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더글러스 해밀턴 1942.8.16~2025.12.8
코끼리 이름 붙이고, 곳곳에서 관찰
항공 조사·밀렵 추적 상아 거래 제동총·울타리 대신 ‘벌통’으로 공생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모든 동물 연구는 철저히 실험실 안에서 이뤄졌습니다. 행동주의 심리학 거장 B.F. 스키너가 비둘기와 쥐를 상자 안에 가두고 자극과 반응을 측정하던 것 같은 방식이죠. 이 당시 과학자들은 동물을 감정 없는 생명체로 다루는 것이 곧 객관적인 연구 결과를 얻는 일이라 믿었습니다.
야생에서 동물을 관찰하는 것은 과학자가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하고 비체계적인 방식이라고 여겼습니다. 특히 동물에 이름을 붙이거나 부르는 것은 과학자라면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의인화의 오류’로 취급받았습니다.
그 금기를 깬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당대 최고 고인류학자 루이스 리키(1903~1972)에 의해 발탁된 뒤 1960년대 동아프리카로 파견돼 생태학과 진화학의 새로운 역사를 연 여성 과학자들, 침팬지의 제인 구달과 마운틴 고릴라의 다이앤 포시입니다.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 밀림에서 오랑우탄 연구에 평생을 바친 비루테 갈디카스와 함께 ‘리키의 여인들’로 불리는 이들은 학계의 관습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동물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들의 개성을 기록하고, 함께 뒹굴었습니다.
그 결과 유인원의 삶을 통해 인류의 오랜 뿌리를 새롭게 쓸 수 있었습니다. 여성이라며, 비과학적이라며 비웃던 과학자들은 이들이 내놓은 수많은 기록에 결국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리키의 여인들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활약했던 또 다른 과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사랑한 것은 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포유류, 코끼리였습니다. 60년 가까이 아프리카 초원을 비행하며 수백만 마리 코끼리를 일일이 세고, 코끼리의 모든 것을 연구했으며 코끼리를 멸종 위기로 몰아넣었던 상아 밀렵을 박멸한 사람. 바로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난 이언 더글러스 해밀턴(Iain Douglas-Hamilton·1942.8.16~2025.12.8) 박사입니다.
세계 최대 보호 단체인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은 추도사에서 이렇게 그를 기렸습니다.
“더글러스 해밀턴은 아프리카 코끼리에게 제인 구달이 침팬지에게 한 것과 같은 존재였다. 만약 코끼리들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은 더글러스 해밀턴을 이렇게 설명했을 것이다. 학생, 교사, 전문가, 대사, 보호자, 전사.”
스핏파이어 파일럿의 아들
더글러스 해밀턴은 1942년 영국 도싯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데이비드 해밀턴 경은 전설적인 스핏파이어 비행 중대를 지휘한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해밀턴이 두 살이 되기 전, 비행 훈련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 프로넬라 스택은 1930년대에 설립된 여성 건강미 연맹(Women’s League of Health and Beauty)의 수장으로, 수만 명의 회원을 이끈 여성 운동의 선구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강인한 독립심을 강조했습니다. 어머니가 재혼한 새아버지는 해밀턴에게 아프리카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읽어 줬습니다. 해밀턴은 열 살 때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프리카 하늘을 날며 동물들을 구하겠다.”
해밀턴은 스코틀랜드의 고든스톤 학교를 거쳐 옥스퍼드 오리얼 칼리지에서 동물학을 전공합니다. 그의 스승은 동물행동학의 창시자이자 네덜란드 출신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니코 틴베르헌이었습니다. 동물의 사회적 행동을 주로 관찰한 틴베르헌은 제자들에게 “동물을 자연에서 그대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철학은 더글러스 해밀턴이 평생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됩니다.
코끼리에게 이름을 붙이고 관찰하다
1965년 23세 청년 더글러스 해밀턴은 경비행기 파이퍼 페이서를 직접 몰고 탄자니아 마냐라 호수 국립공원에 착륙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꿈이 이뤄진 것이죠.
당시 마냐라 호수 국립공원은 코끼리 450마리가 좁은 공간에 모여 지냈습니다. 지역 농민들과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공원 관리자들은 코끼리 개체 수를 강제로 줄이는 방법을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더글러스 해밀턴은 이들을 말리며 “왜 코끼리들이 이렇게 행동하는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나무 위에 오두막을 짓고 몇 달간 코끼리 무리를 관찰했습니다. 코끼리들과 눈을 맞추고, 귀 모양과 엄니의 각도, 피부 주름의 패턴을 낱낱이 기록했습니다. 처음에는 번호를 붙였지만, 곧 이름을 지어 붙였습니다. 사나운 암컷 우두머리는 고대 영국 여왕이었던 ‘보아디케아’, 등산을 즐기는 코끼리는 ‘프랭크’, 고아를 거두는 다정한 암컷은 ‘알파인’으로 불렀습니다.
보아디케아가 해밀턴을 가장 괴롭혔습니다. 인간을 극도로 경계한 그는 해밀턴이 시야에 들어오면 곧바로 돌진했고, 해밀턴은 나무 위로 달아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쫓겨남’에서 연구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나무 위에서 무리를 내려다보며 암컷 우두머리가 어떻게 집단의 기억과 의사결정을 주도하는지 관찰했습니다. 훗날 그가 발표한 ‘코끼리 사회의 모계 구조’ 이론의 기초가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코끼리 하는 남자?
5년간의 마냐라 호수 연구는 1972년 옥스퍼드 박사 학위 논문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코끼리가 죽은 동료의 뼈를 코로 어루만지는 애도 행동, 세대 간 지식 전수, 복잡한 의사소통 체계 등을 최초로 기록한 이 논문은 오늘날까지 코끼리 행동학의 ‘성경’으로 불립니다.
해밀턴은 2004년 한 다큐멘터리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아무도 아프리카의 야생동물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무리가 아닌 개인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나는 코끼리를 그런 방식으로 처음 만난 사람이 된 행운아였다.”
1969년 해밀턴은 케냐 나이로비 한 파티에서 이탈리아계 케냐인 사진작가 오리아 로코를 만났습니다. 첫 만남 당시에 대한 로코의 인터뷰 중 일부입니다.
“그가 나에게 관심을 보여서 춤을 함께 췄는데, 춤 솜씨가 영 별로였다. 그래서 ‘뭐 하는 사람이에요’라고 물었더니 그가 ‘코끼리 합니다(I do elephants)’라고 했다. ‘코끼리요? 그게 무슨 말이죠?’라고 되물었다. 총으로 코끼리를 쏘는 게 아니라 코끼리를 연구한다는 사람을 처음 만난 거였다.”
로코는 마냐라 호수로 그를 따라갔고, 1971년 두 사람은 결혼했습니다. 두 딸의 이름은 스와힐리어로 지었는데 큰딸 사바(Saba)는 ‘일곱’, 작은딸 두두(Dudu)는 ‘곤충’을 뜻했습니다.
‘엘리펀트 홀로코스트’를 목격하다
1970년대 해밀턴의 무대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됐습니다. 그는 저공 비행 기술을 개발해 광대한 지역의 코끼리 개체 수를 체계적으로 세는 ‘항공 조사(Aerial Survey)’ 방법론을 창안했습니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 IUCN·WWF(세계자연기금)와 함께 34국을 누비며 아프리카 코끼리의 전체 현황을 처음으로 집계했습니다.
정기적인 조사가 계속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해밀턴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1979년 첫 조사가 끝났을 당시 약 130만 마리에 이르렀던 아프리카 코끼리는 급격히 줄어들어 1989년 조사에서는 60만 마리가 채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불과 10년 만에 절반 이상이 사라진 겁니다. 해밀턴은 이를 ‘엘리펀트 홀로코스트’라고 불렀습니다. 원인은 명확했습니다. 아시아, 특히 중국과 일본에서 상아 수요가 폭증하면서 아프리카 초원이 거대한 코끼리의 공동묘지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첫 조사가 끝난 뒤 1980년부터 2년간 해밀턴은 코끼리 보존 문제가 가장 심각했던 우간다 국립공원에 명예 수석 관리관으로 부임합니다. 당시 우간다 국립공원은 폐허나 다름없었습니다. 2만 마리가 넘던 코끼리는 1600마리까지 줄어 있었고, 수단에서 넘어온 밀렵꾼들이 반자동 소총으로 코끼리를 학살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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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브 더 엘리펀트 설립
해밀턴은 항공 순찰 시스템을 구축해 밀렵꾼을 쫓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밀렵꾼은 물론 수단 정부군 군사들까지 경비행기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비행기 동체에 구멍이 뚫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밀턴은 조종간을 놓지 않았습니다. “두려웠냐고 묻는다면 물론이었다. 하지만 아래에 코끼리들이 있었기 때문에 멈출 수 없었다.”
그의 항공 조사 데이터와 끈질긴 노력은 1988년 미국의 ‘아프리카 코끼리 보전법’ 통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듬해에는 멸종 위기종 국제거래협약(CITES)의 국제 상아 거래 전면 금지라는 역사적 결정이 내려집니다. 해밀턴의 노력에 감복한 케냐 대통령 대니얼 아랍 모이가 12t에 이르는 상아를 공개적으로 불태운 장면도 국제사회의 공감을 이끌어냈습니다.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코끼리 개체군이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해밀턴은 만족하지 않고 다음 단계를 추진했습니다. 1993년 그는 케냐 삼부루 국립보호구를 본거지로 ‘세이브 더 엘리펀트(Save the Elephants·STE)’를 설립했습니다. 슬로건은 “코끼리에게 미래를 보장하라”였습니다.
STE가 이룬 가장 혁신적인 성취는 GPS 추적 기술의 도입입니다. 마취된 코끼리의 목에 위성통신 칩이 내장된 표지를 달아 이동 경로를 모니터링했습니다. 2007년에는 구글 어스와 함께 코끼리의 이동을 위성 영상으로 만들어 대중에 공개했습니다. 그 결과 삼부루에 서식하는 1000마리의 코끼리 집단은 25년 이상의 기록을 축적한 ‘세계에서 가장 잘 연구된 코끼리 집단’이 됐습니다.
총·전기 울타리 대신 벌통으로 찾은 공존
해밀턴은 20대 초반 탄자니아에서 고심하던 ‘인간과 코끼리의 공존’을 잊지 않고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STE의 제자 루시 킹 박사와 함께 결국 해법을 찾아냅니다. 이들은 코끼리가 아프리카 꿀벌 소리를 극도로 두려워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코끼리는 지상에서 천적이 없지만, 눈과 코 주변의 민감한 부위는 벌떼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농경지 경계를 따라 일정 간격으로 벌통을 달아 울타리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코끼리가 줄을 건드리면 벌통이 흔들리고, 성난 벌떼가 날아오르면 코끼리는 달아납니다. 총이나 전기 울타리 같은 장치와 달리 농민들에겐 꿀을 판매할 수 있다는 추가적인 수입까지 생기는 묘수였습니다. 2024년 기준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코끼리 집단 서식지 인근에 있는 농가에는 1만4000개 이상 벌통이 배치돼 있습니다. 코끼리와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가장 평화적인 방법을 찾아낸 셈입니다. 사람을 몰아내고 코끼리를 지킬 것이냐, 코끼리 숫자를 인위적으로 줄일 것이냐 같은 비생산적인 논쟁은 이로 인해 종식됐습니다.
두 번째 상아 전쟁
인간의 욕망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해밀턴과 국제사회가 함께 일궈낸 평화는 20년 정도만 유지됐습니다. 중국의 신흥 중산층 사이에서 상아 공예품 수집 열풍이 불자, 아프리카에서 다시 코끼리 밀렵이 급격히 늘기 시작했습니다. 2010~2012년 사이에 10만 마리 이상이 불법 도살됐습니다.
해밀턴은 중국을 직접 공략하기로 합니다. 중국 NBA 스타 야오밍을 케냐로 초청해 직접 코끼리 밀렵 현장을 목격하도록 했습니다. 참혹한 광경을 본 야오밍은 이후 중국에서 강력한 반상아 캠페인을 이끕니다. 해밀턴은 2012년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 출석해 다르푸르 반군과 연계된 밀렵 조직이 말을 타고 1600㎞가 넘는 거리를 이동해 아프리카에서 코끼리 수백 마리를 학살한 사건을 고발했습니다. 정치권을 대상으로 로비도 펼칩니다.
결국 2015년 시진핑 국가주석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상아 교역의 전면 금지에 합의했고, 2018년 중국은 국내 상아 거래까지 금지했습니다.
“코끼리는 내 친구이자 가족”
해밀턴의 마지막은 너무나 역설적이었습니다. 2023년 2월 부인과 함께 나이바샤의 자택 인근을 산책하던 중 갑자기 벌떼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몸을 던져 아내를 감쌌고, 수백 마리의 벌이 그의 몸을 쏘아댔습니다. 해밀턴은 아나필락시스 쇼크로 의식을 잃었습니다. 케이프타운으로 긴급 후송돼 목숨을 건졌지만, 이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병상에 누운 채로 투병하다가 작년 말 세상을 떠났습니다. 코끼리를 지키려고 벌의 힘을 빌렸던 그가, 벌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 겁니다.
제인 구달은 생전 해밀턴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우리는 동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사람들로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코끼리를 감정을 가진 존재로 세상에 알린 것이 바로 그였습니다.”
해밀턴은 코끼리를 왜 그렇게 사랑했을까요. “나는 단 한 번도 코끼리를 연구 대상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내 친구이자 가족이며,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었습니다.”
박건형 콘텐츠앤AI전략팀장 조선일보 입력 202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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