법 강의도 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양쪽에 발을 걸친 채 오랫동안 걸어왔다. 양다리를 걸쳤다는 것은 각각 외다리를 걸친 것과 마찬가지다. 외다리로는 오래 버틸 수 없으니 양쪽 사이를 번갈아 가며 뛰어야 한다. 마치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듯 당연히 몸은 두 배로 바쁘고 힘들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내 안의 수많은 나를 설득하는 일이다.
“수많은 나를 이해시키고 화해시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래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디테일하게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자기이해가 돼야 주변의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으니까요.”
모든 디지털 이미지들은 ‘픽셀’이라는 최소단위로 이뤄져 있다. 픽셀이 많아질수록 해상도는 높아지고 이미지는 선명해진다. 반대로 픽셀이 적을수록 해상도는 떨어지고 수많은 해석이 가능한 추상화처럼 보인다. 이종범 작가는 ‘나’라는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 ‘경험의 픽셀’이 적으면 ‘자기이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행히 그는 본능적으로 안 가본 길은 일단 가고 봤다.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 자기이해의 중요한 조각이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런 면에서 제게 대학생활은 신세계였죠. 교양수업으로 수화를 배우면서 소통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학교의 재즈 동아리에서는 제법 악기 다루는 데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아르바이트로 학원 강사를 하면서 무언가를 말하고 가르치는 일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죠. 그렇게 발견하고 키워온 여러 명의 ‘나’는 지금의 저를 만든 든든한 지원군이 된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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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좋아하는 일로 생존하기’라는 우리 시대 청춘의 절대 로망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마찬가지다. 여건이 안 되니 좋아하는 일에 집중해 단시간에 빛을 보는 것은 어려웠다. 대신 오랫동안 차근히 준비했다. 힘들면 쉬었다 가고, 돌아서 가더라도 자신을 믿고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알았다. 좋아하는 일들이 서로 부딪칠 때는 어느 한쪽을 포기하거나 투명인간 취급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좋아하는 일들로 자신의 삶을 무지개처럼 채울 수 있었다. 아마 그가 아버지 나이 정도 되면 안 가본 길에 대한 미련은 훨씬 적으리라.
[ 중앙선데이] 입력 2014.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