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어버이날 봉투가 왜 아내 주머니로만 들어가는지...

해암도 2014. 5. 29. 06:47


노을 지는 벤취에 나란히 앉아계신 노부부를 볼 때면 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릅니다.

아, 나도 저렇게 아름답게 나이 들 수 있을까?

그러나 오늘 사연을 읽고, 우리 젊은이들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발견했습니다.

나이 들었다고 갑자기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군요.

취향과 성격의 차이, 사적인 영역다툼으로 여전히 칼로 물베는 중인 노년.

아직 펄펄 살아 있는 아버지를 어머니의 치마폭 속에만 싸놓으려는 자식들이 야속하다는 오늘의 손님입니다.

 

다만 내복 한 벌씩이라도

부모 대접은 동등해야...

 

 

안녕하십니까? 홍여사님.

별별다방을 통해 요즘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도 엿듣고, 새로 배우는 것도 많은 육십대 남성 독자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제 자신이 ‘사연’을 품고 별별다방 문을 두드려봅니다.

말 꺼내기도 민망하고 치사한 사연이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 멍석을 깔아주는 게 바로 별별다방 아닌가 싶어서요.

 

저는 올해로 결혼 40주년을 맞은, 오래 묵은 남편입니다.

두 살 아래의 아내와 자식 넷을 낳아 길렀지요. 그 아이들을 다 여의고 다시 둘만 남은 지도 십년이 넘었습니다.

제 2의 신혼이다, 뭐다, 낯간지러운 소리들을 하지만, 우리 세대 부부에게는 그저 자식이라는 등짐을 내려놓고 한숨 돌릴 수 있다는 자체에 감사한 시간이었지요.

둘만 남았다고 갑자기 ‘신혼’이 되지는 않더군요.

서로한테 점점 더 의지하게 되면서도, 성격이 안 맞고, 취향이 달라 엇박자가 나는 건 여전합니다.

밀고 당기고 힘겨루기를 하는 것도 젊은 부부들이나 다를 바가 별로 없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문제는 자식들의 비현실적인 기대입니다.

젊을 때부터도 그다지 금슬 좋은 부부는 아니라는 것은 저희들도 잘 알 텐데, 저희들 모두 집 떠나면서부터, 우리가 갑자기 오순도순 잘 지내기를 기대하는 듯 합니다.

이 나이 되어서까지 싸우고 부딪힐 일이 뭐가 있느냐고 하는군요.

둘이 한 마음으로 재미나게 지내고, 한 쌍의 잉꼬처럼 서로 보살펴주라고 말합니다. 또 그렇게 믿고 싶은 모양입니다.

하기야 그래야 저희들 마음이 편하긴 하겠지요.

 

그런데 제가 불만인 것은, 자식들이 우리 부부를 ‘대등한 잉꼬’로 봐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내를 나의 보호자로, 나는 아내의 관리를 받는 환자나 아이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집안 대소사나, 모임이 있을 때, 며느리와 딸이 아내의 의견만 묻고 아내의 결정에 따릅니다.

심지어 내 칠순 때에도 모든 상의는 아내하고 하더군요. 장소, 일시는 물론이요, 손님의 범위도 아내가 정합니다.

내게 어떤 선물을 할지도 아내와 상의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 생일이라고 준비한 봉투가 아내 손으로 들어가고, 아내는 그 돈으로 부부동반 터키 여행을 가자고 하더군요.

 

뒤늦게 여행 재미를 알아서 친구들과 유럽까지 여행 다녀온 아내입니다.

얼마전 부터는 터키에 가보고 싶다고 노래를 하더니 내 칠순 덕에 그 소원을 풀게 생긴 거지요.

저는 싫다고 했습니다.

워낙에 제가 집 떠나는 걸 안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자식들 하는 짓에 심사도 뒤틀렸더랬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그 돈 절반 내놓고 혼자 다녀오라고 했지요.

차마 혼자는 못 가더군요.

그 돈은 지금도 아내의 통장 안에 있을 텐데, 그러고도 아내는 두고두고 제 원망입니다.

칠순 기념 부부동반 여행 가쟀더니, 돈으로 절반 떼 달라고 했다고요.

아전인수에 적반하장이지요.

 

오월이면 더 억울해집니다.

같은 부모인데 어버이날 대접이 다릅니다.

치사한 소리지만 선물에 들인 정성부터가 다릅니다.

아내에게는 며느리들이 스카프며 화장품이며 고심을 해서 성의껏 갖다 바칩니다. 시어머니 비위를 맞추느라요.

저는 매년 똑같은 홍삼제품입니다. 두 분이 같이 드시라는데, 아내가 챙겨주다 말다 합니다.

물론 봉투는 모두 아내 손에 들어갑니다. 아내는 입이 귀에 걸려서 얼른 받아챙기지요. 정확한 금액조차 안 물어보면 말 안 해줍니다.

아내가 선심 쓰듯 쥐어주는 돈을 받을 때는 불만이 고개를 듭니다.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한다면서 어째서 봉투는 전부 어머니한테 갖다 바치는 겁니까?

돈을 꼭 받아쥐어야 맛은 아니지만, 자식 키운 보람이랄까 뿌듯함 같은 것을 저도 똑같이 누릴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자식들은 그럽니다. 엄마가 어련히 알아서 챙겨드릴까요? 두 분이 어디 좋은데라도 다녀오세요.

그러나 그 좋은 데가 어딘지는 아내가 정하지요.

그리고 저는 부부동반 자체가 별로 내키지를 않습니다.

게다가 저도 숨이 붙어 있는 한, 요긴하게 돈 쓸 데가 왜 없겠습니까?

 

그래도 어른이 되어가지고 자식들한테 봉투 타령을 할 수도 없고, 그 문제로 아내와 다투기도 치사해서 그냥저냥 넘겨 왔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해도해도 너무하더군요. 결혼 40주년 기념으로 이번 어버이날에는 어머니 명품백을 해드린답니다. 무슨 가방이 몇 백씩이나 하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던데, 그거 하나면 아버지인 저도 덩달아 뿌듯해할 줄 아는 모양입니다.

 

물론 고마운 일입니다.

이만큼 자식 키우느라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마누라이니 명품백 아니라 더한 것도 받을 자격은 있고요.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요. 몫몫이 따로 아닙니까?

다만 내복 한 벌씩이라도 부모를 동등하게 대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얘기를 하다보니 참 치사한 소리를 길게도 했네요.

그러나 아닌 게 아니라 길가는 젊은이들을 붙잡고라도 내가 말해주고 싶습니다.

부모님 용돈을 드릴 때는 5만원씩이라도 따로따로 나눠드리라고요.

한쪽이 다른 한 쪽에게 구차해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잉꼬도 한번씩 다툴 때가 있고, 숨 붙어 있는 한 용돈은 요긴한 것이니 말입니다.

 조선 : 2014,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