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마법사들
프랭크 모스 지음|박미용 옮김|알에이치코리아|328쪽|1만5000원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은 많지만 호기심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 또 자발적 동기로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젊은이는 많지만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몰입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 책은 그 둘의 융합과 통섭이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MIT 미디어랩 소장으로 일한 프랭크 모스의 5년 경험을 담은 책. 상상을 발명으로, 발명을 혁신으로 만드는 MIT 미디어랩 연구원의 창조 과정이 흥미롭고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책은 ‘인간을 위한 기술’이라는 구호 위에서 창의적 연구가 이뤄지는 미디어랩 현장을 소개한다. 10년 후 미래가 궁금하면 실리콘 밸리를 가고, 20년 후 미래가 궁금하면 MIT 미디어랩을 주목하라고 했다. 팔다리가 절단된 사람들이 자연스레 걸을 수 있게 하는 인공기관 ‘파워풋’, 환자 스스로 치료법을 사용하는 데 참여하게 할 수 있는 웹서비스…. 인간의 복지와 건강을 위한 첨단 기술을 통해 20년 후 미래사회를 그려볼 수 있다.
- 살아있는 벽’이 어떻게 램프를 켜고 음악을 연주하는지 시연하는 모습. /허윤희 기자·알에이치코리아 제공
"'꿈의 공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자, 연구실을 돌면서 마법사들을 만나볼까요?"
6일 오후 미국 보스턴 찰스강 서안에 자리 잡은 MIT(매사추세츠공대) 미디어랩 신관. 프랭크 모스는 활짝 웃는 얼굴로 기자를 맞았다. MIT 미디어랩은 미디어·예술·의료 등 전 산업에 IT를 접목한 융합 기술연구소. 모스는 2006년 미디어랩의 3대 소장으로 임명돼 5년간 이끌며 세계 최고 연구소의 위상을 떨치게 했다. 신간 '디지털 시대의 마법사들'에서 그는 천재 발명왕들과 동고동락한 경험, 향후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혁신적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현장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로 풀어냈다.
◇상상이 곧바로 현실로
미디어랩 신관은 6층짜리 투명한 건물. 기둥을 제외한 벽이 대부분 유리라서 안이 훤히 보인다. 바닥도 투명 유리벽이라 위층에서 아래층 연구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모스는 "한지붕 아래 여러 학문이 공존하고, 그들 간 경계는 이 건물의 벽처럼 투명하다"고 했다.
건물 곳곳에서 수십 명의 '해리포터'들이 머리를 맞대고 뭔가 만들고 있었다. 진짜 발 같은 의족, 실물 크기의 전기 자동차, 사람의 손까지 터치스크린 컴퓨터로 전환하는 소형 장치…. "모두 학생들이 만든 겁니다. 상상을 곧장 3D 프린터로 만들어내는 '리얼 타임 인벤션'이지요."
30여명의 교수진과 140여명의 연구생이 개인용 로봇, 미래 오페라, 뉴미디어 의학, 감성 컴퓨팅 등 27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학생들은 첫 학기에 '무엇이든 만드는 방법'이란 수업을 듣는다. 망치나 드릴, 레이저 절단기 등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하는 데 필요한 장비 사용법도 배운다. 넉 달이면 망치 한번 들어본 적 없던 학생이 기능공 수준으로 노련해진다.
모스는 "가장 인기 있는 곳"이라며 개인용 로봇 연구실로 안내했다. 이곳의 최고 스타는 말하는 로봇 '넥시'. 나이는 다섯 살, 키는 1.2m 크기인 넥시는 모터 달린 바퀴로 돌아다니고, 눈을 깜빡이거나 고개를 갸웃하며 감정을 표현할 줄 안다. 모스는 "사회성을 갖춘 이 인간형 로봇은 환자나 노인의 생활을 돕는 친구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비결은 창조적 자유
모스는 "모험적인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미디어랩은 어떤 것도 실패로 간주하지 않는다. 설령 그렇더라도 새 아이디어를 얻는 디딤돌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구자에게 주어진 가이드라인은 두 가지. 그들의 발명이 미래의 삶을 향상시킬 잠재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연구가 다른 누군가가 하는 것과 완전히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창조적 자유는 미국 사회에 시사하는 게 많아요. 지금 미국 아이들은 실패에 대한 자유가 없습니다. 유치원·초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갈 때까지 정해둔 코스를 밟으며 실패하지 않으려고 하죠. 아시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안 되죠. 인간은 실패에서 배웁니다."
- (왼쪽)MIT 미디어랩 미래 오페라실에 놓인 로봇 배우들. (오른쪽 상단)개인용 로봇 연구팀의 신시아 브리질(오른쪽)이 말하는 로봇과 함께. (오른쪽 하단)MIT 미디어랩에서 발명한 ‘식스센스’를 이용했을 때 휴대폰 버튼이 손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 /허윤희 기자·알에이치코리아 제공
◇학과의 경계를 없애라
학과 간 경계가 없는 학제 간(interdisciplinary) 접근도 왕성한 창조력의 비결. "미디어랩 연구실에 있으려면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이 돼야 합니다. 누구도 자기 전공 안에 갇혀 있지 않아요. 컴퓨터 과학자가 디자인을 공부하고, 음악가가 뇌과학을 연구하며, 사회학자가 로봇 조립에 능통합니다."
그는 '발명'과 '혁신'은 분명 다른 뜻이라고 강조했다. "발명이 획기적인 생각과 기술을 고안하고 창조하는 일이라면, 혁신은 그렇게 발명된 생각과 기술을 현실에서 쓰도록 하는 겁니다." 로봇 바퀴와 시티카라는 눈부신 발명품은 연구실 밖에서 쓰일 수 있어야 혁신적인 물건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연구자와 후원 기업 간의 독특한 파트너십도 미디어랩만의 혁신 모델. 이곳 1년 예산 2000만~3000만달러 중 80%가 후원 기업에서 나온다. 삼성과 LG를 비롯해 모토로라·구글·마이크로소프트·IBM 등 60개 회사가 후원하고 있다. 모스는 "자금을 내는 기업들은 미디어랩의 연구 결과로 나오는 지적재산권을 나눠 갖고, 일부 직원들은 미디어랩 연구팀에 1년 이상 상주하며 공동 연구를 펼친다. 산학 협력의 성공 모델"이라고 했다.
- (왼쪽)시력을 스스로 측정하게 해주는 장비 ‘네트라(netra)’를 선보이는 연구원. (오른쪽)주차 중 충전이 이뤄지는 미래형 접이식 자동차 ‘시티카(city car)’. /허윤희 기자·알에이치코리아 제공
그는 현재 미디어랩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람들이 건강 문제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라며 뉴미디어 의학 연구실로 안내했다. 존 무어(36) 박사가 평면 TV를 켜고 '콜라보리듬(CollaboRhythm)'이란 시스템을 소개했다. 개인용 가상 주치의를 활용해 환자가 집과 일터 어디서든 건강을 관리하게 해주는 시스템이다. "미국의 경우 당뇨병·고혈압·고지혈증 같은 만성 질환을 앓는 환자의 절반 정도는 약을 처방대로 복용하지 않습니다. 이로 인한 합병증 때문에 추가적으로 들어가는 돈이 매년 2900억달러(약 316조원)죠. 콜라보리듬은 스마트폰, 인공지능, 나노테크놀로지를 함께 활용해서 환자가 꼬박꼬박 약을 먹게 해줘요."
그는 "미디어랩의 초기 25년이 스마트폰, 캔들처럼 예전에 없던 디지털 혁명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앞으로 25년의 미션은 보통 사람도 건강과 부, 행복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 현대의 마법사에게 '당신이 그리는 미래 기술'을 물었다.
"컴퓨터는 절대 인간의 지능을 넘을 수 없어요. 다만 사회의 균형을 바꿀 수는 있지요. 보통 사람이 스스로 전문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환자 중심의 헬스케어, 학교 중심이 아닌 학생 중심 교육, 소비자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제조업의 변화. 이 세 가지가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우리 사회 균형을 바꿀 겁니다."
- 케임브리지=허윤희 기자
MIT 미디어랩과 3대 소장 프랭크 모스는…
1985년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교수와 제롬 위즈너 MIT 총장이 설립한 미디어랩은 ‘상상력 연구소’라 불린다. ATM(은행입출금기)을 비롯해 옷처럼 입는 컴퓨터(Wearable Computer), 전자책 단말기에 사용되는 ‘전자잉크’, 음악게임 ‘기타 히어로’, 디지털 로봇완구 ‘레고 마인드스톰’이 MIT 미디어랩 작품이다.
3대 소장 프랭크 모스<사진>는 항공우주학 전공으로 프린스턴대에서 학사 학위를, MIT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컴퓨터 분야로 전향해 IBM, 아폴로 컴퓨터 등의 연구원으로 일했다. 스텔라 컴퓨터, 티볼리 시스템스 등 컴퓨터 관련 회사를 창업해 단단히 키워냈다. 현재 MIT 미디어랩 석좌교수이자 뉴미디어 의학 연구팀 수장이다.
조선 : 2013.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