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옥스포드대 이발소의 3대 헤어스타일은 신사식, 학생식, 뱃사람식

해암도 2014. 6. 21. 15:04


월드컵 열기로 지구촌이 뜨겁습니다. 영국도 예외는 아닐텐데 한국에서 듣던 것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잉글랜드와 이탈리아의 빅매치가 있던 날 영국인들도 관심을 보이더군요. 아다시피 이탈리아의 2대1승리로 끝났지요.

제가 있는 울프슨칼리지 학생들은 이날 두군데에 모였습니다. 커먼룸(Common Room)과 바(Bar)였습니다. 커먼룸에선 피자 한판과 캔맥주를 놓고 차분히 시청한 반면, 바는 시끄러웠습니다. 영국이 지니 말없이 돌아가더군요.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이란 미국드라마를 기억하시는지요. 어렸을적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납니다. 원작(原作) 제목 ‘The Paper Chase’는 학위(學位)따기, 어린이들의 종이 술래잡기지만 이렇게 절묘하게 번역했습니다.

하버드의 ‘형님뻘’이라는 옥스포드대생들은 어떻게 놀까요? 저의 미국대학 경험은 한달뿐입니다. 2년전 하와이대 마노아캠퍼스에서 미래연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불타는 금요일’을 보낸다는데 실제 목격한 적은 없습니다.

12일이 이곳에 온지 한달됩니다. 옥스포드대학생들은 토·일요일이면 잔디밭에서 샌드위치와 맥주로 점심을 즐기거나 바비큐파티를 하는 수준입니다. 울프슨칼리지에선 주말, 여기저기서 캔맥주나 와인잔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드물게 ‘거칠게’ 노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어느날 캠퍼스에 중국 국기(정확히 말하면 옛 중공) 비슷하게 붉은색 바탕 한가운데 노란색 큰별을 그린 깃발을 걸어놓은 ‘공산주의자(Communist)’ 모임이 열렸습니다. 여학생들이 콧수염을 달고 군복비슷한 걸 입었는데 그게 스탈린을 상징하는 것처럼 짐작했습니다. “아직도 한물간 공산주의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구나, 젊은이들은 다르구나”하고 생각했는데 이 친구들 노는게 가관이더군요. 캠퍼스 곳곳이 술판이고 담배꽁초 투성이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울프슨 칼리지의 청소원들이 깨끗하게 청소하긴 했지만요. 이런 예외적인 광경을 제외하면 영국 대학생들은 펍으로 달려가지 캠퍼스에서 놀진 않는 것 같습니다.
차월강에서 학생들이 펀팅을 즐기고 있다. 배위에서 한 여학생은 햇살을 즐기느라 벌렁 누워있다./사진=이서현 작가
차월강에서 학생들이 펀팅을 즐기고 있다. 배위에서 한 여학생은 햇살을 즐기느라 벌렁 누워있다./사진=이서현 작가
영국 대학생들이 즐기는 놀이 중 대표적인 것이 캠퍼스 차월(Cherwell)강에서의 보트타기입니다. 학교 측에 신고하면 된다는데 긴 작대기를 수면 밑으로 집어넣어 배를 앞으로 미는 식입니다. 그걸 펀팅(Punting)이라고 합니다.
옥스포드에서 분리된 캠브리지대학에도 이런 놀이가 성행합니다. 캠브리지 리버가 옥스포드로 치면 차월과 같습니다. 영국인은 해양강국답게 배를 좋아한다는 것을 여기서 느꼈습니다. 옥스포드대생들도 예외는 아니지요.

옥스포드대 기념품점에 가면 크루(Crew)복장의 옷이 항상 등장합니다. 이발소에는 신사식, 학생식에 이어 선원식 머리깎기라는 글이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깎는게 선원식인지 궁금해 그곳 지날 때마다 항상 들여다봅니다.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조정을 들고 나서는 칼리지대표 선수들. 이겨야겠다는 눈빛이 번득인다./사진=이서현 작가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조정을 들고 나서는 칼리지대표 선수들. 이겨야겠다는 눈빛이 번득인다./사진=이서현 작가
이러던 어느 토요일, 옥스포드 동양학센터에서 한국학을 공부하는 서른네살 토마스가 카톡을 보내왔습니다. ‘오늘 내가 섬머에이트(Summer Eight)에 울프슨칼리지 대표로 출전하는데 나와서 응원해주세요.’ 물론 한국말로요. ‘어딘데’하고 물으니 ‘아이시스리버(Isis River)’랍니다. 거기가 어딘지 궁금해하니 크라이스트처치앞에 있는 강이군요. 저는 차월의 지류인줄만 알았는데 다른 이름이 있었군요. 쉬려고 했지만 실망할것 같아 나갔습니다.
이제 결승점이 보인다. 조정은 단위시간당 체력 소모가 굉장히 큰 스포츠다. 일사분란한 호흡이 제일 중요하다./사진=이서현 작가
이제 결승점이 보인다. 조정은 단위시간당 체력 소모가 굉장히 큰 스포츠다. 일사분란한 호흡이 제일 중요하다./사진=이서현 작가

경기에 이긴 칼리지 대표선수들이 방향과 속도 등을 지시하는 여학생을 헹가래치고 있다. 역시 젊음은 신선하다./사진=이서현 작가
경기에 이긴 칼리지 대표선수들이 방향과 속도 등을 지시하는 여학생을 헹가래치고 있다. 역시 젊음은 신선하다./사진=이서현 작가
정말 놀랐습니다. 옥스포드 시민 전체가 모인 것처럼 인파로 북적였습니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옥스포드 여러 칼리지를 상징하는 티셔츠차림부터 뭔가 뜻이 있는 것 같은 양복입은 남녀노소가 어우러진 거대한 축제입니다. 섬머 에이트는 8인이 모는 조정(漕艇)입니다. 맨앞에는 대개 여성이 앉아 지휘합니다. 룰이 까다로운데 요약하자면 뒷배가 앞배를 추월하면 경기가 끝나는 식입니다. 한 칼리지에서 여러팀이 출전하기에 순서가 복잡합니다.
아이시스강을 따라 각 칼리지별 응원석이 줄지어 있다. 승패도 중요하지만 옥스포디언들은 이날 공부로 지친 심신을 달랜다./사진=이서현 작가
아이시스강을 따라 각 칼리지별 응원석이 줄지어 있다. 승패도 중요하지만 옥스포디언들은 이날 공부로 지친 심신을 달랜다./사진=이서현 작가
이렇게 토너먼트로 진행하는데 관심을 끄는 것은 누가 이겼느냐가 아니라 관중들의 응원입니다. 구운 소시지를 넣은 빵을 안주삼아 영국인들이 여름을 보내려면 반드시 마셔야한다는 ‘핌(Pimm)’을 마시며 환호성을 울립니다.

핌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켄트주에 사는 농부의 아들이 굴 요리집(Oyster Bar)을 런던 영국왕립은행 근처에 차렸습니다. 진을 베이스로 깔고 몇가지 ‘비밀음료’를 섞은 것이 선풍적인 인기를 끕니다. 1823년의 일이라지요. 핌은 그로부터 진화를 거듭해 1851년에는 다른 바에도 공급을 시작하게 됩니다. 제가 마셔본 핌은 진에 두세가지 음료를 혼합한 뒤 얼음을 넣고 딸기와 사과조각에 향내나는 이파리를 얹은 것으로 갈증 해소에 그만이지요.
서머 에이트는 옥스포드대학뿐 아니라 시민 전체의 축제다. 남자처럼 콧수염 분장을 한채 구경하러온 여성들. 손에 들고있는 게 바로 영국인의 여름 음료라는 '핌'이다./사진=이서현 작가
서머 에이트는 옥스포드대학뿐 아니라 시민 전체의 축제다. 남자처럼 콧수염 분장을 한채 구경하러온 여성들. 손에 들고있는 게 바로 영국인의 여름 음료라는 '핌'이다./사진=이서현 작가
지금은 대표적인 제조법이 진, 스카치위스키, 브랜디, 호밀을 원료로 한 라이위스키, 보드카 등 6가지를 베이스로 하고 위에 바마다 특색있는 과일이나 음료를 섞는 식이라고 합니다. 한잔에 보통 4파운드 25펜스 정도지요.

펍 얘기가 나왔으니 소개할 곳이 있습니다. 옥스포드에는 유명 펍이 많아 관광지도까지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곳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이글 앤 차일드(The Eagle & Child)’와 ‘램 앤 플래그(Lamb & Flag)’입니다. 이글앤 차일드는 우리 말로 표현하면 ‘독수리와 아이들’인데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곳이 1650년에 생겼는데 그 역사 못지않게 관심을 끄는 것이 두 문학 거장이 교유하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반지의 제왕’을 쓴 J.R.R. 톨킨과 ‘나니아연대기’의 작가 C.S. 루이스입니다. 톨킨과 루이스와 친구들이 여기서 ‘잉클링스(Inklings)’라는 모임을 결성했는데 그들은 이 펍을 ‘새와 어린이(The Bird & Baby)’라고 불렀답니다.
300년이 넘은 펍 '이글 앤 차일드'의 내부. 손님들은 맥주나 핌을 시켜 안주없이 대화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사진=이서현 작가
300년이 넘은 펍 '이글 앤 차일드'의 내부. 손님들은 맥주나 핌을 시켜 안주없이 대화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사진=이서현 작가
이글 앤 차일드의 내부는 고풍(古風)스럽습니다. 어둑한 실내에서 투박한 나무테이블에 앉아 그들이 자랑하는 피시 앤 칩스에 에일맥주 한잔 즐기면 곁에서 톨킨과 루이스가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할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맞은편에 있는 ‘램 앤 플래그’ 역시 유래가 깊습니다. 아직 가보진 못했지만 이름이 예수로부터 나왔답니다. ‘영광스러운 양들의 신(神)’이라는 뜻이라는데, 아마 사람들을 양에, 예수를 그 목자(牧者)에 비유한 것 아닐까 합니다. 세례 요한을 기리는 것이라고도 하는데 특이하게도 이 펍은 바로 옆 세인트 존스칼리지 소유라는 겁니다. 펍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대학원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합니다.
이글앤차일드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흑백사진. 왼쪽이 바로 '반지의 제왕'을 쓴 작가 톨킨의 1972년 모습이다./사진=이서현 작가
이글앤차일드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흑백사진. 왼쪽이 바로 '반지의 제왕'을 쓴 작가 톨킨의 1972년 모습이다./사진=이서현 작가

톨킨 사진 옆에는 루이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다. 둘이 펍에서 문학논쟁을 벌인 결과가 바로 현대 상상문학의 양대 걸작이다./사진=이서현 작가
톨킨 사진 옆에는 루이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다. 둘이 펍에서 문학논쟁을 벌인 결과가 바로 현대 상상문학의 양대 걸작이다./사진=이서현 작가
램 앤 플래그에도 역시 문학가의 사연이 있습니다. 영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토마스 하디가 ‘무명의 주디(Jude The Obscure)’를 쓴 곳이 램 앤 플래그입니다. 톨킨과 루이스와 잉크링스 멤버들도 ‘이글 앤 차일드’에서 한잔한 뒤 여기 들러 술잔을 부딪치며 논쟁을 이어갔겠지요.

한때 책깨나 읽었다고 자부한 적이 있습니다. 3000권 가량의 책을 라면박스에 넣어 이사다닐 때마다 가지고 다니다 도저히 좁은 공간에 놓을 자리가 없어 처분할 때 젊은날의 추억이 송두리채 사라지는 것처럼 허전했지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읽은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유명하다는 영국작가 책은 하나도 아는게 없는지, 다시 책을 모아볼까 하는 욕심이 불끈 솟는 것을 보면 옥스포드에서 다시 대학시절로 돌아가고 있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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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mail : gsmoon@chosun.com
    1962년생,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석사와 한양대..


 조선 : 2014.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