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시인 구상의 박정희 평가 "당신에겐 우리의 미래가 있다"

해암도 2026. 7. 17. 17:48

끝까지 권력과 거리 뒀던 '박정희의 술친구'

 

구상(具常·1919~2004) 시인을 처음 본 것은 1980년대 서울 여의도 광장 언저리에서였다.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하도 오래 전의 일이라 그 문학 행사에 내가 일부러 찾아갔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일로 지나가다 우연히 보게 된 것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얀 수염을 기른 그는 김남조 시인 같은 다른 문인과 함께 나란히 단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참석한 시민들의 ‘시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같은 뜬구름 잡는 듯한 질문에 마이크를 잡고 무척 진지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사람의 신언(身言)이 저렇게 온화하고 단정하며 품격을 갖춘 신선 같은 풍모를 지닐 수도 있는 것이었구나. 삼국지에 곧잘 나오는 ‘마치 신선 같은 외모의 선비’를 그전까지 본 적이 없었는데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 후로 그의 시를 찾아 읽었다. 내가 아직 이해하기 힘든 언어의 숲 속을 꾸준히 탐색하니 위안이 되는 점이 적지 않았다. 그러다 어떤 시 한 편을 읽고, 어린 나이에 대단히 실망했다. “이 사람, 알고보니 어용(御用) 아니었나?” 그 시가 무엇인지는 조금 뒤에 설명하겠지만, 그 시가 그 시점에 쓰여진 맥락을 나는 아직 전혀 알지 못했었다.

 

구 시인이 세상을 떠난 것은 내가 조선일보사에 입사한 뒤 문화부에 있던 2004년의 일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이었던 그의 별세 소식은 문화면 톱기사로 실렸다. 생전에 그 스스로 ‘내 사상을 잘 담은 시’라고 꼽았던 시 ‘오늘’이 지면에 실렸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구상은 ‘영혼과 구도의 문학 정신을 펼친 시인’으로 평가된다. 돈독한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영혼을 노래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엔 굴곡이 많았다. 15세에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3년 만에 뛰쳐나왔다. 뒤늦게 진학한 중학교에서 퇴학당하더니 노동판에 뛰어들었고, 일본으로 밀항하기도 했다. 원산에서 해방을 맞았고, 그의 시가 김일성으로부터 ‘퇴폐적, 반동적, 감상주의’라는 비판을 받자 월남했다. 영남일보와 대구매일신문 기자 시절, 이승만 정권에 맞서 반독재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거친 세상에서 뒹군 덕에 그의 작품이 따뜻한 인간미와 휴머니즘으로 가득했을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불우한 천재 화가 이중섭은 구상의 절친 중 한 명이었다. 1991년 김의경 극본, 이윤택 연출의 연극 ‘길 떠나는 가족’이 개막했다. 이중섭의 일생을 그린 연극이었다. 이중섭의 죽음이 나오는 맨 첫 장면에서 수염을 기른 한 사람이 병원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금세 깨달았다. ‘아, 저 사람은 구상이구나.’

 

그리고 구상에게는, 또 한 명의 친구가 있었다.

 

군인 박정희였다.

 

1950년대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 주간으로 근무할 때 구상은 두 살 위인 청년 장교 박정희 대령과 처음 만났고, 사석에서는 “박 첨지!”라 부를 정도로 허물없이 지낸 술친구였다. 그러나 돈과 권력을 멀리했던 시인 구상은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단 한 번도 ‘자리’에 가지 않았다. 대통령 박정희가 장관과 대학 총장직을 제안할 때마다 ‘나는 수염 기르며 사는 야인(野人)’이라고 대답하며 끝까지 거절했다는 것이다.

2003년 '구상문학총서' 발간 무렵의 시인 구상. /조선일보 DB
 

이게 무슨 얘긴지 조금 더 들여다보면, 처음 박정희의 ‘제안’은 1961년 5·16 직후였다. 군사정변 사흘 뒤인 5월 19일의 상황을 구상은 이렇게 회고했다.

 

<기관총을 실은 장갑차가 마당에 놓인 어느 빈 호텔의 방. 그(박정희)도 나도 잠자코 술잔만을 거듭 비웠다. 마침내 그가 뚱딴지 같은 소리를 꺼냈다.

 

“미국엘 좀 안 가 주시렵니까?”

 

“내가 영어를 알아야죠?”

 

“영어야 통역을 시키면 되죠!”

 

“하다 못해 양식당의 매너도 모르는 걸요!”

 

“그럼 어떤 분야라도 한 몫 져 주셔야지!”

 

“나는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놔 두세요!”

 

얼핏 들으면 만담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술잔을 거듭 비웠다.>

 

박정희는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한 달에 한 번씩 구상을 만나 그의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구상은 그와의 친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박정희와 노선을 같이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정희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꾸준히 그를 만난 것이었다고 한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옳다는 말만 하니, 그들에게선 결코 들을 수 없는 직언을 구상이란 양반이 해 준다’는 얘기였다. 누군가는 이것에 대해 ‘박정희는 허물없는 직언(直言)을 솔직히 말해줄 수 있는 바깥 라인을 약 10년 동안 소중하게 유지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10년이라니? 그랬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별세하기 얼마 전부터 박정희는 더 이상 구상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상은 이렇게 탄식했다.

 

“대통령의 눈에 암운(暗雲)이 끼었구나!”

 

그런데, 박정희와 구상의 관계에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바로 앞서 내가 한때 ‘어용 시 아닌가’라며 실망했던 그 시. 제목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 시는 1967년 7월 1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제6대 대통령 취임식 때 구상이 써서 낭송했던 축시(祝詩)다.

1967년 7월 1일 제6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당신의 영광에는

푸르름이 있다.

밤안개를 헤친 결단의 그날

이 땅에 또 하나 새벽 동을 트게 하고

우리의 가슴속에 새 삶을 불러일으킨

저 5월의 푸르름이 있다.

 

당신의 영광에는

땀이 배어 있다.

바위벽을 뚫는 광부의 이마같이

보리타작을 하는 농부의 잔등같이

아니, 앞장서 수레 채를 잡은 일꾼같이

전신에 땀이 배어 있다.

 

당신의 영광에는

우리의 미래가 있다.

찌든 가난과 역사의 멍에를 벗고

북녘 땅, 내 산하 어서 바삐 찾아서

5천만 겨레가 서로 눈물로 반길

그런 눈부신 미래가 있다.

 

당신의 영광에는

우리의 다짐이 있다.

썩고 곯은 것은 제 살이라도 도려내고

눈 뒤집힌 편싸움과 패가름을 막아서

꿀벌과 같은 질서와 화목을 이룰

우리와 당신의 굳은 다짐이 있다.

 

당신의 영광에는

우리의 영광이 있다.

일하고 땀 흘리는 자의 영광

젊음과 꿈을 갖는 자의 영광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는 자의 영광

오 오, 당신과 우리의 영광이 있다.

 

구상은 훗날 이 시에 대해 좀처럼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때 내가 압력을 받아 억지로 쓴 시’라거나 ‘사실은 내 생각이 아니었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1967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재선됐을 저 시점에 박정희는 40대의 젊은 나이였고, 아직 3선개헌이나 유신의 암운이 끼어 있던 때가 아니었다. 그는 다른 정치인과는 달리 오랜 세월 침체에 빠진 민족성을 지적하고 ‘우리도 할 수 있다, 해보자’며 용기를 북돋웠다. 그걸 좀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앞서 봤듯 구상은 박정희에게 아부해서 뭔가를 얻어내려 했던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 와서 다시 읽어보면, 최소한 저 시만큼은 당시 구상의 진심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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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6.07.17.

 

# : 나도 평소에 흠모하던 구상선생님을 직접 만나보는 행운을 딱 한번 가진적이 있다. 1990년대, 91년인가 2년인가 이름도 잊어버린 골프친구가 있었는데 그 부친이 돈이 좀 있어서 무슨 문학상인가를 만들어서 부산에서 수상 행사를 했는데, 그 행사에 초청받아 가보니 나에게는 전설같이 흠모하던 구상선생님이 단상도 아니고 일반석 통로 옆 좌석에 앉아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계셨는데..., 너무 놀랍고 반가워서 소주병을 구해 옆에가서 반 꿇어안자 "존경하는 선생님께 한잔 올리겠습니다" 하니 허허 뭐...하시면서 잔을 받고 술을 드시고, 나에게도  한잔 따라 주시는데 얼른 받아 마시면서, 그때는 황송해서 술맛인지 물맛인지도 모르고 마시고 구십도로 절을하고 물러나온기억이 생생하다. 아 그리운 이름 구상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