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신(神)의 경쟁자'… DNA해독을 넘어 '생명'을 만든 이단아

해암도 2026. 5. 8. 12:46

J.크레이그 벤터 1946.10.14~2026.4.29

 

인간 유전자 지도 완벽히 그려낸 과학자
컴퓨터 설계로 첫 합성 생명체 만들어 내
“유일한 사후 세계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연금술사 파라켈수스는 저서 ‘물의 본성에 대해’에 한 가지 실험을 기록했습니다. “증류기에 인간의 정액을 넣고 40일간 밀봉해 부패시키면 투명한 형상이 나타난다. 이것을 말의 태내와 같은 온도에서 40주간 혈액을 먹여 키우면 인간이 완성된다.” 파라켈수스는 이 생명체를 ‘호문쿨루스(Homunculus)’, 즉 ‘플라스크 속 작은 인간’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호문쿨루스가 선천적으로 모든 지식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신의 창조물보다 우월하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성공했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호문쿨루스를 본 적도 없고 재현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개념은 테드 창의 SF 소설 ‘일흔두 글자’, 일본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 등 후대 수많은 작품에 살아남을 만큼 강렬했습니다. 생명 창조란 그만큼 상상조차 힘든 영역이었고, 과학적 설명보다 기괴한 주술 같은 방식이 오히려 설득력 있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약 200년 뒤, 이탈리아 볼로냐대 교수 루이지 갈바니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명의 비밀에 접근합니다. 1780년 개구리 해부 실험 중 죽은 뒷다리에 전기 자극을 주면 다리가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발표 즉시 ‘생명의 비밀이 전기일 것’, ‘전기로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유럽에 퍼져 나갔습니다. 이 가설은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1816년 여름, 스위스 제네바 호수 인근 디오다티 빌라에 시인 바이런과 퍼시 셸리, 그리고 퍼시의 연인인 열여덟 살의 메리 셸리가 모였습니다. 독일 괴담집을 읽다가 바이런의 제안으로 각자 공포 소설을 쓰는 내기를 시작했고, 메리 셸리는 갈바니의 실험에서 모티브를 얻어 소설을 씁니다.

 

1818년 발표된 ‘프랑켄슈타인’, 부제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였습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여러 시체의 부위를 이어붙인 뒤 전기의 힘으로 생명을 부여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이 세상에 나온 지 182년이 지난 2000년, 미국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한 과학자가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3년 만에 인간 게놈의 전체 지도 초안을 완성했다.” 당시 미 정부가 30억달러를 쏟아부어 15년째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일개 민간 기업이 새로운 방법으로 획기적으로 단축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10년 뒤, 이 사람은 한 발 더 나아가 실험실에서 스스로 복제하는 생명체를 만들어냅니다. 인류가 오랫동안 꿈꿔온 생명 창조, 신의 영역에 다다른 순간이었습니다.

 

기존 과학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생명의 설계도’를 만들고 생명 자체를 빚은 이 사람이 바로 지난달 말 세상을 뜬 J.크레이그 벤터(John Craig Venter·1946.10.14~2026.4.29)입니다. ‘이단아’ ‘악동’ ‘혁명가’로 불리며 현대 생명공학의 틀을 바꾼 벤터에 대해 사이언스 뮤지엄 그룹 디렉터인 로저 하이필드는 이렇게 썼습니다.

 

“벤터는 낭만적이고 쉬지 않는 개척자였다. 그는 어떤 일이든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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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 벤터

서핑보드 타던 부랑자

 

벤터는 1946년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모르몬교에서 파문당한 뒤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어린 벤터는 샌프란시스코 남쪽 철길 옆 노동자 주거지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모험을 즐겼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활주로에 진입하는 여객기와 경주를 벌였고, 철로를 지나는 화물열차에 올라탔다가 내리기를 반복했습니다. 학교생활에는 아무 흥미가 없었습니다. 성적표는 C와 D로 가득했습니다. 훗날 벤터는 자신의 이런 성향이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때문이었다는 것을 직접 밝혀냅니다.

 

무언가를 만들 때는 집중력이 극도로 높아졌습니다. 7학년 때 학교 야구장에 직접 전광판을 만들어 달았고, 목공 수업 시간에는 시속 90㎞로 달리는 수상 비행기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벤터는 남부 캘리포니아 해안가에서 파도를 타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실상 부랑자나 다름없는 삶이었습니다. 1965년 베트남 전쟁 징집 통보가 날아왔습니다. 해군에 입대한 벤터는 IQ 검사에서 142점을 기록했고, 덕분에 의무병이 됩니다. 파병된 뒤에는 베트남 다낭 해군 야전 병원의 중환자실에 배치됩니다.

 

“연구자는 세상 전체를 구할 수 있다”

 

다낭에서의 경험은 벤터의 인생을 바꿨습니다. 매일 밤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병사들, 뇌 손상을 입은 10대 소년들, 사지가 잘려 나간 몸으로 실려 오는 병사들 사이에서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지옥 같은 풍경 속에서 벤터는 의학의 무력함에 분노했고, 동시에 그 무력함을 극복하고 싶다는 열망을 키웠습니다. 어느 날 극도의 절망에 빠진 그는 바다로 헤엄쳐 들어가 죽으려 했지만, 어느 지점에서 마음을 바꿔 돌아왔습니다. 이 시기에 대해 벤터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난 가장 혹독한 방식으로 의학에 입문했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절감했고,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의사 한 명은 평생 수백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연구자는 세상 전체를 구할 수 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벤터는 1969년 산마테오 커뮤니티 칼리지에 입학해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은 뒤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대(UCSD)에 편입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생화학자 네이선 캐플런 교수의 연구실에 합류한 벤터는 아드레날린이 세포를 가속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실험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프리츠 리프만과 함께 코엔자임 A 효소를 발견했던 캐플런은 벤터의 아이디어에 감탄하며 연구비를 지원합니다. 벤터는 캐플런에게서 인생을 지탱하는 두 가지 핵심 교훈을 얻었습니다. 아이디어는 실행에 옮겨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불과 3년 만에 학부생 벤터는 첫 번째 연구 논문을 학술지에 발표합니다. 서핑을 즐기던 부랑자는 6년 만에 UCSD 생리학·약리학 박사가 됩니다.

 

DNA 해독의 역사 바꾼 신기술

 

버펄로 뉴욕주립대 교수를 거쳐 미국 국립보건원(NIH)에 합류한 벤터는 신경세포 간 신호 전달에 관여하는 유전자(DNA)를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DNA 하나를 찾아내는 것은 몇 달씩 걸리는 지루한 수작업이었습니다. 인간의 유전체 전체에는 약 2만개의 DNA가 있는데, 이 속도라면 전부 해독하는 데 수천 년이 넘게 걸릴 상황이었습니다. 벤터는 자동화로 해독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일 방법을 구상합니다. 하지만 NIH의 상관들은 예산 지원을 거부했습니다.

 

벤터는 자비로 레이저를 이용해 DNA 염기 문자를 자동으로 식별하는 컴퓨터 기계의 시제품을 구입했습니다. 기계를 뜯어보고 연구한 끝에 벤터는 당시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유전체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대신,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유전자 부분만 골라 짧은 태그를 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실제로 기능하는 DNA 부분만 집중하고, 나머지 긴 무기능 서열은 건너뛰도록 하면서 벤터는 하루에 25개씩 DNA를 식별할 수 있게 됩니다. 마치 도서관의 수많은 책 속에서 원하는 내용을 찾을 때, 책 전체를 읽는 대신 색인 카드만 훑어보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기존 방식보다 수백 배 빠른 속도의 이 방식에 벤터는 ‘발현 서열 태그(Expressed Sequence Tags·EST)’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DNA 분석의 역사를 바꾼 기술이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30억달러짜리 프로젝트 비웃은 반항아

 

NIH는 벤터가 발견한 DNA 단편들을 특허로 출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인간 게놈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제임스 왓슨이 이에 반발해 사임해 버립니다. 왓슨은 이 기술에 대해 “원숭이도 할 수 있는 기술”이라며 극도의 불쾌감을 나타냅니다. DNA의 실체를 규명하는 대신 기능적인 부분에만 집중해 표시해 두는 것 같은 일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죠. 또 DNA 단편에 특허를 등록하면, 훗날 DNA의 역할을 실제로 밝혀낸 과학자들은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도 문제 삼았습니다. “과학의 공유 정신을 망가뜨리는 두뇌 없는 작업”이라고도 했습니다.

 

당시 벤터와 연구원들은 왓슨의 이런 발언과 행동에 충격을 받았지만, 이후 고릴라 가면을 사서 쓴 채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응수했습니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조롱받고 논란이 되는 것에 분노한 벤터는 1992년 NIH를 그만두고 독립 연구소 TIGR(The Institute for Genomic Research)를 설립합니다.

 

3년 뒤 벤터는 세계 최초의 쾌거를 이룹니다. 박테리아 헤모필루스 인플루엔자의 전체 게놈 염기 서열을 해독하는 데 성공한 겁니다. 자유 생활이 가능한 생명체의 게놈 지도가 최초로 완성된 사례였습니다.

 

벤터는 곧이어 생명공학의 판도를 바꿀 도전에 나섭니다. 1998년 민간 기업 셀레라를 설립한 뒤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향해 선전포고를 합니다. 게놈 연구자들로 가득 찬 회의장에 나타난 벤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 이제 일을 그만해도 된다. 우리 회사가 그 일을 끝내겠다.”

 

청중은 경악하고 분노했습니다. 미 정부가 30억달러와 15년을 투자한 프로젝트를 신생 민간 기업이 끝내겠다는 선언이었으니까요. “과학의 탈을 쓴 사기꾼”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2000년 올해의 인물

 

벤터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직접 구상한 ‘전체 게놈 산탄총 염기서열 분석법(샷건 시퀀싱·Whole Genome Shotgun Sequencing·WGS)’이 있었기 때문이죠. 기존 방법이 게놈을 순서대로 조각조각 읽는 방식이라면, WGS는 게놈 전체를 무작위로 산산조각 낸 뒤 수백만 개의 조각을 동시에 읽고, 수퍼컴퓨터로 재조립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왓슨은 공개 석상에서 벤터를 히틀러에 비유하며 비판했고, 왓슨의 뒤를 이어 인간 게놈 프로젝트 책임자가 된 프랜시스 콜린스는 “너무나 조악한 오류투성이 기술”이라며 비웃었습니다. 벤터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 책임자들은 거짓말쟁이 클럽”이라고 맞받았습니다.

 

노벨상급 인물들이 연일 설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다 못한 백악관이 나섰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과학 보좌관 닐 레인에게 “이 사람들을 화해시켜라”고 압박했습니다. 에너지부 산하 생물·환경연구소 소장 아리스티데스 파트리노스가 나섰습니다. 파트리노스는 콜린스와 벤터를 집으로 초청해 피자를 대접했고 극적인 화해가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2000년 6월 26일 백악관에서 콜린스와 벤터의 공동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클린턴은 인간 게놈 지도 초안의 완성을 알리는 두 사람을 1800년대 초반 미국 최초의 대륙 횡단 탐험을 이끈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에 비견하며 ‘위대한 지도’라고 극찬했습니다. 하지만 과학계에서는 이들의 공동 선언을 극적인 효과를 위한 연출로 평가합니다. 벤터의 역할이 훨씬 컸다는 것이죠. MIT 맥거번 뇌 연구소 소장 필립 샤프는 “벤터 덕분에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최소 4년은 빨라졌다”고 했습니다.

 

벤터는 2000년 파이낸셜타임스가 꼽은 ‘올해의 인물’이 됐고, 타임과 뉴스위크도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했습니다.

 

미국 표준기술연구소와 MIT 연구진이 개발한 인공 생명체 JCVI-syn3A. 5년 전 크레이그 벤터 박사가 만든 인공 생명체에 유전자 7개를 추가해 실제 박테리아처럼 균일하게 분열하고 자라도록 했다. 오른쪽 아래 흰 막대 길이는 0.05mm다. /NIST
 

신의 영역에 발을 들이다

 

공동 기자회견 이후 양측 연구팀은 마무리 작업을 거쳐 2003년 4월, 공식적으로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완성을 발표합니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규명한 지 정확히 50주년이 되는 시점에 공개한 겁니다. 최초의 인간 게놈 프로젝트 결과물은 여러 사람의 DNA를 혼합한 것이었는데, 그중 상당 부분이 벤터 자신의 DNA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지도의 재료로 자신을 쓴 것이죠.

 

게놈 프로젝트가 끝난 뒤 벤터는 다시 한번 불가능한 목표에 도전합니다. ‘생명체를 처음부터 설계해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2004년부터 그는 요트 소서러 2세호를 타고 지구를 일주하며 해양 미생물의 DNA를 수집했습니다. 바닷물 한 방울에는 수천만 개의 미생물이 살고 있는 만큼,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더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벤터의 생각이었습니다. 실제로 벤터의 항해에서 발견된 DNA의 수는 당시까지 인류가 문서화한 모든 DNA보다 많았습니다.

 

2010년 5월 벤터의 도전은 현실이 됩니다. 벤터는 마이코플라스마 미코이데스라는 박테리아의 전체 게놈을 컴퓨터로 설계해 화학적으로 합성한 뒤 세포 안에 이식했습니다. 이 세포는 스스로 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인공 생명체가 탄생한 겁니다. 벤터는 이 생명체에 ‘Synthetic(합성의)’이라는 의미를 담아 신시아(Synthia)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인류 최초의 인공 생명체에 숨겨 놓은 글자들

 

벤터는 신시아의 DNA에 A·G·C·T 네 염기를 활용해 네 가지 워터마크를 숨겼습니다. 생명을 직접 창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벤터의 기발한 상상력과 철학까지 엿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 워터마크는 합성 생명체를 만드는 데 참여한 연구자 46명의 이름과 이메일 주소였습니다. 이메일 주소는 코드를 해독한 사람이 연락할 수 있도록 넣었는데, 발표 후 2주 만에 과학자 26명이 연락해 왔습니다.

 

두 번째 워터마크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인용한 “살기 위해, 실수하기 위해, 쓰러지기 위해, 승리하기 위해, 삶으로부터 삶을 다시 창조하기 위해(To live, to err, to fall, to triumph, to recreate life out of life)”였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이스 재단이 저작권 위반 항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 워터마크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전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서 인용했습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있을 수 있는 모습으로 보라(See things not as they are, but as they might be).”

 

마지막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말 “내가 만들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What I cannot build, I cannot understand)”였습니다. 그런데 파인만의 원래 말은 ‘build’가 아닌 ‘create’였는데 벤터 연구팀이 잘못 적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수정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집니다.

 

“처음으로 신에게 경쟁자가 생겼다”

 

환경운동가 팻 무니는 신시아에 대해 “처음으로 신에게 경쟁자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윤리학자와 종교계는 일제히 우려를 쏟아냈고, 미국 의회는 청문회까지 열었습니다. 벤터는 당당하게 대응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창조한 게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그것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벤터는 이 기술을 활용해 바이러스 백신을 신속하게 만들 수 있고, 탄소를 흡수하는 맞춤형 미생물로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으며, 석유를 대신할 연료를 생산하는 조류를 설계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나는 100% 확신한다. 언젠가는 과학자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원하는 생명체를 설계하고, 그것을 만들어낼 것이다.”

 

모두 반신반의했지만, 실제로 벤터가 개척한 이 합성생물학은 현재 생명공학의 주류가 됐습니다. 모더나와 화이자가 개발한 mRNA 코로나19 백신, 임파서블 푸드의 배양육, 당뇨병 치료제 시타글립틴 등이 합성생물학으로 만든 결과물입니다.

 

말년의 벤터는 노화와 장수의 비밀을 파고들었습니다. 2014년 그는 ‘휴먼 롱제비티’를 설립해 노인들의 게놈을 대규모로 분석하며 건강한 100세 DNA 조건을 탐구했습니다. 게놈 서열만으로 샘플을 채취한 시점의 나이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라”

 

벤터는 스스로 ‘나쁜 남자’ 이미지를 만들고, 이를 즐겼습니다. 오만하다는 평가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습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가 생각나는 것을 그냥 말하는 직선적인 성격이라고 했고, 반대편에선 자아도취자 또는 이기주의자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2002년 셀레라에서 투자자와 싸우다가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닮은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가 과학과 인류의 역사를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이런 성격 덕분일 겁니다. 실제로 벤터는 자신이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2009년 리처드 도킨스와의 대담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전쟁과 과학 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겐 이 지구에서의 단 한 번의 삶만 주어진다고 믿게 됐다. 유일한 ‘사후 세계’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다.”

 

벤터가 스스로 밝힌 좌우명은 “죽고 싶지 않다면,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라”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59세에 남긴 유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