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해암도 2014. 6. 20. 19:33

세상 떠나기 직전의 밴플리트, 내 거수경례 받고 눈물범벅

          
 아이스크림 장군 밴플리트

그가 100세 생일을 앞두고 거동조차 불편하다는 전갈이 전해졌다. 나는 밴플리트의 자상한 면모를 어느덧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 나도 70줄에 들어선 노인이건만, 그가 혹시 갑자기 세상이라도 뜨기 전 얼굴 한번이라도 뵈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생각에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뉴욕에 거주하는 딸의 집을 먼저 들렀다.

나는 딸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플로리다 행 비행기 표를 예약해라. 너도 같이 가자”고 했다. 딸은 “아버지도 이제 노인이신데 한국에서 먼 길 오셨으면서 어딜 또 가시자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나는 “잔말 말고 어서 마련해”라고 말을 끊었다. 딸은 그런 나의 반응에 퍽 당황했다고 한다. 평소 차분하기만 했던 내가 벌컥 화를 냈기 때문이다.

나는 딸과 함께 플로리다로 향했다.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비행기 속에서 밴플리트와 나, 그리고 전화(戰火)에 휩싸인 채 갈 길을 잃고 헤맸던 당시 대한민국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전선의 적에 의해 휘둘리고 있던 대한민국에 홀연히 나타난 인물이다. 그리고 2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대한민국 국방의 기저(基底)를 크게 다질 수 있도록 상황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서울 동숭동 서울대 자리에 있던 미8군 사령부의 주말 단골 손님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사령부 현관을 나선 이 대통령 내외와 밴플리트(오른쪽), 필자(왼쪽) 모습.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서울 동숭동 서울대 자리에 있던 미8군 사령부의 주말 단골 손님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사령부 현관을 나선 이 대통령 내외와 밴플리트(오른쪽), 필자(왼쪽) 모습.
비행기 속에서 잔잔히 떠올렸던 밴플리트 장군의 면모 중 하나가 ‘음식’이었다. 그는 늘 남과 음식을 나눠 먹기 좋아했다. 야전의 현장에 나타나 나와 함께 걸을 때 그는 주머니에서 항상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당시로서는 우리가 접하기 힘들었던 오렌지를 비롯해 비스킷과 과일 등이었다. 그는 늘 자신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음식을 지니고 다녔다.

밴플리트는 그런 주머니 속의 음식을 꺼낸 뒤 “백 장군, 이 거 한 번 먹어보라”며 권했다. 나는 그 덕분에 오렌지를 비롯해 미군의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아이스크림을 무척 좋아했다. 자신의 공관에서 식사를 할 때 그는 후식으로, 또는 식사랑 상관없이 아이스크림을 찾았다. 그때도 “함께 먹어보자”며 곁의 사람과 나누기를 좋아했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전쟁 와중인데도 주말이면 서울 동숭동 옛 서울대 자리에 있던 미8군 사령부를 찾았다. 밴플리트 장군이 미8군 사령관으로 있을 때 더욱 그랬다. 그곳에서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미8군 사령관으로부터 ‘극진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대통령은 1875년 출생이어서 1892년에 태어난 밴플리트 장군의 ‘아저씨뻘’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주말에 이 대통령 내외를 모셔 놓고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식탁 위의 스테이크와 칠면조 고기 등을 썰어 둘의 접시에 올려놓는 ‘서빙’을 매우 즐겼다. 그런 밴플리트의 친절한 서비스를 이 대통령 내외는 퍽 즐겼다. 매번 그런 주말의 회동이 끝난 뒤 이 대통령 내외는 한껏 유쾌해진 표정으로 차에 올라타 사령부 정문을 빠져나오곤 했다. 나도 그런 자리에는 자주 참석했다.

비행기가 플로리다의 한 공항에 내렸다. 그의 고향에 왔다는 생각에 우선 기뻤다. 그곳으로부터 딸과 나는 자동차를 빌려 타고 2시간 정도를 더 달려야 했다. 그는 은퇴 직후 평소의 소원대로 고향 플로리다에 목장을 마련했다. 다양한 사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는 원래 그의 소박한 꿈대로 육우 50여 마리를 키우는 목장을 만들고 그곳에 안주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밴플리트 장군과 더할 나위 없이 사이가 좋았다./라이프지(誌)
이승만 대통령은 밴플리트 장군과 더할 나위 없이 사이가 좋았다./라이프지(誌)
플로리다 밴 플리트 목장

멀리 그의 목장이 보였다. 정문에는 그의 둘째 딸이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밴플리트는 거동이 불편해 집안 거실에 있다고 했다. 목장 문을 들어서면서 나는 다시 군산의 옥구비행장, 그리고 실종으로 이미 사망했다고 봤던 그의 아들 침대와 그곳에 들어서서 물끄러미 아들의 관물을 지켜보던 밴플리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는 현관을 지나 그의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의 한 구석 휠체어에 앉아 있던 밴플리트 장군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 역시 세월을 비켜갈 수 없었던 듯했다. 185㎝에 달하는 거구는 어느덧 작아져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에 마주치면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거수경례를 했다. “Sir,….”

밴플리트 장군도 몸을 곧추 세웠다. 그러나 기력이 아주 떨어져 보였다. 그는 내가 거수경례를 올리자 역시 마찬가지 몸짓을 했다. 그러나 팔을 들어 올릴 힘마저 없어 보였다. 그는 왼손을 들어 올려 오른팔을 받치면서 간신히 거수경례를 했다. 희미한 표정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이 반가움으로 빛나는 듯했다. 나는 경례를 마친 뒤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나의 얼굴, 그리고 밴플리트 장군의 얼굴은 벌써 눈물로 범벅을 이루고 말았다. 세월의 야속함에 흘리는 눈물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반가움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휠체어에 의지해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밴플리트 장군은 그저 처연(悽然)하기만 했다. 말도 없이 우리는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밴플리트 장군의 말은 내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반가움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노쇠할 대로 노쇠해진 장군은 얼굴과 입술을 제 마음껏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느덧 40여 년 전 나와 함께 싸웠던 한국의 전선을 회고하고 있었다. 밴플리트 장군의 말은 오직 그의 둘째 딸만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장군은 나와의 사이에 둘째 딸을 앉혀두고 먼 기억 속의 한국 전선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의 기억은 제법 또렷한 편이었다. 그러나 기력이 많이 떨어져 오랜 동안 그와 말을 나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를 쉬게 해야 할 시간이었다. 아울러 밴플리트 장군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플로리다 그의 목장에서 헤어진다는 일은 이제 이 세상에서 그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 경례를 올렸다. 마음의 평정을 찾은 뒤였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헤어질 수 있었다. 40여 년 전의 전우(戰友)와 헤어지는 심정은 비교적 차분했다. 밴플리트는 거실의 휠체어에 앉아 나의 경례를 받고 역시 답례를 했다. 그는 희미한 손짓으로 나와 딸을 배웅했다. 밴플리트는 옆에 서있던 자신의 딸에게 한 두 마디를 건넸다.
은퇴 뒤에도 밴플리트는 한국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서울을 자주 방문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밴플리트를 접견하는 모습./대통령 기록관
은퇴 뒤에도 밴플리트는 한국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서울을 자주 방문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밴플리트를 접견하는 모습./대통령 기록관
둘째 딸은 문 앞까지 따라 나왔다. 나는 밴플리트 장군이 나를 보내면서 자신의 딸에게 건넨 말이 무엇인지 괜히 궁금해졌다. 나는 어느 정도 그 내용을 짐작했다. 집 문을 나서면서 나는 장군의 둘째 딸에게 “아버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라고 물었다.

딸은 살며시 웃으면서 “별 말씀은 아니고요, 그저 백 장군 가시기 전에 점심이라도 꼭 대접해서 보내라고 하셨어요”라고 대답했다. 역시 내 짐작은 맞았다. 밴플리트 장군은 평소의 습관대로 자신의 먹을 것을 나눠주려는 배려를 보였던 것이다. 내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웃음이 떠올랐다. 장군의 딸은 그런 내 웃음을 보면서 궁금증이 이는 듯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나는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들러 그의 묘소를 찾기도 했다. 그보다 먼저 세상을 하직한 부인 헬렌 여사, 그리고 한국의 전선에 공군 비행사로 참전했다 행방불명 뒤 사망한 그의 아들 밴플리트 2세가 그의 이름과 함께 묘비를 장식하고 있었다.

세월은 그렇게 옛 전우를 안고 흘러갔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아직 생생하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 그리고 대한민국과 내게는 매우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으나 자신이 싸워야 했던 적에게는 매우 무서운 인물이었다. 아울러 적 앞에서 등을 보이며 도망치는 아군에게는 아주 혹독한 사람이기도 했다.

1951년 4월에 그는 한국 전선에 신임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미국 본토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비해 전투력이 훨씬 떨어진 군대의 지휘관으로 있다가 미군 수뇌부의 부름을 받아 급히 한국 전선으로 옮겨왔다. 그가 속한 미군이 2차 세계대전 뒤에 계속 해체와 약화(弱化)의 길을 걸어왔지만, 그는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최선봉으로 유타비치에 올라섰던 당시의 용기와 기개를 전혀 잃지 않고 있었다.

마침 중공군의 막바지 춘계 공세가 펼쳐지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중공군은 1·4 후퇴로 내줬다가 우리가 다시 탈환한 서울까지 집어삼킬 기세로 덤벼들고 있었다. 미군은 이제 완연히 중공군의 괴이하다 싶을 정도의 변칙적인 작전에 적응해가던 무렵이었다. 그러나 국군은 여전히 중공군이 먹잇감으로 노리는 대상이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E-mail : q5423q@hanmail.net
1920년 11월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출생 1940..


입력 : 2014.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